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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N페르소나

삶을 읽는 대화

by 김반장

유독 사람이 자주 오고 가는 날이 있다.

어제가 그랬고, 오늘이 그랬다.

직장생활을 시작한 사람,
매너리즘에 빠졌다가 다시 가슴에 불을 지피는 사람,
가정과 일 모두 유연하게 잘 해내는 사람,
옳은 길을 사랑해서 자주 화내는 사람,
퇴직을 앞두고 서운한 마음을 털어내는 사람,
몸을 낮추고 한 사람 한 사람 눈여겨보는 사람,

사람이 오고 가면 그 삶도 오고 간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나의 기억은 어딘가에 머물러 닻을 내리고 있고 싶어 고집을 피워도,
살아 있는 나는 강물처럼 흐르는 사람들의 삶에 넘실대는 물풀이 된다.
삶도 오고 가고 소식도 오고 가고 슬픔도 오고 간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은 진실이다.
행복은 다 비슷해 보이지만 불행은 저마다의 모습이 있다.
슬픔은 고유하다.
언뜻 비슷해도 그 심연은 알 수 없고 사람마다 깊이 각인되며 발현되는 방식도 다르다.
자신의 슬픔을 대하는 방식을 보면 타인을 대하는 방식도 알 수 있다.
사람은 자신에게 새겨진 무늬 대로 감정을 느끼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세계를 확장한다.

고로 슬픔은 그 사람 고유의 무늬다.

기골이 장대한 남자가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농담을 던지다가 은근슬쩍 말을 건다.
그에게 귀를 기울인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랬어.
자기 거는 자기 가슴에 묻는 거라고.
서운하면 서운한 사람만 억울한 거지.
다 자기 삶에 자기 거는
자기 가슴에 묻고 사는 거야.'

그의 삶을 읽는다.

서운함은 순간 과격하고, 돌아보면 유치하고, 곱씹어 보면 외로운 만큼 내가 강하다는 의미이니 말할 필요가 없다. 과오와 상처에는 솔직하되 거기에 오래 머무르지는 않는다. 훌쩍 떠날 수 있는 취미와 능력이 있고 원한다면 가족과 함께일 수도 있다. 아버지로서 견뎌야 할 현실이 무겁지만 스스로 잘 꾸려왔다. 큰 변화에 앞서 사소한 변화를 느끼고 있다. 주변 사람들이 소원해지고, 이러쿵저러쿵 잔소리가 많아진다. 그때마다 상처 입은 마음을 달래러 친구를 찾는다. 감정은 삼키고 가슴에 묻는다. 죽을 때까지 견딜만하다면 변화를 위해 애쓸 필요는 없다. 요즘 들어 돌아가신 아버지의 말이 자꾸 떠오른다. 강퍅하고 강인한 남자라서 말은 팍팍하게 해도 내심 서럽다.

그는 다시 웃으며 일어선다.
손주는 귀엽고 마누라도 좋다.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들의 소식은 금방 잊는다.
그들이 흘리고 간 삶의 무늬는 남는다.
그들이 삶의 한 조각을 연필로 눌러쓰면
나는 그 뒤에 끼운 먹지가 된다.
그들이 지우고 떠나도
나는 그 자국을 보고 있을 것이다.


뒤에 남는 사람이라는 게 조금 서글플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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