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

철학적 욕망의 기원

by 김반장

하나 벗어났다 싶으면 또 하나가 온다. 무한히 덮쳐오는 파도를 여지없이 맞아야 하는 게 삶인 것만 같아, 여전히 제자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자운동하는 인간 존재가 헛되고 하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나를 알고 세상을 알게 되었다는 지점에서 나는 또 깨진다. 애써 지켜온 자기 자신의 상(狀)을 유지하기 위해 화내고 싸우고 비틀어진 헛소리를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 또한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내가 왜 이런 감정을 느낄까, 스스로 물어봐도 돌아오는 메아리는 완벽한 구조를 갖춘 좌뇌의 거짓말. 질문에 대답하는 순간 사고는 질문이 던진 그물망에 포획되고 그 안에서의 설명은 모두, 작디작은 질문에 구속된 어처구니없는 해명일 뿐이다. 아무리 정제해 봐도 내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아픔의 땅과는 머나먼 구름 같은 말. 인간의 탈을 쓰고 문명의 허상 아래 꽥꽥대며 짖고 싶은 변연계의 충동인가. 살아남고 싶어서, 야생의 혼란을 봉합하고자, 양육자의 욕망이라 멋대로 상정해 버린 조잡한 근본환상인가. 내가 고정해 버린 나의 상(狀)이 무엇일까. 어떤 상이 깨졌기에 나는 이리도 아픈가. 그래도 출근을 하고 일상을 산다. 다소 말수가 줄긴 했지만 여전히 웃고, 스몰토크를 던진다. 아무것도 의미 없다는, 모든 것이 무망 하다는, 원룸 벽 안에서 요양보호사가 걸어 잠근 문만 보며 아직 죽지 못해 살아있는 시간을 한탄하는 저 노인들의 하루가 모두 나의 삶인 것만 같은, 자동사고를 곁에 두고, 그래도 '살아있으니 삶인 거란다' 다독이며, 완벽한 답안지는 강물에 흘려보내고, 나를 사로잡는 질문의 권위에 '그것이 뭣이 중헌디' 되물으며, 사람들이 알아차리든 아니든 증상까지는 어쩌지 못해도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한다.


<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 백상현
-소크라테스, 철학적 욕망의 기원에 관하여-

(프롤로그)
15 철학은 하나의 욕망이고, 그것은 변화하려는 욕망이며, 현재의 우리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의 권력에 대항하는 고함소리와 같은 것이라는 관점이다.
(1장 공백을 탐닉하는 히스테리적 주체)
델포이신전 신탁 "소크라테스가 가장 지혜'
- 자신보다 더 지혜로운 사람 찾아다님

30-31 주체를 규정하려는 타자의 포획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히스테리적 욕망의 여정이, 소크라테스 자신에게는 고난으로 간주되었던 그것이 그의 삶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한 방식으로, 소크라테스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 인간의 세계와 신의 세계 모두로부터 일탈하여 방황하는 아테네의 유령이 된다. 그 어떤 지형-토포스topos로도 포획되지 않는 비非장소, 무소성, 아토피아atopia에 속하려는 욕망이 시작되고 있었다.

33 아테네의 지식이 더 이상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는 장소. 고정관념의 지배가 몰락하는 장소. 패러다임의 장악력이 오류를 일으키는 장소. 그것은 하나의 지식-질서가 붕괴되는 지점이라는 의미에서 균열의 장소이며 증상의 장소이다.
- 35 억압하려 하면 더욱 집요한 방식으로 되돌아오는 것.

37 아테네의 법과 소크라테스적 증상의 대립은 로고스적인 것과 병리적인 것의 대립에 더 가깝다고 해야 한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대항하여 싸운 것은 언어에 의해 지탱되는 관념들의 세계이며 그들의 고정점들이었던 반면에, 소크라테스 자신이 내세운 것은 무지, 즉 결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 법의 문제 1: 언어에 의한 신체-국가의 상징화
42 그런 의미에서 건강함이란 지배적 언어-질서가 신체(국가)의 표면을 흐르는 욕망의 유동성을 효과적으로 억압하여 통제하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배자의 법률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충동을 압도하여 제어하고 있는 상태. 정신분석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소외aliénation라고 부른다. 이것이 소외라는 부정적 용어로 표현되는 이유는,신체를 위협하는 증상적 충동을 포기한 상태, 과도한 쾌락으로 간주되는 그것으로부터 멀리되는 상태, 위반의 기회들을 빼앗긴 상태이기 때문이다. 신체가 질서 잡혀 있다는 것은, 흘러넘치는 욕망의 흐름으로부터, 파토스적인 것으로부터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파생되는 결과는 안정이며, 조화의 상태에 도달했다는 환상이다. 이것이 환상인 이유는, 언어에 의한 신체의 온전한 장악이 결단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43 언어에 의한 신체의 장악 - 쾌락의 관점에서 보자면 하나의 죽음 - 욕망이 통제된 핍진한 삶
45 정상성, 건강함, 훌륭함과 같은 개념은 그렇게 욕망을 통제하여 규범화하는 권력의 이름들이다. 인간의 자아는 바로 이러한 권력의 고정점들을 중심으로 심리적 국경선을 확보하는 방식으로 안정성을 획득한다. 또는 권력의 고정점이 파생시키는 안정 상태 그 자체가 자아이다.
(각주) 여기서 '자아' 라고 말해지는 것은 지배적 관념의 반영으로 생겨난 개인 또는 집단의 형상을 가리킨다. 그것은 언어적 명령과 그로부터 파생된 이미지의 혼합물이다. 정신분석적 의미에서 자아는 상상계와 상징계가 교집합을 이루는 영역에 위치한다. 이것은 고착이며, 끊임없는 반복적 제자리 운동 속에 있다. 이것은 나를 나로 인식하도록 만드는 동시에, 내가 나라고 알려진 이미지에 사로잡힌 채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드는 나르시시즘의 중핵이다.


○ 법의 문제 2: 진단과 봉합
50 재판은 소크라테스의 이름 없는 욕망이 생산해 내는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그것에 죄명을 선고하고, 논증하는 방식으로 그의 아토포스적 편력을 중지시키려는 목적을 가진 것이었다.
50 (재판의 가장 중요한 기능) 모든 초과적 욕망들을 이미 존재하는 이름들의 질서 내부로 포획하여 사로잡는 것. 실재의 초과를 포획하는 상징계의 표기. 이를 통해 공동체의 자아-항상성을 보존하는 것. 그러한 방식으로 공동체 내의 불학정적 사태들울, 즉 간단히 파악되지 않는 불투명한 사건으로서의 증상적 사태들을 고정관념의 언어로 다시 분절하여 봉합하는 것.

○ 법의 문제 3:강박증
59 질서를 추구하는 마음, 영원히 변하지 않는
정신적 실체가 존재한다는 믿음, 이성적 언어의 도움으로 그와 같은 영원성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은, 바로 그러한 항구적 안정성이 존재하지 않는 현실에 대한 심리적 방어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러한 심리의 방어는 언제나 도를 지나치는 방식으로 병적인 것이 된다. 욕망의 카오스에 대한 방어로서 등장한 질서에 대한 맹목적 추구는 스스로 무거워지는 방식으로 침몰할 운명이다. 법은 그렇게 자신의 정당성을 맹신하는 가운덕원래의 목적이던 심리적 또는 사회적 안정 상태를 훼손한다. 라깡의 표현대로 "질서가 제 목을 조르는" 사태가 초래된다.
61 보다 엄밀히 말하자면, 욕망의 대상들이 가진 합법성을 선명히 합으로써 그것들의 유통 가능성과 경로를 결정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법의 목적은 욕망에 관련된 모든 사태를 공적인 언어의 영역으로 귀속시키는 데에 있다. 이를 달리 표헌한다면 법이란 욕망을 언어적인 것으로 번역하는 데에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 언어라고 말헤지는 것은 권력을 가진 공격인 언어를 말한다.
법률의 언어는 그렇게 세계의 사물Ding을 산물Sache의 수준으로 옮겨 놓는다.

63 인간의 마음은 확인되지 않는 충동적 사물의 출현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 방식으로 스스로를 강박증의 신전에 가두어 버린다. 로고스라는 개념, 최고선으로 가는 왕도로서 플라톤에 의해 가정된 이 개념이야말로 강박증의 신전이 숭배하는 강박적 진리의 환영에 다름 아니다. 그리하여 로고스라는 개념은 자신의 병적인 중상을 습기기 위해 파토스라는 개념을 발명해 내야만 했던 것이다. 스스로가 얼마나 파토스적인지를 은폐하기 위해, 부인하기 위해 병적인 것에 대한 다양한 리스트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바로 플라톤의 고전주의 철학이 지닌 병적인 측면이다.

64 (소크라테스 욕망) 질서를 흔들려는 욕망. 단지 흔드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흔들림을 항구적으로 존속시키려(65)는 욕망. 그러니까, 단순한 균열이라 간주되었던 어떤 간극을 마치 하나의 실체인 것처럼 그것을 욕망의 유일한 대상(a)으로 간수하여 사물das Ding의 위상으로 승화시키려는 욕망. ㅡ 공백의 존재를 소유했다는 그토록 허구적 주장을 통해서 자신의 우월성을 논증
66 모든 로고스 뒤에는 전혀 로고스적이지 않은 죄책감의 기원인 초자아라는 괴물이 있다.
67 우리는 로고스의 중핵을 지탱하는 것은 파토스이며, 같은 방식으로 파토스 역시 로고스에 의해 표지된다는, 그리하여 둘은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속성을 갖는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69 히스테리란 질서가 반복되는 것의 정지를 반복하려는 시도이며, 그로부터 무의식의 쾌락을 향유하려는 모반이다. 규법의 반복에 대한 저항의 반복. 억압의 반복에 대항하는 공백의 반복. 그로부터 규범적 질서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려는 죽음충동의 반복이 그곳에서 관찰된다.
(2장 왜상을 탐닉하는 정신병적 주체)
73 우리 모두의 삶이란 환상의 영향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74 문명이 정상인이라고 부르는 주체의 욕망 구존 환상을 좇는 구조
간극의 소멸 1) 환상 실현 : 주체는 결여없는 망상적 광기에 도달 2) 환상이 제거된 현실과 조우: 우울증의 발작
74-75 우리는 우리 자신의 욕망의 민낯을, 파편적 충동의 광포한 유희에 불과한 그것을 결코 직시할 수 없다.
75-76 우리가 마주한 실재란 그 자체로 절대적 이질성, 프로이트를 따라서 라깡이 이웃이라고 명명했던 위치에, 그러니까 언제나 국경 너머에 위치한 도달 불가능한 장소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인간의 집요한 욕망이 만들어 낸 거대한 환상의 체계가 바로 세계라는 것이다.
ㅡ소통 가능한 영역 및 상징계에서 공유된 환상, 세계를 지배하는 고정관념의 권력이 생산하기에 모두가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욕망의 대상으로서의 환상들. 그 외부의 환상/개별적 환상/망상=정신병의 구조
85 신경증은 하나의 보편성이라는 일자의 권력에 종속되기를 소망하는 마음의 구조인 반면, 정신병의 망상은 개별성의 한계 속에 감금되어 있다.
ㅡ소통가능한 허구=아버지의-이름
ㅡ정신병, 아버지-이름의 태만 또는 폐제, 유아기에 자신의 충동을 온전히 포기하디 못했던 주체의 심리 구조
44 각주) 카타르시스: 환자의 신경증의 원인이라고 간주되는 감추어진 기억이나 심리적 증상이 언어에 의해 표현되는 순간, 그에 얽혀 있던 정동이 발산되어 해소되는 경험 속에서의 쾌락
45 각주) 네버멘슈, 즉 이웃이 지시하는 곳은 죽음 충동으로서의 주이상스의 자리다. 신경증은 바로 이것을 억압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세계를 구축한다.
104 소크라테스의 입을 빌어 플라톤이 doxa 즉 속견 또는 억견이라 불렀던 고정관념의 체계....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 우리는 우리 자신이 누구인지, 즉 자아와 관련된 인식에 도달한다. 우리는 바로 이것에 지배를 받으며, 그것이 생산하는 욕망의 대상들을 사랑하도록 길들여진 채 살아간다. 고정된 앎의 권력에 의해 부여된 우리 자신의 이미지를 탐닉하며 살아가는 삶. 반면에, 이것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나 자신에게 부여된 한계로 만족하지 않는 삶이며, 이것은 곧 나 자신과 관련된, 그럼에도 결코 나 자신이 아닌 타자성으로, 이웃에게로 욕망을 향하게 하는 삶이다. 그리고, 이처럼 주어진 나 자신의 이미지가 아닌 다른 것을 욕망하는 삶이란 소크라테스가 추구했던 윤리의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다. 캐묻지 않는 삶이란, 관념들의 이데올로기적 고정점들에 의해 주어진 지식을 의심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근거하여 나와 세계를 욕망하는 인생이란 살 가치가 없다고 말했던 소크라테스를 떠올려 보라. 그에게 진리란 언
제나 지금 여기에는 없는 것이고, 그래서 저 너머에 있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변증론적 기술이란 지금 여기의 지식에 구멍을 뚫은 뒤 그 균열의 틈새로 저 너머 이웃의 세계를 보기 위한 철학적 절차에 다름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사랑은 그렇게 이해 되어야 한다. 익숙한 사물들의 세계, 알아볼 수 있는 대상들의 세계에 둘러싸여 그 너머를 욕망할 가능성을 차단당한 채로 유한한 세계-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결코 윤리적 삶이 아닌 것이다.
(3장 죽음의 해석학)
128 소크라테스로부터 양도trado된 공허의 말들이 보편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번역traduco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의 말들은 단지 공백을, 죽음을 지시할 뿐이니까.
128 세상을 몰락시키려는 죽음 충동의 말들을 애도하고 싶다면, 그에 걸맞은 새로운 표현을 찾아주어야 한다.
131 하나의 새로운 언어를 진정으로 사랑하여 번역한다면 그것의 날카로움을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 그리하여 현재의 공용어 속으로 들어온 새 언어의 폭력을 견뎌내야 한다. 새 언어는 현재의 언어에 상처를 도입하고, 흔들림을 조장하며, 마침내 몰락을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우리는 번역 불가능한intraduisible 언어를 사랑하는 과정이란 하나의 새로운 세계를 '도입itroduire'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번역의 불가능성이란 현재의 가능한 세계를 폭파시키는 도래할 진리의 역능이라는 사실도 알게 된다.
138 철학적 욕망: 고정관념의 권력이 반복되는 것에 저항하도록 만드는 실천
- (136) 실체가 아니라 행위로서의 진리의 반복. '캐묻는' 실천의 반복
144 그리하여 "나는 악령의 목소리를 듣는다"라는 소크라테스의 정신병에 관한 명제는 진리의 욕망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이 비로소 이해될 수 있게 된다. 그것은 자신을 정상성의 화신으로 내세우는 세계의 지식과 권력에 대항하며 스스로를 기꺼이 비정상이라 자처하는 철학적 욕망의 목소리였다. 선한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고정관념의 권력에 대항하여 악의 위치를 담담히 수용하는 목소리이다. 정상적이며 선한 세계에 속한 당신들의 세계가 감힌 유한성을 돌파하기 위한 '영혼의 병'에 기꺼이 감염되고자 했던 악의 꽃을 든 남자의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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