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에 주어진 고통을 사랑하게 되었을 때 나는 오래 살고 싶어졌다. 젊음과 교환하여 얻은, 이해할 수 있는 슬픔의 종류가 많아지며 나는 비로소 어떤 강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강박이란 장강명 작가가 <표백>에서 말하는 현대인의 고질적인 병일 테다.
현대인의 강박은 삶의 결함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것은 삶을 안전하게 통제하고자 하는 인간적인 열망. 그러나 이미 있는 것을 없애고자 투쟁하기 시작하면 결국 죽음과도 같은 삶, 기계적인 삶, 차가운 외피에 쌓여 안으로는 욕망의 횡포를 견디는 우울이 남을 뿐이다. 그래서 <표백>의 청년들은 자아가 찢어지게 팽창한 우울로 고통이 멸균된 이 새하얀 세계에 한 획을 긋고자 집단 죽음을 기획한다.
강박은 문명의 산물이다. 살아있는 것은 생동하고 모든 것은 변하지만, 인간은 고통을 피하고자 문명을 창조했다. 문명으로 우리가 얻은 것은 생존이다. 문명의 규칙, 질서, 법은 세계를 표백한다. 깨끗하고, 안전하고, 편리하게. 김산하 작가는 <비숲>에서 인간은 금지하지만, 자연은 다양성을 허용한다고 말한다. 그러니 우리가 잃은 것은 생동하는 삶 자체다. 우리는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세계의 다양성, 그 불편한 감각을 잃었다.
인간 안에는 신도 있고 짐승도 있다. 언어로는 봉합할 수 없는 불확실성의 땅이 있다. 이를 철학자들은 '타자성'이라고 말하고, 종교인은 '영성'이라 말하며, 정신분석학자는 '욕망'이 탐하는 '실재'라고 말한다. 좋든, 싫든 우리는 그것과 함께 살아가야 한다. 인간 수준의 호불호 너머에 삶의 기회를 받아들이는 내맡기기 실험은 그 진실을 받아들이는 데서 시작한다. (<될 일은 된다>)
인간의 욕심과는 달리 우주는 광활하고 세계는 불가해하다.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무력감을 견디지 못해 인간은 투쟁한다. 인간의 뇌는 변명하는 데 능하다. 옳고자 하면 옳은 이유를 생각해 내고, 미워하고자 하면 미운 점만 보는 게 인간이다. 고소고발이 난무하고 시시비비의 구조에 갇혀 싸움이 끊이지 않는다. 도덕의 탈을 쓰고 인간을 몰아세우는 망령들이 육체 없는 정신, 사이버 공간에 떠다닌다.
이 강박의 세계에 사로잡힌 생각의 사슬을 끊고 진정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읽어볼 만한 책이다.
* 수용전념치료(ACT)가 생각난다. ACT에 따르면, 고통에 대해 반응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데, 1) 고통을 회피하면 반복적 언어체계 안에서 2차 고통을 마주하게 되고 예기불안에 시달리게 되지만(인지적 융합), 2) 관찰하는 자아를 작동하고 '기꺼이 경험'하되 생각을 알아차리면 오히려 고통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므로(인지적 탈융합 기법) 고통스러운 경험도 수용하기를 선택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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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완벽주의자를 위한 책>, 마이클 투히그, 클라리사 옹
p22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오는 소음 때문에 소중한 현재의 순간을 얼마나 많이 놓쳤는가?
p56 완벽주의의 원칙들은 주로 두려움에 관한 것이다.
p58 일관성을 향한 욕망은... 상황을 효율적으로 단순화하라는 턱없는 요구를 한다. 하지만 실제로 이미 일어난 각종 경험들을 일어나지 않은 척 할 수 없고, 마구잡이로 섞인 생각들은 깔끔한 스토리 라인에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p68 당신은 본능적으로 생각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아무 의심 없이 복종한다. 그래서 생각이 하는 말을 듣기 전에 잠시 멈추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생각이 하는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는 자동반사를 늦출 수 있다.
p69 당신의 정신적, 감정적 자원을 논쟁보다 더 좋은 곳에 쓰고 싶다면 다른 일을 하라. 공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상대방의 의견을 인정한 다음 대화에서 빠져나와라. 당신의 생각들에게도 똑같이 하라. 인정해 주고 당신의 시간과 에너지를 가치 있는 일에 쓰도록 주의를 돌려라.
p74 당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활동들을 적어라. 아무리 황당한 것이든, 나태한 것이어도 상관없다. 발레 레슨 받기, 잠 푹 자기, 낙엽 쓸기, 롤러스케이트 타기. 모든 판단을 내려놓아라. 어떤 기회의 문이 열리는지 지켜보아라.
p79 삶에는 아픔, 괴로움, 결함들이 존재한다. 우리는 스스로의 결함을 부정하려 하지만 삶의 일면을 거부하면 할수록 삶은 옹색해질 뿐이다.
p87 느낌을 수용하는 과정은 그것이 존재할 공간을 주는 것을 뜻한다. 할머니로부터 물려받은 흉촉한 가구를 놓을 공간을 거실에 마련하는 것처럼 말이다. 받아들인다고 해서 반드시 좋아하는 건 아니다. 그저 공간을 줄 뿐이다. 반대로 느낌을 거부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거부하는 것이다. 느낌은 과거의 산물이고 당신은 과거로부터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감정적 회피는 결국 내면으로부터의 자기부정이다.
p93 느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그 느낌이 사라질 때까지 안달하는 대신 느낌이 존재할 공간을 주고 그동안 다른 중요한 일을 하는 것이다.
p117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알지 못하고, 그것들과 연결되지 못할 때 존재론적 불안과 두려움이 밀려든다. 마치 기다림이 삶이 되어버린 것조차 깨닫지 못한 채 끊임없이 무언가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것과 같다.
p119 당신을 살아 있게 하는 것, 설레며 하루를 시작하게 만드는 것, 기꺼이 고통을 감수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아라.
p122 일이 어떻게 '되어야만' 하고, 어떤 사람이 '되어야만' 한다는 개념에 여전히 집착하고 있다면 가치를 규명하기가 더 어려워진다.
p124 가치를 찾는 것은 옳은 대답을 찾는 것도, 옳은 동기(이것 또한 원칙이대)를 찾는 것도 아니다. 당신의 영혼을 채우고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것들을 찾는 것이다.
p149 과정을 중시하라고 이토록 강조하는 이유는, 통제권 밖에 있는 결과를 통제하고 싶은 욕구로부터 벗어나게 해 주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가를 행복한 사람으로 만들 수는 없지만 타인을 사랑과 연민으로 대할 수는 있다. 아이들이 바르게 행동하도록 만들기는 어렵지만(특히 공공장소에서) 인내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할 수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