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마를렌 하우스호퍼

by 김반장

구태여 나를 지키는 것이 글쓰기라면, 글을 쓸 필요가 있을까. 시간의 끔찍한 그물망에 포박되었다는 진실이 불러일으키는 두려움과 불안으로부터 굳이 나를 지킬 필요가 있을까. 후배들이 쏟아져 나오고 이제 대다수의 후배들이 그리 어리지 않다. 언젠가부터 내 나이에 놀라고, 나와는 달라져버린 또래들의 삶에 놀란다. 언제까지 놀라기만 할 텐가. 놀라지도 말고 속이지도 말자. 그다지 아름답지도 않았던 과거에 묶여, 익숙한 기억의 나를 지키려고 했던 노력이 오히려 시간을 칼날로 만들고 있지 않을까. 이 시간의 끝은 적막이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사람들이 그 진실에서 고개를 돌리고, 눈을 가려도, 똑바로 보자. 두려워도, 불안해도, 궁극의 적막까지 삶은 계속된다.

<벽>
6 내가 글을 쓰기로 결심한 이유는,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응시하며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순간에 글쓰기가 나를 지켜주기 때문이다.

184 이제는 그만두고 싶었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더는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심장이 서서히 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받아들이기로 결심만 했을 뿐인데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지난 일들이 또렷이 다 기억났다. 나는 솔직해지겠다고, 지난 일들을 미화하지도 왜곡하지도 않겠다고 결심했다.

188 무엇이 잘못되어 있었는지, 어떻게 하면 더 잘할 수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매우 현명했지만 나의 현명함은 너무 늦게 나타났다. 태어날 때부터 현명했다 하더라도 현명하지 않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을 것이다. 나는 죽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았다. 마음이 아팠다. 그들이 죽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삶의 즐거움을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26 마음을 줄 대상이 남김없이 사라진 데 안도감이 드는 때가 있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에 지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도망갈 길은 없다. 이 산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살아있는 한 나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하여 정말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되는 날, 나는 삶을 멈출 것이다.

330 룩스가 죽고 난 뒤로 나는 그것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있다 시간은 조용히 정지해 있다. 시간을 볼 수도, 냄새 만을 수도, 들을 수도 없지만 그것은 나를 에워싸고 있다. 시간의 적막과 정지는 끔찍하다. 나는 벌떡 일어나서 집 밖으로 달려 나가 시간으로부터 벗어나보려고 일에 열중한다. 그리면 잠시 시간을 잊는다. 그러다가도 갑자기 시간은 다시 나를 에워싼다. 문 앞에 서서 까마귀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시간은 형체도 없이 조용히 나타나 우리를, 풀발과 까마귀와 나를 포박한다. 나는 시간에 길들여져야 할 것이다. 시간의 무심함과 그 항존성에 말이다. 시간은 거대한 거미줄처럼 무한히 퍼져 있다. 수억 개의 작은 고치가 시간의 거미줄에 매달려 있다. 햇빛 속에 누워 있는 도마뱀, 불타고 있는 집, 죽어가는 군인, 모든 죽은 자와 산 자들이 거기 매달려 있다. 시간은 거대하다. 새 고치들이 들어갈 자리는 얼마든지 있다. 시간은 끔찍한 그물망이며 내 삶의 매 순간이 거기에 포박되어 있다. 시간이 나에게 더욱 끔찍스럽게 느껴지는 짓은 그것이 모든 것을 간직한 채 아무것도 끝내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368 나는 새로운 현실에 적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 마음이 불안해졌지만 내가 불안에서 벗어날 길은 불안의 한가운데를 뚫고 지나가 그것을 넘어서는 방법뿐이다. 해묵은 슬픔을 억지로 삶 속에 끼워놓으려고 할 필요는 없다. 과거의 삶은 나로 하여금 속임수를 쓰도록 했다. 그러나 이제는 누군가를 속일 만한 어떤 이유나 핑계가 없다. 내 주변에는 이제 사람들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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