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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an 19. 2020

불편함을 품위 있게 말하는 법

직장에서 현명한 '을'이 되려면

"너 표정이 왜 그래?"

"표정으로 욕하는 건데요?"

"상사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상사라고 생각해본 적 없는 데요?"


갑질을 근절하려는 범정부적 노력이 있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몰상식한 갑들의 횡포는 눈에 띄게 줄었다. 후배에게 당연하게 담배 심부름을 시키던 상사도, 여직원에게 술을 따르게 하는 상사도, 서류를 집어던지거나 폭언을 하는 상사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그들의 반강제적 자성과 함께 커지는 목소리가 있었으니, 이제는 바야흐로 '을질'이 무서운 시대라고 한다.  


직장에는 꼰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형식을 중시하고 효율성 없는 조직문화를 내세워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는 자를 꼰대라고 한다면, 조금의 불편함도 참지 못하고 상사의 정당한 지시를 갑질로 몰아가는 직원은 뭐라고 말해야 할까. 그들이 하는 기막힌 '을질'은 조직 내 엄연히 존재하는 위계질서와 리더십을 와해시키고 있다. 그 끝에는 방만한 업무처리와 방종, 편가르기와 어설픈 정치질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일부 직원들의 이러한 행태는 업무에 대한 몰이해와 편협한 시각, 그리고 혈기와 자존심에서 온다. 이들에게는 선배가 거시적인 시각에서 호의를 베푸는 일도 그저 짜증스러운 갑질로 여겨질 뿐,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일 수 있는 깜냥은 없다. 그저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모든 일들을 '악'으로 규정한다.


상상하기 어려운가?


규모가 큰 조직에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문서 하나로 상부를 설득하고 외부의 협조를 얻으며 실효성을 판단 받는다. 문서 하나에 여러 지위와 분과가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어느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프로젝트의 목표와 실행 계획, 그 이후에 결과까지 세세하게 문서로 작성해야 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후배가 있었다. 선배가 그에게 계획서를 세밀하게 작성하고 분기 별로 결과 보고서를 작성하라고 지시하자 그는 선배가 형식에 치중해 불필요한 업무를 가중한다고 불평했다. 그리고 자신의 업적을 문서로 남기지 않는 후배를 위해 선배가 후배의 프로젝트 결과를 보고서로 작성하자 그 후배는 자신의 실적을 뺏어간다고 생각하고 선배를 모함하기에 이르렀다. 후배는 자신이 '갑질'을 당했다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한 번은 사무실 내 이야기꾼으로 통하는 젊은 직원이 점심시간에 동료들과 다 같이 밥을 먹으며 인사권자인 상사에게 친한 동료가 좋은 부서로 인사이동하도록 강하게 건의한 적이 있다. 다른 직원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상사는 자신의 인사권이 침해당했다는 생각에 난색을 표했고, 이야기꾼은 그런 상사를 보고 되레 '상사가 승진 욕심에 눈이 멀어서 남의 말은 듣지도 않는다'며 허물을 캐고 다녔다. 그는 자신의 '정의롭고 합리적인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은 상사가 '갑질'을 한 것이라 여겼다.


이런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무엇을 잘못 알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런 면에서는 그들이 꼰대라고 말하는 선배들의 특징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다. 어느 것이 정당한 지시이고 어느 것이 갑질인지에 대한 고찰 없이 그들은 자신의 불편함을 부끄럼 없이 소리로 내지른다. 그들이 아무리 호기로운 동료애로 자신들의 논리를 조직 내 여론으로 바꿀 힘이 있다 해도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들이 하는 말은 투정일 뿐이라는 진실. 안타깝게도 그들이 하는 말은 5살 아이가 사탕 달라고 조르는 투정처럼 시끄럽기는 하지만 그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얻을 수는 없다. 그들이 정말 자신이 겪은 상황이 부당하다고 믿고 이를 시정하여 불편함을 해소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런 방식으로는 영원히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  




을들은 불편한 것을 불편하다고 말도 못 하나. 구조가 불평등해서 을들이 감당해야 할 부조리함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말했다고 을질이라고 폄하하면 누가 목소리를 내나. 그냥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으라는 건가.


이런 억울한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건 말을 하느냐 안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말하느냐의 문제라고.

당당하지만 품위 있게 자신의 불편함을 말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그렇다면 불편함을 품위 있게 말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불편함을 품위 있게 말하려면 먼저 자신이 주장하는 바의 정당성이 확보되어야 한다. 

혼자만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맹장처럼 달고 살아야 한다. 그 불편함이 누운 김에 다리 뻗고 싶은 나의 지극히 인간적인 욕망에서 오는 것이거나, 세상의 다채로운 다양성에 적응하지 못한 나의 편협함 때문이거나, 아직 업무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미숙함 때문일 수도 있다. 그것이 아니라면 불편함의 외부적인 이유와 이를 말해야 하는 명분을 고민해야 한다. 명분은 업무 이해도와 명확한 법적, 절차적 근거에서 나오는 것이다. 상황이 업무적으로 타당한 수준인가에 대해서는 자신의 경험에 더해 주변 선후배에게 조언을 구해 판단하고, 법적이나 절차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인가는 내부 매뉴얼이나 법령집, 전문가의 의견을 참고하는 것이 좋다. 이 고민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 혹은 요구하고자 하는 바가 회사 내 자신의 지위, 계급, 업무를 고려했을 때 합리적인가'가 주된 질문이다.

여러 고민 끝에 정당성이 확보가 된다면 좋겠지만 그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두어야 한다. 그래도 시간 낭비는 아니다. 자신의 시각에 한계가 있다는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인식과 상황을 돌아보는 과정은 사회생활을 하며 앞으로 닥쳐올 수많은 시련에 담담하게 맞설 수 있는 내공을 키워줄 것이다.


타인에게 조언을 구할 시간이 없이 말해야 할 상황에서는 몇 가지의 원칙만 잘 지키면 되돌릴 수 없는 실수는 피할 수 있다.


우선, 음의 피치(높낮이)를 낮추고 천천히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차분하게 말한다는 것이고, 더 나아가면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억양이나 말투를 통해 이미 공격 개시의 메시지를 보낸다면 자신이 말하는 내용이 아무리 정당하다고 해도 상대방은 그 말을 들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거기다가 욕설이라도 내뱉는다면? 의자를 발로 차거나 키보드를 세게 내려치기라도 한다면? 직장에서 내가 하는 말은 지나가는 새도 듣고 쥐도 듣고 호사가들도 듣는다. 그들에게 책잡혀서 괜히 나에게 불리한 상황을 만들 필요는 없다. 직장에서 소문은 가장 자극적이고 단순한 형태로 퍼져나간다. 나의 정당한 요구가 '대들었다'라던가 '싸웠다'라던가 '욕했다' 처럼 저급한 이미지에 덧씌워져 변질되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TV에서는 그것이 멋져 보일지 몰라도 실제 조직생활에서는 오히려 자신이 그로 인한 보복 조치를 받을 수도 있다. 예의를 지키는 것은 상대방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예의 바르게 불편함을 말했다고 하더라도 상대방은 수치심을 느꼈을 수 있다.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에서 오찬호 작가는 대한민국을 '온도 조절 기능을 상실한 사회'라고 말한다. 때로는 뻔뻔하게 타인을 혐오하고 때로는 별 일 아닌 것에도 수치스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꼬집은 것이다. 사람은 생각보다 쉽게 수치심을 느끼고 수치심을 느끼면 반응이 격해진다. 나에게 언성을 높여 따지거나 비꼬는 말투로 심기를 긁고  과거의 실수나 약점을 들춰낼 수도 있다.

이때 중요한 것은 단단한 명분과 단호함을 보여주는 일이다. 이 상황이 두려워 아무 말 않거나, 적당히 얼버무리고 넘어간다면 시작하지 않은 것만 못하다.  유머로 분위기를 유연하게 만들면서도 중심을 잃지 않을 자신 있는 사람은 그렇게 상대방의 경계를 허무는 것도 좋다. 그럴 자신이 없다해도 걱정할 것은 없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나의 의도를 짧고 명확하게 딱 한 번만 더 말해주면 된다.  누구도 악역을 맡기를 원치 않는다. 내가 하고자 하는 방향이 옳은 방향이고 공동체가 공감하는 가치를 지니고 있다면 그 자리에서 나에게 함부로 흠집 내지는 못할 것이다.

주의할 것이 있다면 상대방의 무례를 한 번은 마음으로 용서한다는 마음으로 아까와 같은 차분한 어조를 유지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목소리가 조금 떨리고, 말이 조금 빨라지고, 언성이 조금은 높아져도 괜찮다. 내가 성인군자는 아니니까. 심호흡과 함께 차분히 내가 해야 될 말을 이어가려는 의지가 중요다.


혹시나 상대가 수치심을 이기지 못하고 더 큰 목소리로 말싸움을 걸어온다면 어떡해야 할까? 말싸움에 휘말려서 좋을 것은 없다. 아까 말했듯 조직의 소문은 가장 단순하고 자극적인 형태로 퍼져나간다. 말싸움에 휘말리는 순간, 이것은 '싸웠다'로 정리될 것이다. 그때는 오히려 간단하다. 자리를 피하면 된다. '이런 상태로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겠네요.'라던가 '나중에 다시 말씀 나누시죠.'라는 말을 하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면 된다. 그렇게 해도 쫓아와 화를 참지 못한다면, 정말 조심하자. 말이 통할 사람이 아니다. 대화도 서로 선량한 시민이라는 믿음이 있을 때나 가능한 법이다.  


여기까지 오는 경우는 잘 없겠지만, 여기까지 왔다면 이제는 선택을 해야 한다.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아가거나, 조직 내외의 절차를 밟아 끝까지 불편함을 해소하거나.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 '또라이 질량 보존의 법칙'을 기억하며 인사이동 기회를 노려볼 수도 있다. 우리에게 월급은 소중하니까.

설득에 실패한 당사자로서 마음은 착잡하겠지만 사무실의 평화와 나의 정신건강을 위해서 적당한 화해를 할 수도 있다. 중재자가 편안한 술자리라도 주선한다면 상대방의 입장을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도 있고, 마음은 편치 않아도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면서 업무를 처리하는 스킬을 키울 수도 있다.

어떤 선택을 하든 평화로운 대화를 시도했던 우리의 노력은 헛되지 않을 것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자신의 감정을 믿었고, 그 감정에 명분을 찾았고, 그것을 '표현'한다는 목표는 실현했으니까. 당장 불편함의 '완전한' 해소는 실패했을지 몰라도, 관성으로 흘러가던 조직의 시간이 조금은 합리적으로 방향을 트는데 기여했음에는 틀림없다. 우리가 불편함을 품위 있게 표현하는 위엄을 목격한 이라면  앞으로 부조리한 상황을 야기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귀찮은 일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누군가가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 자체를 불편하다고 여기거나, 다들 밥 먹고 살고 옷 입고 사는데 뭐가 불편한지 모르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자랑이 아니다. 불편함을 모른다는 것은 나 이외의 내가 속해 있는, 내가 끊임없이 영향을 주고 영향을 받고 있는 거시적 세계에 대한 무지이다. 불편함을 모른다는 것은 유기적인 관계망 속에서 삶의 방향성과 타인의 삶을 고민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만 살아가고 있다는 방증이다. 결국 불편함을 모른다는 것은 내가 당연하게 누려왔던 것이 누군가의 불편함을 이용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마땅한 자기반성의 결여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이때 불편함을 모르는 것은 불편함을 알긴 하지만 관용적 태도로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불편함은 존재 그대로 인정되어야 하고 표현되어야 한다.


불편함을 표현하는 것은 풍선에 적당히 바람을 불어넣는 일과 같다. 귀찮다고 말하지 않으면 쪼그라든 풍선처럼 무력해지고, 분풀이 하듯 아무 말이나 쏟아내면 터져버린 풍선처럼 조각나 형체없이 흩어져 버린다. 예쁜 풍선을 만드려면 깊은 들숨과 적당한 날숨으로 조심스레 바람을 불어야 한다. 그렇게 불어 만든 색색깔의 풍선이 가득 떠있는 세상 안에서 비로소 우리는 자존감을 지키고 각자의 쓸모를 찾아 함께 살아갈 수 있다. 

모든 것은 순서가 있고, 처음부터 완벽할 수 없다.

작은 것부터 하나하나 해나가다 보면 세상은 변해 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더 좋은 세상으로 가는 큰 물결의 시작은

언젠가
삼켜져 버릴 수도 있었지만 기어코 내뱉었던

보잘것없이 작은 우리의 날숨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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