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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Dec 21. 2019

직장에서의 미움받을 용기

대한민국의 직장인들이 고달픈 게 틀림없다.


서점에 가면 보기 좋게 진열해놓은 책들의 제목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직장에서 살아남는 법을 보기 좋게 정리한 책, 아예 퇴근 후의 시간만 삶이라고 자신을 속이는 책, 이러나저러나 괜찮다고 위로하는 책들이 사람들에게 '너만 힘든 게 아니야'라고 말해주는 것 같다. 어느 순간 직장인들의 관용어가 되어버린 책 제목들도 많다. 나로 살기로 했다던가.. 개인주의자 선언을 했다거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던가.. 안타깝게도 이런 책들이 인기 있는 이유는 아마 직장인들 대부분이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고, 타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자의든 타의든 정신없이 열심히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들은 우리의 이루지 못한 욕망을 자극한다.


이런 책들 중 하나가 '미움받을 용기'가 아닐까 싶다. 직장인들은 대개 자신이 잘못한 일이 없어도 누군가에게 미움을 받고 살아간다. 민원 응대가 많은 직군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타인에게 미움받는 일은 고통스럽다.  본능적인 고통 외에도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 하는 납득의 문제와 '왜 나일까?'라는 억울한 마음이 스스로를 더 고통스럽게 한다. 이해되지 않는 고통이 던지는 질문을 더 이상 견디기 힘들 때 직장인들은 '미움받을 용기'라는 카드를 꺼내 든다. 모두가 나를 좋아할 수는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에게 무관심하며, 몇 명은 나를 싫어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주문처럼 되뇐다.


주문은 그 자체로 힘을 가진다. '미움받을 용기'라는 주문은 어떤 상황이든 상관없이 그 말 자체로 일축해버린다. 상사의 갑질을 당하는 동료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내라며 위로하고, 업무를 남에게 미루고 자신의 삶을 찾겠다며 '미움받을 용기' 낸다. 따돌림을 당하는 후배에게 '모두가 너를 좋아할 수는 없다'며 조언하고, 때로는 인간에게는 '미움받을 용기'가 필요하기에 나에게 '미워할 권리'가 있는 것처럼 타인을 비난하기도 한다. 전 날 나에게 가스 라이팅을 했던 동료나 상사가 다음 날 나를 불러 내어 '미움받을 용기'를 운운하며 자신의 행동을 나에게 납득시키려 하는 경우도 왕왕 있었던 것을 돌이켜 보면, '미움받을 용기'는 사람들에게 알아두면 여러모로 쓸모 있는 속담쯤으로 여겨졌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말하지만, 모두 틀렸다. 사람들이 하는 그 주문이 기시미 이치로의 책에서 온 말이라면 모두 틀렸다. 언어의 의미를 완전히 전달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둥, 언어는 약속에 불과하니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는 둥, 뭐 그런 문제는 차치하고 모든 상황에서 주문처럼 던져지는 그 말은 공허한 거짓부렁이일 수밖에 없다. 책의 내용은 모두 잊히고 제목만 허공에 둥둥 떠다니는 것 같다.



아들러의 심리학을 청년과 철학자의 대화체로 풀어낸 기시미 이치로와 고가 후미타케의 책 '미움받을 용기'는 타인의 과제를 떠맡지 말고 분리할 용기를 말하는 것이다.


p160 우리는 '이것은 누구의 과제인가?'라는 관점에서 자신의 과제와 타인의 과제를 분리할 필요가 있네.
p161 누구의 과제인지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네. '그 선택이 가져온 결과를 최종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누구인가?'를 생각하게.
p168 자신의 삶에 대해 자네가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이 믿는 최선의 길을 선택하는 것', 그뿐이야. 그 선택에 타인이 어떤 평가를 내리느냐 하는 것은 타인의 과제이고, 자네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일세.


인간이 타인의 과제를 떠맡는 이유는 인정 욕구라는 본능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본능에 맞서 타인과 나의 과제를 분리하는 용기를 내면 그제야 인간은 자유로울 수 있다. 자유는 욕망이나 충동에 이끌려 사는 것이 아니라, 남이 나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리든 마음에 두지 않고 남이 나를 싫어해도 두려워하지 않고 인정받지 못한다는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자신의 뜻대로 사는 것이다. 그 대가로 타인과의 관계가 단절되더라도 받아들여야 한다. 변함으로써 생기는 '불안'을 받아들이고 '지금 여기'에거 해야 할 과제의 분리를 행해야 한다. 아들러는 말한다.  '이대로'에 멈춰 서 있는 것, 즉 과제를 회피하는 사태는 '인생의 거짓말'일뿐이라고.


책에서의 '미움받을 용기'는 내 것이 아닌 것을 떠맡길 때 거절할 용기, 나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바라고 기대할 때 그것을 거부하는 용기, 다시 말해 사회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자립할 용기를 말하는 것이다. 이는 책의 후반부에서 강조하는 '공동체 감각(타인을 친구로 여기는 마음)'과 '공헌 감', 미움받을 용기 2에서 강조하는 '사랑'과 '존경'을 마음의 흙으로 여기고 '나에게 능력이 있다는 의식(가치감, 자존감)'의 씨앗을 곧게 세우라는 말일 것이다. 이 가르침대로라면 우리는 타인의 기준에 나를 맞추어 희생하지 말고 나도 좋고 남도 좋은 일을 찾아 타인을 사랑하되 자신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직장에서 통용되는 '미움받을 용기'는 오히려 타인의 과제를 분리하지 못하게 한다. 상사의 갑질은 타인의 과제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것이나 다름없다.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는 행동, 사적인 심부름을 시키거나 업무적인 내용으로 둔갑시켜 괴롭히는 행동은 자신의 수직적 상위 관계를 인식하고 타인을 조종하고 싶을 때 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이때 '미움받을 용기'를 운운하며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는 것이야 말로 타인의 시선이 두렵고, 관계의 단절이 두려워 과제를 회피하는 것일 뿐이다. 진정하게 미움받을 용기를 실천하는 것이란 타인이 나를 이상하게 볼까 봐 지금 상황을 회피하지 않는 것, 지금 상황 이대로 두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을 괴롭히는 상사의 눈을 보며 자신의 존재를 인식시키고 자신을 더 이상 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용기 있는 행동이라 볼 수 있다.


'미움받을 용기'를 오해하고 그저 참는 것은 가장 고되지만 가장 쉬운 일이다. 이때 직장인이 감당해야 할 미움은 이런 것이다.  성, 계급, 소수적 취향 등 존재적 이유로 멸시받을 수 있다는 것, 한번 멸시받기 시작하면 내가 하는 사소한 행동까지 비난의 도마에 오른다는 것, 그 과정 중에 내가 하지 않았던 말이나 행동 그리고 타인이 꾸며낸 나의 의도가 새로운 내 정체성을 형성한다는 것, 한 번 도마에 오르면 타인은 정의와 공정이라는 포장으로 나를 부당하게 침해할 수 있다는 건, 이러나저러나 세상은 제도권 내에 정해진 언어에 들어맞지 않는 개인의 고통엔 관심이 없다는 것, 아무도 나를 도와줄 수 없다는 것. 내가 당하는 미움에 타인의 집요함과 무기력한 상황이 맞물리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타인과 나의 과제를 분리하는 것만으로는 상황이 변하지 않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에는 마음속에 꿈틀대던 '조커'가 빨간 입술로 기이하게 웃으며 말을 걸게 될지도 모른다. 결국 명예를 잃으면 생존할 수 없다는 '길거리 코드'*를 발동시키는 것만이, 예컨대 최초의 멸시에 대해서는 신박한 돌려 까기 기술이라던가 뒤통수 때리기 등 사적 복수만이 조직에서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염세적인 결론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세상과 타인에 신뢰를 잃어버린 자신이 보일 것이다. 과연 여기에 기시미 이치로가 책에서 말했던 '타인과 나의 과제를 분리' '공동체 감각' '공헌 감' '사랑' '존경'의 가치가 도대체 어디 있다는 말인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에서는 '소마'라는 마법의 약이 나온다. '소마'는 마약같이 기분을 좋게 해 주지만 숙취나 부작용이 없다. 이 책의 세계관에서는 인간이 알파, 베타, 감마 등으로 계급이 나뉘어 제조되는데 그것이 모두를 행복하게 하는 길이라고 한다. 세상이 굴러가려면 다양한 역할이 필요하고 그 역할을 맡은 사람들은 그 역할에 어울리는 지능과 욕망을 가지고 있어야 행복을 느끼며 체제를 유지하는 부품이 되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모든 아이들은 계급과 역할에 맞게 공포심을 자극하고 세뇌하는 교육프로그램을 받는다. 인간의 제조부터 교육까지 모두 가족의 단위가 아닌 국가가 하는 일이기에 가족이란 개념도, 인간들 간의 사랑도 불필요하다. 어느 누구도 누군가를 책임질 필요가 없다. 섹스는 신성하고 출산은 미개하다. 사람들은 삶에 따르는 불편한 감정은 모두 지우고 평생 젊음을 유지하며 자유연애를 즐기며 산다. 그러나 이런 삶에 의문을 품고 누군가를 사랑하는 감정을 가지는 사람이 있다. 그는 부정적인 기분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한다. 무엇이 잘못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언가 잘못됐다는 느낌은 든다. 그럴 때마다 그가 듣는 말은 '얼른 소마를 먹어요.'이다. '미움받을 용기'도 직장인들의 '소마'가 되고 있다. 이 약에 취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사춘기도 아닌데 질문만 많아지는 요즘이다.


* '길거리 코드' :  사회학자 엘리야 앤더슨의 책 '길거리 코드(Code of Street)'에서 말하는 사회적 상호작용을 조절하는 두 가지 코드 중 하나로, 명예(존경심, 주먹)를 선취해 수호하며, 자기 과신과 용기, 기술, 혼자 힘으로 자신을 돌보는 능력을 구축하는 상호작용 경향성이다. 도심부 흑인 남성들이 길거리 코드에 의존성이 높은데 형사 사법제도가 그들의 이익을 지켜주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에 상당 부분 그 원인이 있다. 따라서 이들은 '존경심'을 키는 것이 희생자가 되지 않게 해주는 안전장치 역할을 한다는 선입견을 갖게 되었다. 무시에 대해 보복하는 준비성과 기꺼이 보복하려는 마음이 길거리 코드의 핵심이다. 자신이 약한 상대가 아니라는 메시지는 강하고 분명하게 전달되어야 한다. 길거리 코드의 반대는 개념으로 느긋하고 다정하며 관대한 사회적 상호작용인 '체면 코드'가 있다.   
(출처: 복수의 심리학 p94-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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