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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May 11. 2020

아픔도 시작이 될 수 있다면

불안에 도둑맞은 삶

사람을 불안하게 하는 이유야 여럿이겠지만, 불안할 때 하는 선택은 대개 비슷하지 않을까.


 불안한 개인은 남들과 비슷한 목표를 정하고 비슷한 노력을 하다가 비슷한 좌절을 한다. 너도 나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절대 나눠 갖지 못할 고통을 짊어진다. 오로지 나만의 세계가 저릿한 몸살을 앓고 있는 듯, 두꺼운 외벽을 두고 상대 없는 싸움에 패자가 되어 지독한 외로움에 취한다. 혼자인 시간은 오로지 나만의 것이자 절대로 내 것이 아니다.  것만 같았던 시간은 쉽게 허물어지고 서글퍼져 내 마음처럼만 되지는 않기 때문이다. 파닥거리는 세상의 기막힌 냄새가 벽을 타고 넘어와 외로운 취기를 깨우면 뱃속에서 꿈같은 역동이 움트고 토하듯 급한 마음으로 또 다른 계획을 세우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그 계획도 비슷한 좌절과 고독한 아픔으로 나아가고, 그것. 또한. 불안이었음을. 깨닫는다.

불안은 어두운 방 속에서만 허연 이를 드러내고 웃는 유령 같기만 하다. 렇게 유령 같은 놈에게 속아 매번 비슷한 선택을 하다 보면 불현듯 내 삶을 도둑맞은 기분이 든다. 아니 기분이 아니다. 확실히 손에서 꼭 쥐고 있었던 것을 잃어버려 공허하고 화가 난다. 내 삶은 도둑맞았다.


중학생 시절, 우리 반 아이들은 이해할 수 없는 저 자신의 모습에 당황했고 수업시간에 흘려들은 '질풍노도의 시기'를 잠언처럼 받아들였다. 질풍노도는 짓궂은 장난을 감싸는 농담이 되었고, 밉지만 미워할 수 없는 자신의 명이 되었다. 조금 더 어른이 되어 제법 마음을 숨길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또다시 어느 수업시간에 흘려 들었던 말을 되뇌며 '삶이 유예되었다'라고 한숨을 푹푹 쉬었다. 무엇이 삶인지 왜 유예되었는지도 알지 못한 채 그저 여드름만큼 농익은 감성에, 어쩌면 더 정확한 직관에 그 말을 내뱉었다.

삶은 언제까지 유예되어야 하나.


어쩌면 삶을 유예하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특별한 능력일지도 모른다. 요즘에 나는 내가 불능(不能)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든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능력, 그리고 미워하는 능력,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또 하고 싶은지 아는 능력,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나의 취향이 무엇인지 잊지 않는 능력, '지금' 삶을 살아가는 능력. 내가 이토록 무능한 탓에 타인이 거대하게만 느껴지는 것일까.


내 밥벌이는 해야 한다는 당연지사가 가장 두려운 일이 되어 버린 지금, 가장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은 콩알만해 지고 정신없이 몰아치는 불안에 선뜻 백기를 들어 항복 선언을 한다. 뭐가 됐든 보이는 대로 열심히 해본다. 경제적 자유든, 선한 영향력이든, 불안한 개인을 몰고 다니는 가치는 브랜드가 된 지 오래다. 거대한 타인이 만들어 놓은 주문을 외며 그들이 갔던 길에 순례를 돌다가  이물감을 느끼고 멈칫 서버리는 날에는 그동안의 노력이 전략적 전력질주였는지 그저 나를 소진하게 하는 또 다른 비슷한 선택이었는지 헛갈렸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 마음속에 일어난 뿌연 분진이 사뿐히 내려앉으면 나의 불능이 우뚝 서서 거만하게 나를 내려다보니 걸핏하면 도둑맞은 삶을 한탄하며 움츠러들었다.  


이물감인 즉, 이런 것이다. 몸이 아프다. 글을 잃는다.(읽지도 쓰지도 못한다) 관계가 단절된다. 뭔가를 자꾸 사고 싶다. 먹고 마시고 움직이는 일에 둔해진다. 세상 모든 것이 미워진다.


사실 이런 이물감이 지금에서야 마주한 새로운 것은 아니다. 친구보다는 공부가 더 중요하다고, 사랑은 원하는 대학교 가서나 하는 것이라고, 쇼핑은 안정적인 직장을 갖고 나서 하는 것이며, 여행은 지금 맡은 업무를 다 하고 나서, 그리고 집을 꾸미는 일은 결혼을 하고 나서, 휴식은 승진하고 나서, 이렇게 끊임없이 미루다 보면 나의 일상에서 삶은 이물감이 되는 것이다. 그 이물감이 절뚝거리는 삶 자체였다. 우정은 내가 필요할 때만 누리는 것이 아니고, 사랑은 내가 원할 때 찾아오지 않으며, 삶에 과제는 끝이 없는 것이라 그 과제에만 몰두하면 내가 무시했던 삶의 취향은 고름처럼 일상에 눌어붙는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난 늘 불안해하고 세상에 가장 바람직한 모습으로 나를 제련하는 선택을 했다.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 난 늘 내 안에서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했고 결론적으로 비슷한 선택을 했으며 이제껏 해왔던 노력을 했다.


'세상과 단절하고 고통을 감내하고 극기한다. 동기부여 영상을 보고 성취한 이들의 글을 성경처럼 받든다. 울면서 버티고, 죽기 전까지 버티고, 그렇게 해도 죽지 않는다고 확언한다.'


 잘 버티는 사람은 또 버티고 버티고 버틴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는 이루고, 이루고 나서도 또 버티고, 어떤 사람들은 버티기를 그만 두고 자신만의 길을 찾아 나선다.

버티는 삶은 보상받아야 한다. 고통에는 달콤한 열매가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신념에 의미 없는 고통을 반복하기도 다. 예컨대 멍하니 학습지 내용을 빽빽하게 적어 내려 가는 깜지로 숙제를 하는 아이처럼. 아이와 부모는 고통받는 지금의 희생더 나은 미래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 기대하지만 실은 삶이 주는 선물과 고통의 양은 별 관계가 없다. 고통도 방향과 목적이 있어야 그나마 의미 있는 법이다.  삶은 이토록 단순하지 않다.


버티다 보면 분명 얻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어딘가는 일그러지고 어딘가는 뾰족해진다. 나와 같은 노력을 하지 못한 이는 하찮아진다. 나와 다른 삶을 사는 이는 괜스레 미워진다. 타인의 고통에는 무감각해지며 그 존재를 까마득히 잊는다. 그들은 늘 세상에 있어왔지만 그들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나면 깻망아지라도 본 듯 불쾌해한다. 혐오는 그들의 존재를 잊어버리는 데서 시작한다. 보고 싶지 않은 것을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세상을 미워하는 감정이다. 세상을 미워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자신이 왜 괴로운 줄 모르고 괴로워 하는 것은 얼마나 흔한 일인가. 삶을 도둑맞는 일이 비단 나만의 일일까.


불능의 문제는 지금도 쓸모 있는 일과 쓸모없는 일을 나누어 선별적으로 열심히 살아가는 우리 아버지와 가게 문을 닫는 것은 죄악이라 여기는 어머니 때부터 있어왔다. 해야 할 일에 짓눌려 애써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삶은 자식들에게 위대한 유산을 남겼지만 '유예하는 삶'이라는 한계도 남겼다. 내가 빈약한 문화의 틀 안에서 비슷한 선택과 비슷한 생각을 반복하듯 우리 부모님도 그렇게 살아왔고 그 안에서 희로애락을 자랑스레 지켜 왔다. 머리가 희끗하고 허리와 관절을 아껴 걸어야 하는 지금도 타인을 미워하지도 못하고 사랑하지도 못하며 몇몇 종들은 극렬히 혐오하고 때론 자식들을 위해 비굴한 선택도 마지않는 희생을 귀하게 여기신다. 그렇다 해도 자식들을 무사히 키워냈고 첩첩산중 같기만 했던 어려움들도 무사히 지나왔다. 그것 또한 고결한 삶이다. 떳떳하고 성실하게만 살았던 부모님의 삶은 보상받아야 한다. 그 보상이 성에 차지 않아 괜스레 큰 소리로 자식 자랑을 둘러대는 한이 있어도 부모님의 선택은 그들의 최선이었다. 이제 그들이 최선을 다해 일구어 낸 문화자본은 나에게로 왔고 내 세포 하나하나에 그들의 태도와 삶의 지도가 새겨져 있다. 그 지도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투정 부릴 수는 없다. 부모님을 미워하기엔 그들의 고뇌를 너무 많이 알아 버렸고 한계를 탓하고 세상을 미워하기엔 나는 더 이상 어리지도 무력하지도 않다.


이제 모든 선택은 온전히 나의 책임으로 남았다.

이만 도둑맞은 내 삶을 찾고 싶다.

어차피 그 전으로는 돌아갈 수 없다면, 이제는 달라지고 싶다.

살다 보면 그 전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그런 일이 있다. 불안한 개인들의 날카로운 시선에서 허물어져 내린 그런 일이었다.  나를 흔들고 나를 던져 놓으며 중요했던 것들이 하찮아지고 적나라하게 벌거벗겨진 불가해한 경험이 세상의 언어로 해명되기를 애타게 바라지만 그 어떤 말로도 부스러기가 되어 떨어지는 나의 존재를 부여잡을 수 없었다.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자연스레 느낄 수 있었다. 이제 다시는 그 전의 나로는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나는 이전과 같지 않다. 또한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고는 예전과 달라질 수 없다. 거대한 타인에 굴복하던 예전의 습기(習氣)를 벗어 던지려면 자갈이 모래가 될 만큼 부단히 부딪쳐야 할 지도 모르겠다.


고통과 희생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노력하되 극기하지 않으며 충분히 쉬고 좋은 음식 먹고 나의 게으름은 슬쩍 눈감아주고 싶다. 불안감에 나를 보살피기를 잊지 않도록 매일 나의 취향과 취미가 무엇인지 되새김질해주고 감격해서 도무지 진도가 나가지 않는 문장을 읽고 가끔이라도 글을 쓸 수 있다면 좋겠다. 아픔도 시작이 될 수 있다면, 불안에 쉽게 지지 않을 단단한 결정이 되었으면 좋겠다. 진드기처럼 몸을 웅크리고 있는 지금 이 순간도 희망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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