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반장 May 12. 2020

이름 없는 하루

1년 내도록 갔던 곳만 가는 이유

신이 계시를 내린다면 이런 것일까.

처음 보는 순간 딱 나를 위한 것이라는 기분 좋은 충격.

그 순간 시간을 쪼개 계획을 세웠다.

무언가를 열심히 할 때 레퍼토리는 늘 비슷하다. 체력은 계획을 따라가지 못했고 계획은 욕심을 따라가지 못했다. 계획을 이루려면 단절하고 유예하고 극기해야 한다는 타인의 말에 주눅 들고 스스로를 탓하는 마음도 발목에 엮인 빈 깡통처럼 덜거덕 거리며 쫓아왔다. 아침에 눈을 뜨면 단 하나의 일상이 나를 기다렸다. 그것이 숨 막히고 답답해도 그 시간만 지나면 나아지려니 익숙한 위로를 건넸다.

밥을 짓고 세수를 하는 일이 느려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귀찮아졌다. 읽던 책을 던져 놓고 오래도록 표지만 구경했다. 아무도 만나지 않았고, 모든 사유는 정지되었고, 매일 같은 것을 붙들고 싸웠다. 내 손이 내 머리가 내 눈이 너무나도 느려서 잠드는 시간은 늦어졌고 계획은 반토막 내어 수정하길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날 몸살에 앓아누웠다. 몸살이 나자 기다렸다는 듯 편도염이 도졌고 장염에 걸렸다. 후덥지근한 날씨에도 온열매트에 열을 올리고 누워있었다. 시간은 금붕어 입처럼 뻐끔대며 후딱 흘렀다.

화가 났다.

내가 이토록 아픈 것은 내 잘못이 아니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이 나를 두들겨 팼기 때문이었다.


"왜 자꾸 비슷한 선택을 하죠?"


물론 그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었다. 깊은 밤과 이른 새벽의 사이 홀로 앉아 밤의 침묵을 듣고 있노라면 불쑥 '된다 한들, 내 인생이 더 나아질까'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듣고 싶지 않았다. '무슨 소리! 의심은 이루는 시기만 늦출 뿐이야!' 라며 내 안의 교주를 불러 세워 성수를 뿌리듯 자책했다. 그러나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예전 그 어느 날과는 달리 이제는, 내가 어떤 마음으로 사무실을 갈지, 어떤 기분으로 일을 하고 얼마나 무거워진 몸으로 집으로 돌아올지, 집에 와서는 어떤 핑계로 지쳐 쓰러져 보던 것만 보고 생각하던 것만 생각할지 너무 잘 안다.

삶이란 그저 짧은 변화와 긴 적응과 그보다 더 긴 지루한 일상을 견디는 것일지도 모른다. 매일 똑같은 하루에서 다른 것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실은 매 순간이 새로 피어났던 찰나의 생동감을 느끼지 못한다면 내가 언제 어디에서 어떤 삶을 살든 난 똑같은 하루를 살아갈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건 지금껏 해왔던 것과 비슷한 선택이 아니라 정 반대의 선택이다. 그럼에도 밥벌이에 대한 강박과 불안은 날 비슷한 선택으로 이끌었다.

의사 선생님의 말에 온 몸을 두드려 맞았고,

길을 잃었다.


숙제를 받았다.


"자신을 돌보아 주세요. 지금 강아지 돌보듯, 때 되면 밥 주고 충분히 재우고 산책도 시켜주세요."


아래의 글은 이에 대한 반성이자, 좌절이고, 희망이었다ㅡ

일단 병원부터 가고, 좋아하던 뷔페를 갔고 오랜만에 친구도 만났다. 책을 읽으려 했지만 가슴이 두근거려 글이 읽히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무엇이 문제인지 심각하게 고민되지만 고민이 문제를 해결해 준 적은 없다. 그냥 덮었다. 피곤했다. 몸도 마음도 흐물흐물해져 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옆으로 돌아보니 크림이 가 있었다. 언젠가부터 크림이는 나만 졸졸 쫓아다닌다. 화장실만 다녀와도 반갑다고 앞발을 들고 폴짝폴짝 뛴다. 쇼파에 앉으면 안아달라고 폴짝폴짝 뛴다. '밥' '간식' '우유' '놀러 갈까'란 말은 기똥차게 알아듣고 동그란 눈에 빛을 내며 뱅그르르 돈다. 크림이는 가장 순수한 열정으로 나를 사랑하게 되었다.


도대체 내가 크림이를 어떻게 돌보았더라....


ㅡ크림이는 1년 반 전부터 나와 함께한 강아지다ㅡ

아침에 눈을 뜨면 크림이가 나를 보고 있다. 해가 말간 얼굴을 내밀기 전 여명이 밝아올 때부터 크림이는 나를 기다린다. 엎드렸다, 앉았다, 발라당 누웠다를 반복하며 나를, 아니 밥을 기다린다.

아침에 눈 뜨면 보이는 크림이

이틀에 한 번은 팜카페에 데려간다. 크림이는 크림이가 가 본 모든 곳을 통틀어 팜카페를 가장 좋아한다. 집 주변을 산책할 때 보다 더 많이 뛰고 뒷발차기도 더 많이 하고 더 많이 웃는다. 팜카페를 가려면 차를 타고 20분 정도 가야 한다. 다행히도 크림이는 드라이브를 아주 좋아하는 강아지인데 새끼 때부터 산책보다는 드라이브를 즐겨 했기 때문이란다. 규정속도로 정속주행할 때면 헥헥대고 잘도 웃는다.

크림이는 팜카페가 보이기도 전에 벌떡 일어서서 두리번거리며 끙끙거린다. 얌전한 크림이에게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다.

부산 기장 팜카페

오래된 주택을 개조한 것 같다. 소파도 있고 다락방도 있지만 크림이가 좋아하는 곳은 단연 건물 뒤편으로 마루를 만들어 슬라이딩 도어를 설치한 테라스 공간이다. 건물과 연결되어 있지만 삼 면이 모두 유리 슬라이딩 도어라 따뜻한 봄이나 시원한 가을이면 삼 면을 모두 열고 새소리와 느린 기차 소리를 만끽할 수 있다. 강아지들은 열린 문으로 자유롭게 안팎을 뛰논다.

크림이는 나무 냄새 풀 냄새 꽃 냄새에 이어 친구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냄새를 맡는다.

봄에는 각종 꽃나무가 흐드러진다. 테라스에 앉아 차를 마시며 꽃구경도 하고 신나게 노는 강아지들을 보고 있으면 시간이 너울대며 평화롭게 흐른다.

가끔은 가지가 너른 나무 아래 앉아 크림이를 본다.

팜카페의 여름은 녹색빛이다.

가을에는 누렇게 뜬 나무들 사이로 두꺼운 가을볕이 든다.

겨울에는 문을 닫고 화목난로에 고구마를 굽는다.

어쩌다보니 사계절 내도록 팜카페를 다니고 다시 봄을 맞았다.


이틀에 한 번, 일주일에 한 번, 하루 종일 있었던 적도 있고 하루에 두 번 갔던 적도 있다. 한 동안은 어쩔 수 없이 팜카페와 거리를 두었지만 길거리에 사람이 늘고 벚꽃이 왔다 가며 철쭉이 기지개를 켰을 때쯤부터 슬금슬금 팜 카페로 갔다.


팜카페에 가면 크림이와 테라스로 가서 정원을 따라 난 길을 걸어 놀이터로 간다. 크림이에게는 이 조그마한 공터가 안성맞춤이다. 넓은 운동장에서는 광활한 벌판은 뒤로한 채 울타리를 따라 코를 박고 다니더니 여기서는 산을 처음 만난 노루 같이 뛰어다닌다.

놀이터에 세운 가건물 안에도 아기자기한 테이블이 있다. 크림이는 꼭 여기 들어와서 놀고 싶어 싶어 하지만 나는 크림이가 여기 들어올 때마다 번쩍 들어다 밖으로 내다 보낸다. 자갈은 소중하기 때문이다.

정원 구석구석 크림이가 오줌을 갈기며 영역표시를 하다 보면 나도 어쩔 수 없이 멈추어 서야 한다. 같은 곳을 돌고 돌아 멈추어 서면 봤던 것도 더 자세히 보게 된다. 꽃은 어쩜 이리 다양하게 심었을까, 갈라진 나무 틈에 다육식물을 키울 생각은 어떻게 했을까, 이 화분들은 언제 갖다 놓은 걸까, 왜 보랏빛 백일향에는 꿀벌이 많을까, 줄기가 두껍고 머리가 큰 이 새빨간 꽃은 무엇일까.. 1분 1초가 풍성하게 피어난다.

크림이랑 팜카페를 두루 돌고 나면 테라스에 앉아 간식을 먹는다. 팜카페는 송아지 목뼈나 닭발, 오리를 말린 간식이나 두부 당근 파프리카 단호박 등을 섞은 케잌과 쿠키 등등 다양한 수제 간식을 판다. 크림이는 시원하게 뒷발차기 하며 산책을 하고 나서 간식 먹는 그 시간이 가장 행복할 것이다.

크림이가 그 간식으로 만족할 수 있다면 좋으련만, 식탐 많은 강아지 크림이는 그럴 수 없다. 맛있는 간식을 게걸스레 먹어 치우고도 다른 손님이 앉은 테이블을 돌며 간식을 구걸한다. 


이런 눈빛으로.

ㄱr 끔은 눈물도 흘린다..

다른 손님에게 미안해서 크림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면 크림이는 해맑게 다시 들어간다.

다시 데리고 나가면 이번엔 나를 피해 도망치듯 뛰어서 들어간다.

크림이의 눈빛에 속아 간식을 건넸던 어느 손님은 말했다. 뛰어 오는 크림이의 표정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고.

"아직 남았죠???"


나는 크림이가 배부른 것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크림이가 사랑스러워서 참 다행이다. 얌전히 앉아서 눈빛만 쏘아 간식을 얻어먹는 스킬을 터득해서 참 다행이다.

팜카페에서 한 시간 정도면 크림이는 충분히 행복하다. 박수 두 번에 달려와 슬쩍 엉덩이를 내민다. 이제는 안아도 좋다는 뜻이다. 더 놀고 싶을 때는 박수 소리에 달려와서 딱 안지 못할 거리만큼만 왔다가 다시 달려 나간다.

달려오는 크림이


가끔은 집에 가기 아쉬운지 박수 소리를 못 들은 척 우두커니 보고 있다. 우리 크림이는 자주적인 강아지라 곰곰이 생각해고 결정할 때까지 기다려 준다. 그래도 결국 한 시간이면 충분하다.

집에 가기 아쉬운 크림이

때론 나를 위해서 더 머무른다.

팜카페는 음식이 기똥차게 맛있다. 매일 빵을 직접 굽고 신선한 야채로 샐러드와 샌드위치를 만든다. 여름에는 블루베리를 따서 손님들에게 조금 내어 준다. 달콤한 케이크를 만들어 나눠주기도 하고 샌드위치를 시키면 메뉴에는 없는 감자나 브로콜리를 더 구워 주기도 한다. 팜카페에서 내가 먹어치운 샌드위치로 줄을 세우면 우리 집에 닿을지도 모르겠다.

팜카페의 몽블랑도 맛있다

팜카페의 저녁은 한적하다.

저녁 시간까지 팜카페에 있는 건 아주 가끔 있는 일이다. 인적 드문 마을의 저녁 시간은 왠지 조금 서글프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분명 퇴근 중일 사람들이 재촉하는 차들의 뒷모습은 더더욱 서글프다.

영화나 소설에서 주인공이 매주 일요일 아침 식사를 하는 식당이나 매일 저녁 들르는 카페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나에게 식당은 만족스러운 메뉴를 찾아 한 끼를 때우는 곳이었고 카페는 누군가를 만나거나 기다리는 곳이었다. 목적 없이 들르지는 않았다. 어쩌다 자주 가는 곳이 생겨도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척했다. 들려도 듣지 않았고 보여도 외면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테이블 속 결계 속에서 철저히 나만의 목적에 충실했다.


배고픔이나 약속 없이 팜카페를 다니면서 공간에 대해서 다시 생각했다. '좋아한다' '즐겁다' '편안하다' '기대된다'는 감정은 팜카페를 찾는 이유였고, 쓸모 있는 목적은 달리 없었다. 자주 다니다 보니 인사하게 되었다. 지금의 행복을 즐기는 강아지들은 인간이 쳐 놓은 결계를 뚫고 성큼 들어왔다. 순수하게 공간을 헤집고 다니는 강아지 때문에 자연스레 말을 걸게 되고 불쾌한 것을 보아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각자의 테이블에 앉아서도 보이면 보인다 말하고 들리면 반응해도 괜찮았다. 타인과의 느슨한 긴장은 안락함보다는 더 편안하고 고독보다는 더 안전한 감정불러냈다.


인간이라면 누구라도 필요한 자기만의 방은 고립이 아니라 '사랑하는 공간'이 아닐까.

사랑하는 공간은 매일이 다채롭게 물드는 곳이다.

안에서 내가 불안에 도둑맞았던 삶이 어렸을 적 갖고 놀던 탱탱볼처럼 끊임없이 튀어 다닌다.


크림이를 돌보다 보니 알겠다.

자신을 돌보려면 사랑하는 공간 하나쯤은 가져야 한다.


# 나를 돌보기 1 : 일주일에 적어도 한 번은 내가 사랑하는 공간에 가야 한다. 세 번이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다.

집으로 돌아와 발을 씻기고 크림이가 가장 좋아하는 껌을 하나 준다. 매일 주는 것인데도 참 맛있게 먹는다. 크림이는 눈을 감고 좋아하는 간식을 음미한다. 마치 황홀경에 빠진 듯 스르르 눈을 감고 행복을 음미한다.


# 나를 돌보기 2 : 하루 한 번은 좋아하는 간식을 음미해야 한다.

크림이는 잘 쉰다.

크림이가 가장 좋아하는 마약 방석에 앉으면 곧바로 스르르 눈을 감는다.

책 읽는 내 옆에서 자유분방한 자세로 잠을 청하기도 한다. 코도 골고 잠꼬대도 한다. 얼마나 재밌는 꿈을 꾸는지 네 다리를 허우적거리며 허공에서 달린다. 꿈꾸며 짖는 소리는 멍멍이 아니라 '위위 위위'이다. 목소리가 코로 넘어와 소리는 내는데 자는 중이라 입 근육이 움직이질 못해 딸꾹질하듯 그렇게 짖는다.


# 나를 돌보기 3 : 피곤하면 쉰다.

이 외에도 나를 돌보려면 적어도 이틀에 한 번은 크림이와 산책을 나가야 하고, (부디 매일이어야 하겠지만)

쫓기지 않고 한 줄 한 줄 천천히 책을 읽을 줄도 알아야 한다.

(독서 계획 안녕. 회독 안녕. 필사는 가끔 만나자.)

산책하다가 책을 읽었다. 딱 한 번, 그리고 딱 두 페이지. 강바람 맞으며 책을 읽으니 저절로 시詩가 나왔다.             김민철 <모든 요일의 기록>

나를 돌보는 것과 밥벌이가 공존할 수 있을까.


10년 넘도록 다양하게 돈을 벌어 오면서, 한 번도 넉넉한 적 없이 딱 밥벌이 정도로만 해오면서 나는 나를 돌본 적이 있었을까. 돈을 벌지 않는 시간은 잉여의 공백이었고 그 순간을 어떻게든 채우지 못해 불안해하기만 했다. 영상에 취하든 술에 취하든 관계에 취하든 취하지 않고 깨어 있기는 힘들었다. 불안이 주는 역동과 소진된 열정과 피곤한 자괴감의 연속이었고 그 끝에는 무의미함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이제 다시 계획을 수정해야 한다.

계획은 삶과 조화로워야 하고

내가 가려는 곳은 삶이 잊히지 않는 곳이어야 하며

삶과 유리된 과정이 필요하더라도 그 시간은 길지 않아야 하고 삶을 향해 열려있는 길이어야 한다. 의미 없는 고통은 자신을 파괴할 권리를 부르짖을 이유가 될 뿐, 해명되지 않는 고통을 견뎌서는 안 된다.

명함과 아파트 브랜드, 길기만 한 자동차 이름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삶이 더 나아지지는 않는다.

이름 없는 하루를 소중히 하지 않고는 달려가도 머물러 있음을 면치 못한다.


나의 이름 없는 하루가 더욱 빛나길.

삶과 공존하는 밥벌이를 지켜 내길.

아무리 덜어내도 다함이 없는 순수한 열정으로 세상에 공헌하는 밥벌이를 이뤄내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