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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김반장
May 19. 2020
비 오는 날, 일요일 밤과 월요일 새벽
사람들이 내 글을 읽는 시간
1. 빚의 노래
곧 이사를 갈 것이다.
더 좁고
더 오래되고
꽤 낡은 집으로.
철제 조리대라던가
벗겨지고 흐물흐물한 벽지
절대 지울 수 없는 세월의 흔적들 모두
나름대로의 의미로 이름 붙여 줄만 하지만
옛 아파트는
가진 것이
없다는
걸
숨길 수가 없어 슬프다.
요즘에는 드레스룸과 화장대, 신발장, 중문, 식기세척기와 오븐,
인덕션(가스레인지라도)
,
김치냉장고, 에어컨까지 갖추고 있는 아파트가 많다.
새 아파트에서 몇몇 가구는 집만 비좁아보이게 만드는 천덕꾸러기다.
시집갈 때 챙겨간
자개 농이 재산이라는 것도 다 옛말이고 '미니멀리즘'이라는 멋들어진 명명으로 소박함도 취향이 된 시대다.
그래서
우리도
최소한의 가구로 4년을 살았다.
그러나 그동안 전전하던
아파트보다도
, 내 나이보다도 더 오래된 아파트로 오게
되니
취향을 알 수 없는 저렴한 가구들로는 좀처럼 안색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는 가난하지 않다.
내 직업이 불안정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열심히 노동하고 값싼 대체품으로 만족하며 쌈짓돈을 모았고,
우리 부모님은 그보다 더 부지런하고 인색하게 살지언정 자식들에게는 부족함 없이 나누어 주었다.
마음은 쫓기듯 가난할 때도 많았지만
가진 것이 없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어쩐지 가난한 기분이 든다.
언제부터 세상이 이렇게 비싸졌을까.
빚이라는
기막힌 창조물 덕분에
다가올 시간을 내주고 차를 사고 집을 사는 세상에서
1~2억은 우습다.
무릇 훌륭한 어른이란 내 시간으로 얼마나 많은 빚을 짊어질 수 있는가로 결정되는지도 모른다.
나는 아직 어른이 아닌가 보다.
2. 나를 알아 간다는 허상
파도 파도 계속 나온다.
나는 나에게 관심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자주 나를 하찮게 여기고 있었고
가끔은 워낙 뻔뻔하여 부끄러움을 모르는 줄 알았더니
모자란 나를 부끄러워하기를 밥 먹듯 하고 있었고
남을 돕는 걸 좋아하는 줄 알았더니
무결하지 못한 나를 들킬까 두려워 동생의 슈퍼맨 팬티를 뺏어 입은 아이처럼 무력했을 뿐이었고
남을 미워할 줄 모르는 심약함은
쉽사리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이었고
내가 거만한 것이 문제인 줄 알았더니
나는 지금도 남이 쓴 글이 배 아플까 봐 함부로 읽지도 못하는 열등감 덩어리.
지금 쓰는 이 글도 길을 잃은 발자국일 뿐이겠지.
괜찮다는 말이 가장 오만한 말인 것 같다.
가보지 않은 산을 오를 때
이제쯤 다 왔겠거니 하면 다시 오르막이 시작되듯 내 인생도 그렇다.
나를 마주하는 시간은
작정하고 숨어서 기억을 되새김질하고 마음 깊이 삽질한들 충분치 않고
스마트
폰으로 성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정보에 쫓기는
짧은 휴가로는 어림도 없다.
1주일 여행으로 내 그림자를 구경하고
전에는 미처 알지 못했던 답을 찾아 돌아오면
인생의
새로운 질문과 일상의 낯선 퀘스트가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모두가 잘 될 거라고 말하고 있지만
실은 쇠락하는 것이 시간의 가장 확실한 기능이다.
성실한 어른들이
적당한 거짓말로 이러한 진실을 덮어주지 않는 다면 세상이 어찌 될지 모르겠다.
3. 마음 챙김도 숙제하듯
숙제를 받았다.
바디 스캐닝과
가슴 위에 두 손을 나비모양으로 교차해서 올린 후 부드럽게 다독이며 행복했던 기억 떠올리기
내 행복했던 순간의 물건이 부착된 열쇠고리와
애착 인형.
4. 바람직한 습관
나를 믿지 못해 기록하는 습관이 있다.
메모지에 기록하고 그 메모지를 잃어버리는 습관도 있다.
메모지를 잃어버리고 나면 결국 애초에 기억하려 했던 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생각만큼 애타지는 않는다.
결국 기록은
내 암기력을 보완해주는 수단이자
그 순간의 불안함을 잠재워주는 분주함이자
결국
은 기억나는 것만 지속되는 제자리걸음이다.
오늘도 나는
어제의 기록을 잊었다.
매일
살던 대로 살게 된다.
*오늘은 아침 산책을 나가지 않았다.
내일은 꼭 아침 산책을 나가리라 기록했다.
5. 그다지 잘 산 것도 아닌데
나는 매사에 쉽게 기대하고 결과에 연연해하며 포기도 빨랐다.
미리부터 안될 거라 점치고
'거봐 안 될 거랬잖아'라고 말하면
그보다 더 정확한 예언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은
돈 주고 운수를 점치는데
포기하면 돈도 안 들고 모든 게 쉽다.
심플하게 사는 거
어렵지 않다.
되는 건 하고
안 되는 건 안 하고
분수껏 살면 된다.
안 되는 걸 되게 만들다 보니 고달프다.
안 되는 걸 바라다보니 애가 탄다.
안 되는 걸 애써서 되게 만들었던 사람들은
단 한 번의 강렬한 기억으로
세상에 의지로 되지 않을 일이 없다 말하지만
스스로 가지지 못한 마땅한 의지에 대해서는 결코 말이 없다.
인간의
모자람을 이해하려는 의지나
계획하지 않은 시간을 누리려는 의지나
가족에게 시간을 아끼지 않으려는 의지나
누추한 자신을 용서하려는 의지 같은 것들.
성공과 안락함에 중독되면 약도 없다
.
옳은 것에 중독되면 답도 없다.
싯다르타
를 유혹하는 마라(악마)가 끝내는 부처의 모습으로 왔듯
뭐든지 잘 되고 있을 때
그 안에 뭐가 생성되는지를 경계해야 한다.
포기하지 않는 법을 익혔고
가끔은 해냈으며
잠깐의 열락을 잊지 못해
내 분수를 잊다 보니
고통에 끝이 없나 보다.
대충 살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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