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이렇게 평화롭고 일상적인 하루를 쪼개는 불한당 같은 책이 있다. 달과 6펜스, 그리스인 조르바와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그런 책이다. 이 책들은 흡인력 있는 묘사와 전개로 사람을 유혹해 놓고도, 보고 싶지만 봐서는 안 될 것을 봤다는 야릇함과 죄의식을 들게 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당연하게 믿고 행해왔던 규율의 전도를 자연스럽게 그려 활자는 덤덤하기만 한데 이 책을 읽는 독자는 격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책 속에는 매력 있지만 절대 넘어가서는 안 될, 상상 속에 유폐되어야만 내가 사는 이 세상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세계가 있다. 이 책을 읽고 난 사람은 결정해야 한다. 마치 찰스 스트릭랜드의 매력에 빠져버린 블랑시처럼, 이 소설을 미워하거나 사랑하거나 둘 중에 하나는 선택해야 한다는 조급함이 우뚝 서서 비켜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소설을 시작하며 화자가 ‘찰스 스트릭랜드의 위대성은 진짜다.’라고 했을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내 안에 매끈하게 주조된 관념들이 있었다. 글을 읽어 나갈수록 그 관념들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그 잘난 ‘위대성’에 나는 당황했다. 그는 나이 40에 그림을 그리겠다며 가족을 버리고 파리로 떠났고, 친구의 부인을 유혹해 가정을 박살낸 뒤 죽게 만들었고(소극적인 방식이긴 했지만), 타히티에 가서는 여자를 등쳐먹는 것도 모자라 결혼할 여자를 두들겨 줄지도 모른다는 망언을 한다. 그나마 그런 괴짜 습성을 드러내기 전에는 재미없다는 평판이 자자한 증권 중개인일 뿐이었다. 그의 부인이 남편이 있는 자리에 화자를 초대하면서 지루하고 답답할 것이라는 친절한 경고를 날릴 정도이니, 지금으로 치면 고객의 불만을 미리 입막음하려는 세련된 심리전을 한 셈이다. 화자는 증권 중개인이었던 그를 ‘완전히 사회조직 속에 녹아들어 살아가고 있는 흐린 그림자’라고 말했다.
어쩌면 흐린 그림자로 살기 보다는 자유로운 기행이 더 위대한 것이라 말할 수도 있다. 위대함일지 괴기스러움일지 모를 예술가들의 이해할 수 없는 작품이 명예를 얻는 경우도 종종 있으니 말이다. 아니다. 그것도 아니다. 내 관념은 아직 처음 떠올렸던 내 안에 ‘위대성’에 갇혀 있다. 찰스 스트릭랜드의 위대함은 명예와는 하등 관련이 없다. 그는 캠버스와 그림 물감 외에는 탐내지 않는다. 과거의 인연은 모조리 다 버리고 불멸의 현재만을 산다. 그는 무언가를 발견했지만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은 아니(188)’며, 단순하고 ‘자의식이 없는 인간(214)’일 뿐이다. 그런 인간에게 명예며, 안정, 안락과 관습이 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찰스 스트릭랜드는 ‘선이나 악이 생겨나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원시적인 힘(136)’에 사로잡혀 있다. 그는 ‘표현의 해방을 찾으며 괴로워하고 있는 하나의 영혼(208)’이며 ‘자기가 구하고 있는 미지의 것에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 수만 있다면, 단순화나 왜곡도 주저 없이(209)’ 행하는 무지막지한 인간이다. 그 자신에겐 그의 기행을 설명할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도 느끼지 않기에 그는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그 벌로 비참하고 고독한 생활을 한다. 오로지 하나의 목적에 매달려 무엇이든 희생해 버린다. 그 하나의 목적이란 ‘육체에 묶여 있어 잡을 수 없는 그 어떤 위대한 것’, ‘뭔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그때 이 육체에 묶여 있어 잡을 수 없는 그 어떤 위대한 것을 구하는, 불꽃처럼 괴로워하고 있는 영혼을 한순간 느낄 수 있었다. 뭔가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신성한 것을 구하는 한결같은 영혼을 한순간 엿본 것이다.(204)
찰스 스트릭랜드는 죽기 직전에서야 그가 갈구하던 단 하나의 목적을 이뤄낸다. 그는 타히티 섬의 열대 식물이 우거진 방갈로에서 자신의 존재를 더 이상 해명하지 않아도 되는 게으름을 누렸고, 결국 물에 빠진 사람이 애써 빠져 나오듯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 다급함으로 무서운 비밀을 숨긴 원시적인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문둥병으로 몸이 어그러져 죽기 직전, 눈이 먼 상태로 방갈로 벽에 가득 그린 그의 그림은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목적의 현신이었다.
타협하지 않는 비인간으로서 갖은 고행을 겪은 그의 유일한 목적은 그 목적으로서만 존재했다. 그는 방갈로의 그림을 나무 조각 하나 남김없이 모두 불태우라 유언했다. 그의 그림은 보는 이에게 영혼을 뒤흔드는 감동을 안겼지만 그것 외의 다른 것은 허락지 않았다. 그리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그 절절한 역동은 오직 ‘그린다’는 그 목적만을 이루고는 그에 파생되는 인간적 욕망은 과감히 거세해 버렸다. 그로서는 순수한 목적의 완성이었고, 세상으로서는 궁극의 예술을 잃은 불운이었다.
그의 위대함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우리는 우리를 추동하는 욕망의 근원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꿈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대개 어딘가에서 들어 왔던 것들이고, 우리가 바란다고 믿는 것들도 대개 권위 있는 자의 말이나 매체의 이미지를 학습한 것들이다. 재생산된 욕망의 뿌리는 새카맣게 잊은 채 우리는 늘 불안에 시달리고 분주하지만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살아간다.
우리와는 달리 찰스 스트릭랜드는 자신이 존재하기도 전에 우주에 있어왔던 원시적이고 아름다운 태곳적 욕망을 알고 있다. 그것이 인간들의 생활에 깊이 침투해있는 관습과 도덕률에 오염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는 모든 인간의 근원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본질을 현현하기 위해 몰입하고 그 외에 어떤 것도 관심이 없다. 그의 잔인한 무심함이 인간성을 희생시키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그것이 그의 위대함이기도 하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로 선택했다면, 아마 그것은 그의 위대한 비인간성 때문일 것이다. 그 비인간성은 우리가 잊고 살아왔던 원초적이고 순수한 욕망이 변질되지 않도록 일리 있게 우리의 인습을 쪼개고 흔든다. 그렇게 잘게 부서진 인습의 틈바구니 속에서 글을 읽는 우리가 잠시나마 우리 안에 추동하는 순수한 열망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소설은 교과서도 아니고, 매뉴얼도 아니다. 소설을 읽는 순간 자신의 영혼 안에 순수한 열망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그로써 그의 가치는 충분하다.
‘달’은 쉽게 만질 수 없는 삶의 비밀스러운 통로, 정신, 욕망, 상상, 영혼을 뜻하고, ‘6펜스’는 쉽게 만질 수 있는 것, 세속, 돈, 물질, 인습, 문명, 타성적 욕망을 의미한다고 한다. ‘달과 6펜스’라는 제목이 대조와 선택을 부추기기 위함은 아닐 것이다. 6펜스의 깊고 어두운 곳에 달은 공존한다. 우리는 찰스 스트릭랜드와 같이 비인간적인 영웅을 훔쳐보고 가끔씩 그 달을 인식한다. 6펜스의 세상에서 글을 읽으며 단단한 달의 세계를 구축하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신만의 달을 찾아야 한다. 자신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 있는 자는 어디로 가야할지 명확해 지고 그 길에 어떤 공격이 와도 상처받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