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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l 03. 2020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한다

자기만의 방


약 100여년 전, 1928년 어느 날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과 픽션'에 대해 강연을 시작한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작해야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한 가지 의견, 즉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돈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하는 것입니다. (자기만의 방, 민음사 p18)


그녀는 허구의 인물 '나'의 사소한 경험으로 청중들의 마음에 문을 두드린다.


  '나'는 오찬을 기다리며 반짝이는 사유를 찾아 대학 교정의 잔디밭을 걷고 있었다. 그러나 그 잔디밭은 (당연히 남성이었을) 특별 연구원에게 허락된 배타적 공간이었고, (당연히 남성이었을) 대학 관리인의 제지를 받아야 했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연히 남성이었을) 연구원을 동반하지 않고는 도서관에 출입하지도 못했다. 만찬으로 가기 전 날생선 처럼 번뜩이는 사유를 건져 올릴 생각의 찌를 만지작 거리던 '나'의 자그마한 욕망은 단지 그녀가 여성이기 때문에 멈추어지고 지배 관념의 호의적인 허락을 구하지 못해 흔적 없이 흩어버려야 했다.




'자기만의 방'은 페미니즘 계의 고전이다. 고전이란 늘상 그렇듯 책을 읽기 전부터 이 책을 다 아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든다. 또한 고전이란 늘상 그렇듯 책을 읽고 나면 내가 들어왔던 한 구절, 대체로 마케팅에 인용되었거나 유명인들이 언급했던 그 빈약한 문장이 작가의 의도와는 아무 상관 없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컨대,

민음사 버전의 책 띠지에 인쇄되어 있던 인용문은 제목 그대로의 '자기만의 방'과는 별로 상관 없었다.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재치를 번뜩일 필요도 없지요.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이 되려고 할 필요도 없고요. (자기만의 방, 민음사 p28)


  이 부분은 여성 작가가 '자기만의 방'에서 느끼는 감정이 아니라 '나'가 넙치로 시작되는 풍요로운 오찬을 즐기고 '좋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창가 의자의 푹신한 쿠션에 파묻(p28)'힌 상태에서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교제'할 때 느끼는 일종의 안락함이었다.


  그와 반대로 평범한 고깃국 스프와 감자, 프룬과 커스터드가 있던 그저그런 저녁 만찬에서의 대화는 시들해졌다. 나쁘지 않지만 영감을 주기엔 역부족인 식사 후 '나'의 인식은 오찬 때 보다 명료해진 듯하다. '나'는 오전부터 자신을 쫓아다녔던 생각, 여성의 가난과 한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학문의 자유를 받치고 있는 주춧돌로서의 돈을 생각하고, 여성은 왜 가난한지 깊은 고민에 빠진다.


  이쯤에서 다시 보면 위의 인용문은 '자기만의 방' 그 자체에 대한 상징적 문장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안락함이 주체적으로 편안한 관계를 맺고 자유롭게 사유하는 데 필요한 조건임을 표현하고자 한 문장이라 볼 수 있다.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영감을 누릴 안락함이 필요하지만, 시대는 공공연히 여성의 안락함을 박탈했다. 여성은 단지 여성이란 이유로 재산과 하인, 그리고 영감과 사유와 경험과 배움과 글쓰기의 기회를 갖지 못했다.




'나'는 당시 여성들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고려해 여성이 픽션을 쓰기 위해서는 '자기만의 방'과 소정의 돈이 필요하다는 퍽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시한다. 이것이 100년 후인 지금에서도 그 말 그대로도 많은 여성들에게 공감을 일으킨다는 것은 부정하지 못하겠다. 글을 쓰려면 굶주리지 않을 생활비와 나 혼자만의 서재가 필요하다며 지극히 현대적인 말로 치환해 봐도 전혀 어색함이 없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난 후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다르다.




  '나'는 캠퍼스의 만찬에서 깨달았던 물음에 답을 찾기 위해 런던의 대영박물관에서 여성의 문학사를 훑었다. '나'는 남성의 우월의식과 여성에 대한 견제 그에 따른 숨겨진 분노로 쓰인 글을 읽었고, 운 좋게 글을 쓸 수 있었던 부유한 여성의 신세한탄을 읽었고, 여성으로서의 경험을 확장하여 그럴듯한 픽션을 써낸 브론테 자매의 글을 읽었다. 연대순의 문학 속 여성을 읽으며 '나'는 작가들의 훌륭한 면면도 발견했지만, 그보다 더 큰 아쉬움을 느낀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해결되지 못한 욕구와 결핍이 '사실에 충실한 픽션을' 그려내지 못하게 했다는 인상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의 결핍에 기울어진, 유독 길고 진한 색채로 쓰여진, 불필요하게 군더더기가 붙어있는 그런 픽션이 아닌 '사실에 충실한 픽션'을 갈망한다.


그녀는 메리 카마이클의 책을 마지막으로, 그 작가가 픽션 다운 픽션을 그러한 쓰기 위해서는 방해받지 않을 수 있는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 그리고 백 년이 필요할 것이라 결론 짓는다.


'사실에 충실한 픽션'이란 있는 그대로의 순간을 포착해내는 순수 리얼리티 문학을 말한다. 작가는 온전한 자기 자신이 되어 자유로운 마음으로 글을 써야 독자를 설득시키는 순수한 사실을 쓸 수 있다. 작가가 결핍이든 우월감이든 열등의식이든, 자의식이 묻어나온 감정을 해소하지 못하면 그 글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하고 도착적이고 선동적으로 기울어질 뿐 실제로 있음직한 허구의 미덕을 갖춘 '픽션'이라고는 할 수 없다. '나' 는 오로지 진정한 픽션의 본질을 생각한다. 여성은 끊임없이 억압받고 방해 받았지만 훌륭한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 억울한 세월에 화를 내기만 해서는 안된다. '나'는 차분하고 절제된 태도로 진정한 의미의 해방을 논한다.


여성이라고 차별받고 짓눌렸던 예전의 억울한 마음은 종잇장 구기듯 쉽게 버려 버리고, 이렇게 말한다.


...글을 쓰는 사람이 자신의 성을 염두에 두면 치명적이라는 것입니다. 순전한 남성 또는 순전한 여성이 되는 것은 치명적입니다. 인간은 남성적 여성이거나 여성적 남성이어야 합니다..... 창조적 예술이 이루어질 수 있으려면 먼저 마음속에서 여성성과 남성성이 협력해야 합니다...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온전히 충실하게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려면 마음 전체가 활짝 열려 있어야 합니다. 자유가 있어야 하고 또 평화가 있어야지요. (자기만의 방, 민음사 p152)


  그녀는 남성과 여성, 우와 열 그 관념 자체에서 벗어나야 온전히 자신의 경험을 전달할 수 있으며 그것이 여성이 픽션을 쓸 때 궁극적으로 가져야 할 목표라고 말한다. 자기만의 방이나 1년에 500파운드의 돈은 그 목표를 가능하게 하는 아주 사소하고 현실적인 조건인 것이다.


칭찬은 비난과 마찬가지로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여러분이 쓰고 싶은 것을 쓰는 것, 그것만이 중요한 일입니다. (자기만의 방, 민음사 p155)


  픽션을 쓰려면 여성이든 남성이든 작가는 다른 무엇이 아닌 자기 자신이 되어야 하고, 오로지 사물 그 자체로 생각해야 한다. 그러한 지적 자유는 물리적 안정에 따라 좌우된다. 100년 만큼 시대가 성장하고 연간 500파운드의 안락함과 타인의 습성에 방해받지 않을 자기만의 방이 있다면,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는 용기와 자유를 가지고 리얼리티를 창출해 낼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말한다.




2020년이 되었다.


이 시대 여성들은 재물을 소유하고 지위를 쟁취하며 명예를 누리고 있다.


비로소 현 시대의 우리는


그녀가 바라던 대로 100년을 가졌다.


우리 중 많은 이들은 당시 연간 500파운드로 누릴 수 있는 물질적 풍요를 누리고 있다.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은 자기만의 방을, 혹시 그렇지 않더라도 사이버 공간이든 카페든 방해받지 않고 세상과 분리될 수 있는 방법을 가지고 있다.


이제는 더 이상 여성이기에 걷지 못할 잔디밭이란,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100년 전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대로 '우리 자신'이 되었는가?


여성의 열등감이나 (부재한 것을 거세했다는 둥의) 결핍을 해소하고, 상처받지 않으면서도 남성의 우월의식을 날카로운 지성으로 분별하고, 여성적 남성이거나 남성적 여성인 인간 그대로의 자신을 발견했는가?


아직도 우리는 관습과 관념과 역할과 실존 사이에서 헤매고 있지 않는가?


여전히 우리는 어떤 부분에 있어서는 권위있는 자의 차별을 내면화하고는 자연발생적인 영감이 겁먹고 후퇴하도록 내버려 두고 있지는 않는가?



  버지니아 울프가 간과했던 게 있다면, 오래된 것은 실체가 없어도 유령처럼 끈질기다는 사실이다. 기술이 발전하고 세련된 학습의 기회는 열려있고 '책' 그 이상의 정보가 쏟아지는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남성 여성 뿐만 아니라 그 외의 우월하고 열등한 것들의 이분법들이 판을 치고 있다. 인간의 본성인지 심보인지 어떤 욕망인지 나의 짧은 지식으로는 알 수 없다만, 모든 것을 갖추고도 울프가 말한 그 결핍은 겉모습만 바꾸고 출몰하여 우리들은 '자기 자신'이 되기는 커녕 때론 좌절하고 때론 패배하여 개돼지라 불리는 군중이 될 때도 있다.


  정작 나부터도 하루의 대부분을 결핍과 열등의식에 취한 편견들로 무의식적 선택을 반복한다. 여성의 외모로 열등감을 느끼고 우월한 유전자를 시기하여 미모의 여성이라는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다이어트 산업에 일조하고 있고, 남자 상사의 성희롱적 발언을 못 들은 척하고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상으로 인정받길 바랄 때가 있으며, 살림을 잘 하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결혼한 여성의 상에 어울리도록 분수에 맞지 않는 소품들을 사들인다. 나의 소비패턴은 욕망을 반영한다. 내 소비의 대부분은 100여년 전의 여성들의 정신적 한계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여겨질 때가 많다. 드러내지 않을 뿐 여전히 여성은 여성으로서만 대우받고 욕망하고 그렇게 살아간다.


그때는 그랬고 지금은 다르다.


  결론적으로 물질적 풍요의 시대에 살아보지 못한 100년 전의 버지니아 울프가 말한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파운드의 돈은그 때의 지식으로 그 때의 여성들에게 남성도 여성도 아닌 '진정한 자기자신'이 되기 위해 그 때 필요했던최소한의 보루였을 뿐이다. 이제는 더 이상 물질적 안락함만으로 복잡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을 구원할 수 없다. 방 안까지 오염된 정보를 침투시키는 각종 매체가 온갖 긍정적인 이미지로 우리를 꾀어내고, 어떤 종류의 분열이든 갈등이 극에 치닫는 시대가 지금이다.

  

현대인들은 우울하거나 불안한 상태로 타인을 그리워하면서도 타인을 두려워하며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우리는 '진정한 자기 자신'이 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들의 시각으로 지금의 특성에 맞게 다시 정의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신을 진정한 자기 자신이도록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울프가 전하는 메시지와는 조금 멀어졌지만, '픽션'이라는 장르에 대해서도 다시 고민해 봐야 한다.


  19세기 영미문학계에서는 사실주의가 주를 이루었고 20세기 초까지도 사실 그대로의 반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인들이 왕왕 있었다. 민중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했기에 문인들이 누리는 권위도 지금과는 달랐다. 권위란 시대를 지배하는 '옳은' 양식에 대한 정의할 수 있는 힘이다. 권위있는 자는 정의하고 글을 읽을 줄 아는 지성인들이 그를 찬양하면 성실하고 무지한 개인들은 합리적 도식 없이 이를 받아들이는 구조로 세상은 작동해왔다. 그렇기에 '훌륭한' 픽션은, 비록 대중의 사랑을 받아 탄생한 장르이긴 하지만, 인간적인 결핍을 해소하고 인간 군상의 '사실'을 완벽하게 그려내거나 철학적 진리의 빛이라도 잠시 엿볼 수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100년이 흐른 지금은 더 많은 이들이 글을 읽고 쓸 수 있는 세상이다. 이제 더 이상 글은 그 자체만으로 권위를 잉태하지 못한다. 글 뿐만 아니라 확고한 '옳음'이 있다는 권위 자체도 흐릿해 졌다. 이러한 시대에서 '훌륭한' 픽션에 대한 정의는 허망하다. 결핍을 지닌 픽션이라도 가치를 지니는 글들이 있다. 오래 회자되고, 자주 오해받으며, 극히 일부의 삶을 변화 시키는 글들이 있다. 빈약한 논리와 기울어진 감정으로 쓰여진 글이라도 그런 글들은 분명 가치가 있다. 결핍 있는 글이 부끄러움을 잊은 세상은 달리 말해 열등한 자들에게도 발언권을 부여하는 다양성의 세상이다. 상처받고 쉽게 흔들리는 '인간' 그대로의 글쓰기가 가능해진 세상인 것이다.


  버지니아 울프의 세대보다 부유하고 누구나 말하고 쓸 수 있는 지금 이 시대가 예전보다 더 온전한 자신이 될 수 있는 시대라고는 말 못해도 모두에게 기회가 주어진 시대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다. 불평등을 인식하고 여성 해방의 포문을 열었던 버지니아 울프는 100여년을 자라 불완전하지만 진중한 페미니스트들이 되었다. 이 책 추천의 말에서 이민경이 말했듯, '우리의 삶은 누군가의 허구에 빚진(7p)' 것이라면 그녀의 허구에 보답하는 길은 무엇일까. 아마도 울프가 그토록 원했던 '자기 자신만의 사유'를 찾는 것이 아닐까.


페미니즘은 상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나는 믿는다. 울프 이전에, 울프와 나 사이에, 어쩌면 그 이후에..... 지금까지 새로운 시대를 상상해 온 이들이 각자의 삶에서, 그 야트막하게 벌어진 틈에서 다른 삶을 기어코 퍼 올리는 일을 멈춘 적은 다행히 단 한 번도 없었딘. 그 틈을 넓히려면, 마음 안팎에 반드시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 (자기만의 방, 민음사, 추천의 말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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