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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Jul 05. 2020

나의 찬란한 20대를 기리며

실패한 특수교사의 꿈

 아기가 시큼 쌉싸래한 흙무더기를 집어 먹듯, 나의 20대는 무모했다. 아무것도 익숙하지 않았지만 시시때때로 조급증에 시달렸다. 느리고 어리숙한 내가 부끄러워 모든 것이 완성된 것처럼 굴 때도 있었다. 잘해 내고 싶은 마음은 늘 나보다 빨랐다. 나는 무지했지만 쉽게 확신을 가졌고, 기대했다가 자주 좌절했다.




 20살의 첫 방학, ‘열린 학교’에 참여했다. ‘열린 학교’는 방학 동안에도 학기 중과 똑같이 특수학교를 운영하는 자원봉사 활동이다. 장애인부모회에서는 자녀들이 방학이 끝난 후 다시 학교에 적응하기 어려울 것을 우려해 이 시스템을 만들었고, 방학 동안만 교사가 되어 줄 특수교육과 학생들의 지원을 받았다.

 ‘열린 학교’의 교사로 활동하는 동안 나는 아침 8시면 스쿨버스에 올라 등교지도를 했다. ‘예뻐’를 남발하는 아이, 동그라미를 좋아하는 아이, 각기 다른 자신만의 세계에서 말을 거는 아이들을 버스에 태워 학교에 도착하면 각 반의 담당 자원봉사자들이 운동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교실은 교사마다의 꿈이 영글어있는 곳이었다. 늦은 나이에 특수교사의 꿈을 키웠던 어느 봉사자는 아이들의 오감이 자극될만한 놀잇감을 잔뜩 챙겨 왔다. 수화의 매력에 빠져 특수교육과에 진학했던 한 봉사자는 청각장애를 가진 학생을 맡아 더듬더듬 수화로 대화를 나눴다. 자신만의 교수법을 개발해 빨간 실이 교실 중간으로 지나가도록 묶어 놓은 봉사자도 있었다. 그는 아이들이 교통 신호의 빨간색에 경각심을 가졌으면 좋겠다고 했다.


 우리 교실에는 5명 남짓한 학생이 있었다. 나는 전 날 인터넷에서 긁어모은 학습 자료와 서점에서 구입한 색칠놀이, 한글 공부 등을 챙겨갔고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업을 진행했다. 되도록이면 크고 낭랑한 목소리로 수업을 했다. 수업 목표는 아무래도 좋았다. 아이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수업 시간이길 바랐다. 체육 시간에는 공놀이를 했고, 아이가 덥다고 옷을 벗으면 시중들듯 그 옷을 받아 들었다. 한 번은 옆에 있던 봉사자가 ‘땀 난 상태로 옷을 벗었다가 감기 들 수 있다’고  조언하여 허수아비처럼 서있던 내 자신이 민망했다.


 점심시간에는 아이들 식사 지도를 했다. 나는 지체장애로 팔다리가 모두 말려 있는 여학생의 밥을 직접 먹여주었다. 학교가 끝날 때쯤 아이는 여느날 처럼 숟가락을  내밀던 내 손을 꽉 물었다. 오른손엔  이빨 자국이 둥그렇게 파여 붉은 길을 냈다. 서러움에 왈칵 눈물. 장애가 있는 아이들과 보내는 시간은 응답 없는 문을 한 없이 두드리는 일이자, 영원한 짝사랑이었다. 상황을 전해 들은 아이의 어머니는 오히려 의아해했다. 아이는 스스로 밥을 먹을 줄 알았다. 아이가 물었던 건 내 손이 아니라 멋대로 단정 짓고 한계 지웠던 내 못난 마음이었다.


다음 방학에는 제법 노련한 자원봉사자가 나의 부교사가 되었다. 그는 바지에 실례를 한 아이의 뒤처리를 하는 데도 불쾌한 내색이 없었다. 몸집이 어른 못지 않았던 아이는  따뜻한 물줄기가 엉덩이를 간지럽히는지 발장난을 치며 꺄르륵 웃었다. 그는 염치없이 헤헤 웃기만 하는 아이를 수월하게 씻기고 옷을 갈아 입혔다. 아픈 아버지를 돌볼 때에 비하면 이런 일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그는 나보다 많은 답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그가 가진 세월의 무게가 못마땅했다. 아픈 아버지를 돌본 그의 설움은 아랑곳없이 그의 수월함에 질투가 났다.


한 날은 작고 재빠른 아이 하나가 학교 밖으로 도망을 쳤다. 나른한 점심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와 부교사로 모자라서 전 학교의 봉사자들이 학교 밖으로 그 아이를 찾아 나섰다. 경찰이 출동했고, 그 아이의 부모님도 학교로 나왔다. 그러고도 그 아이를 찾지 못해 전역의 경찰들이 비상에 걸렸다. 아이는 어른 걸음으로도 족히 30분은 넘게 걸리는 번화가에서 발견되었다. 마음씨 좋은 점방 아저씨에게 얻은 쫀득이와 사탕을 물고 아이는 리드미컬하게 고개를 양 옆으로 까닥거리며 학교로 돌아왔다.


아이는 정확하게 3번 탈출했다. 나는 10명도 안 되는 아이들과 교실에 있으면서도 살금살금 걸어 나가는 그 아이를 알아채지 못했다. 또 한 번의 큰 소동이 있었고, 3번째에는 나의 노련한 부교사가 신발을 들고 몰래 도망가려는 그 아이의 뒷덜미를 낚아챘다. 그 어느 순간에도 나의 몫은, 없었다.


누군가가 특수교사는 뒤통수에도 눈이 달려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새기고 수시로 뒤로 돌아보았지만, 돌발 상황은 늘 있었다. 한 번은 한 여자아이가 미술관에서 바지를 내리고 소변을 누었고, 한 번은 수영장에 갔다가 경증 정신 장애를 가진 아이를 찾지 못해 곤욕을 치러야 했다. 나는 내 뒤통수에 눈이 없어서 슬픔에 빠졌다. 아무래도 나는 훌륭한 특수교사가 되기는 글렀다고 생각했다.




 단지 훌륭하지 못할 거라는 이유만은 아니었다. 나의 선택은 직관적이었다. 왜 특수교사가 되지 않았냐고 묻는다면, 굳이 답을 찾자면, 두려웠다는 것이 가장 가깝다. 나는 아이들의 없는 소리가 두려웠다. 자기만의 세상에서 침묵하는 그 아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고는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는 기분이었다. 특수교사는 아이들의 피드백 없이도 단단한 확신과 올바른 신념을 불쏘시개 삼아 열정을 불태울 줄 알아야 했다. 그러고도 그것이 아이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아이들은 추워도, 혼자 밥을 먹고 싶어도, 배가 아파도, 나가고 싶어도, 선생이 형편없어 화가 나도 말을 삼킬 테니까.


몇 년 후 나는 우연히 버스정류장 벽에 붙은 종이를 발견했다. 내가 ‘열린 학교’ 봉사자로 일했던 그 학교에서 점심시간에 몰래 도망 나간 장애 아동을 찾는다고 했다. 가슴이 내려앉아 배가 아파왔다. 나는 부디 그 아이가 무사하길 빌었다. 제발 별 일 없기를, 누군가의 호의로 쫀득이와 사탕을 물고 해맑게 돌아오기를 빌었다.

달이 흘러 아이의 소식을 들었다. 학교와 멀지 않은 곳에 건설 중이었던 건물 지하 흙탕물에서 새하얗게 질린 아이가 떠올랐다. 진실로 하늘은 인간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기는 지도 모른다. 나는 단지 조그마한 기쁨을 찾아 모험을 떠났을 아이의 생각에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아이를 애타게 기다렸을 엄마 아빠와 선생님들의 마음이 애달파 속이 쓰렸다. 나는 내 일이었을지도 모를 묵직한 현실 앞에서 나의 실패한 20대를 끌어안고 약간은 안도했다.


나의 20대는 헤어진 연인 같다. 그때의 내가 밉고, 다시 만날까 두렵지만, 돌아갈 수 없어 그립다. 언젠가 웃으며 추억할 날이 올까.  분별없는 열정을 미워하지 않을 날이 올까. 나는 그저 지금의 20대들은 나보다 덜 외롭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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