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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Sep 26. 2020

인생을 낭비했다

휴직 후 나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정말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다.

나는 인생을 낭비했다.



내가 아는 어떤 이는

한 아이의 깔깔거리는 웃음을 지키기 위해 20대를 바쳤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던 그 아이는

엄마와 아빠와 삼촌과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사랑으로 기어코 살아남았다. 

살아남는 데 살아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써야 했기에, 어른들은 생각보다 자주 아이들을 귀찮아한다는 것을, 친구들과 얕게 지내는 법도 알아야 한 다는 것을

아직 다 배우지도 못했는데

야속하게도 병마는 아이의 엄마에게 들러붙었다.

복잡한 의료체계와 고통스러운 치료과정도 생을 향한 희망과 좌절을 깎아내지 못했다.

살아야 했고, 이겨내야 했다.

이제야 완치 판정을 받은 아이는 아직 엄마 말고는 세상을 몰랐다.

그러나 운명은 인간의 희망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길고 지루한 고통 끝에 아이는 엄마도 잃고, 할아버지도 잃었다.


그리고 그이는 사랑하는 누나와 아버지를 살려내기 위해 또 30대를 바쳤다.


결국 떠날 사람은 떠났고

살아남은 사람은 살았다.

시간이 흐르면 산 사람은 살아진다던 무심한 진실은

가슴을 꽉 막은 파이프로 겨우 묻은 빈자리와 평생 함께해야 한다는 의미라는 말이라는 걸 미처 몰랐다.

가고 난 이의 자리에 남은 그림자는 잠을 자다가도 울고, 밥을 먹다가도 목메는, 기약 없는 불편함이었다.

시간은 그냥 흐르지 않았다.

꼭 쥐었던 것을 놓친 자리엔 시간이 할퀸 자국이 움푹 파였다.


사랑하는 이를 살리려 많은 것을 포기했던 그의 인생엔 남은 것이 별로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힐끗 보고 잠시 웃고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하는 추억밖에 없다.

그 추억도 남은 것이라고 할  있을까.

그는 인생을 낭비했다.




요즘 들어 피천득의 수필 '인연'이 자꾸만 떠오른다. 그는 울고 웃는 감정의 묵직함을 덜어내고 간결한 문체로 인간의 인연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그리워하는데도 한 번 만나고는 못 만나게 되기도 하고, 일생을 못 잊으면서도 아니 만나고 살기도 다. 아사코와 나는 세 번 만났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을 것이다  


나는 그의 글에서 특히 두 부분을 좋아한다.


첫 번째는,


조롱 속의 새라고 종달새는 종달새다


새장에 갇혀 있을 지라도 종달새가 자유를 염원하는 본능은 그대로라는 뜻이다.

타인을 조롱 속의 존재로 가벼이 여기지 않고, 종달새의 본능을 간직한 존재라 여기면 그가 애처로워 그를 무시하지 않게 된다. 더 돌보고 관심 가지고 사랑해야 할 존재로 여기게 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이나 스캇 펙의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그랬듯, 사랑하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아마 타인을 종달새로 여기라는 의미일 것이다.


두 번째는 '구원의 여상'을 묘사한 수필이다.

여기 나의 한 여상이 있습니다... 화려한 것을 좋아하나, 가난한 것을 무서워하지 아니합니다... 그는 사치하는 일은 있어도 낭비는 절대로 아니합니다....


사치하는 것과 낭비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치는 비싼 값을 치르고라도 더 큰 가치를 지키는 것이고, 낭비는 의미 없이 곧 사라질 것들에 가진 것을 소비하는 일이다.

씀씀이의 크고 작음과는 상관없다.

큰돈을 들여서라도 하고자 하는 것을 하고,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고, 가치로운 일을 했다면 그것은 낭비가 아니다.

오히려 사치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인생을 낭비했다.


그는 사랑하는 이를 살리는 데 그의 인생을 바쳤고,

사랑하는 이가 세상을 떠나기 전 조금이라도 더 그와 함께 하고자 했다.

그의 가치는 사랑에 있었기 때문이다.

고로 그는 실로 인생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사치한 것이었다.


사치한 인생으로

그는 가난하지만 가난을 핑계 삼아 쉽사리 양심을 저버리지 않는 사람이 되었다.

가난하다고 해서 타인의 재물을 탐하여 그를 속이거나 상처 입히지는 않는 사람이 되었다.

가난하지만 가족을 위해 시간을 쓸 줄 알고, 때로는 그들과의 시간에 돈을 투자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티 없이 웃을 줄 알며, 타인을 위해 눈물 흘릴 줄 알며, 분노했다가도 화해할 줄 알며,

예민하게 인식하면서도 인간의 부족함을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무엇이 옳은지를 알고

잘못된 일을 바로잡는 노력에 덧댄 부끄러움과 마주할 줄 알며

인간을 미워하고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마음의 허공 그대로 둘지언정 아무것으로나 채우지는 않습니다....
그는 과거의 인연을 소홀히 하지 아니 합니다. 자기 생애의 일부분인 까닭입니다...
그는 몇몇 사람을 끔찍이 아낍니다. 그러나 아무도 섬기지 아니합니다.....
그에게는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눈물이 있습니다. 그의 가슴에는 고갈되지 않는 윤기가 있습니다. 그는 한 시간 내내 말 한마디 아니하는 때가 있습니다. 이런 때라도 그는 같이 있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기쁨을 갖게 합니다.




얼마 전에 아빠가 말했다.


'뭐야, 쉬는 동안 아무것도 한 게 없네'


그렇다.

나는 가난해졌고, 경력을 잃었으며, 주위에 남은 사람도 별로 없다. 남은 것이 없다.


인생을 낭비하였다는 분주한 괴로움이 명치에서 이글거린다.


낭비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언가 남았다는 것이다.

무언가 남긴다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따르기 위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게 하는 인간의 욕망이다.


인간은 남기고 싶은 욕망으로  피라미드를 세우고, 전쟁을 일으켜 명예를 남기고, 역사를 기록했다. 그것이 녹록지 않으면 자식이라도 낳아 유전자를 남겼.

그러나 그것은 남겼다기에는 애매하다.

소설 속 싯다르타는 아버지를 인정하지 않는 자식을 떠나보냈고, 

내가 아는 많은 이들은 어린, 또는 토끼 같은 자식까지 둔 자식들을 잃었다.


고로 과거는 남기는 것이 아니다.

남는 것은, 과거의 본질이 아니다.

남기고자 하는 자는 자신을 착취하거나 타인을 착취해야 한다.

과거는 잡으려 해도 잡을 수 없고

쉽게 사라지며 허망할 뿐이다.

무상한 것들을 붙잡고 서글퍼하는 그 생각들,

나를 괴롭히던 그 생각들,

아빠를 비롯한 타인에게서 빌려온 생각들이 책망하지만 않는다면  

아마도 노래 가사처럼 매일 이별하고 살고 있는 지금이 그다지 아쉽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단지 기억할 수 있을 뿐,

그 기억이 머뭇거려 지금에서야 한탄할 수 있을 뿐,

남기지 못한 인생이 낭비한 인생이라면

낭비하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요즘 부쩍 더 우울에 빠져드는 나에게 그는 말했다.


진정 가치로운 일은 보이지 않는다고.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는 나를 지켜보았고 내가 얼마나 많이 성장했는지 그가 제일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이제 곧 돌아갈 것이다.


지난 2년 간, 휴직을 했고, 세상으로 부터 유배를 갔다.


나를 돌보는 시간이라고는 했지만, 나를 돌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고통을 해소하는 층위는 세 가지가 있는데,

잘 먹고 잘 쉬고 잘 자고 적당히 운동하며 무조건 잘 될 거라 주문을 외며 나를 돌보는 층위,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만나고 가족과 시간을 보내며 사회적 기반을 얻는 층위,

그리고 고통을 해명하는 층위가 있다.


고통을 일으킨 사건은 그저 지나간 사실일 뿐이고 가치중립적으로 존재하는 일이라고 해도 그 일을 제대로 이해하고 더 나은 형태로 현실에 반영하려는 노력이 없다면 고통은 해소되지 않는다. 그저 지나가는 태풍처럼 자연발생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라 믿어서는 그 고통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해명되지 않은 고통은  끈질긴 그림자로 남아 지금 사는 시간의 곳곳에서 나를 자극하고 또 다른 잘못된 선택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고통의 완화로는, 인간은 같은 행동을 반복할 뿐이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나는 왜 고통스러운가,

인간은 왜 살아야 하나,


삶은 들판에 핀 풀처럼 사는 것이라고 스님이 말씀하셨다. 그러나 죽음을 인식하고 부조리함을 깨달은 이상 도돌이표처럼 되풀이되는 물음은 뇌를 꽉 물고 놓아주지 않는 덫이 되었다. 그렇기에 나의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을 찾아가야 했고, 고통을 해명해야 했다. 고통을 해명하려면 제대로 볼 수 있는 이성과, 직관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넘치지 않는 지식과,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성실함이 필요하다. 더불어 자신을 포용하고, 타인을 용서하는 감성도 필요하다.


그래서 책을 읽었다.


영상과 달리

나에게 이성을 작동시킬 여백을 주고

많은 정보를 빨리 소화시키라고 몰아붙이지도 않고

내 속도대로 의미를 곱씹을 수 있도록 

책을 읽었다.

글을 읽다가 잠시 멈춰 떠오르는 기억을 음미하고

그 안에 있는 듯 잠시 수치스러워했다가도 다시 나를 용서하는 일을 매일 했다.


많지 않은 책을 읽으며 드는 생각은,

책은 인간의 본능과 하등 관계없다는 것이다.

인간의 행복과도 별로 관계가 없다.

나는 글도 모르고 천지분간 못하는 어린아이보다  더 행복한 어른을 본 일이 없다.

톨스토이도 '고백록'에서 책을 읽고, 지식이 쌓일수록 인생이 허무하다는 진리만 자명해진다고 하였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고통과 끈질긴 질문에 시달려 본 사람이라면 책을 읽을 수밖에 없다.

책을 읽으려면 눈도 따갑고, 허리도 아프고, 목도 뻐근하지만 그럴 수밖에 없다.


지난 2년 간은 단연코 내가 가장 달라진 시간이었다.

느리게 흐르는 하루는 손발이 잘린 앉은뱅이처럼 무력했다.

아프면 아픈 대로 오래 아팠다.

아프고 부끄러운 기억 속에 오래 머물렀다.

돌아보고 싶지 않은 것도 보이면 봤다.


'인간실격'에 나오는 요조처럼, '변신'에 나오는 벌레처럼 나는 쓸모없었다.

'구토'에서 처럼 마로니에 뿌리는 마로니에 뿌리일 뿐이었고,

'이방인'처럼 햇빛이 뜨거워 사람을 죽이고, 엄마의 죽음을 충분히 슬퍼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형 선고를 받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다 역사 속의 인물들을 만나며 모든 것이 변하는 역사 속에 달리 보이는 지점, 즉 역사적 인식을 배웠고,

후대인들이 부여한 의미가 무엇이든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시대의 사람들이 본 것은 오직 혼돈이라는 것도 배웠다.

나의 역사에서 지금 이 순간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심해라 해도 내가 살아남는 한 내가 의미를 여한 나만의 역사로 달리 기억될 날도 오지 않을까 생각했다. 

인생의 맥락은 결코 짧지 않았다.


루이제 린저에게 진정 자유롭다면 언제든 안락함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과, 왜 사느냐고 묻지 않는 것이 진정한 삶이라는 것을 배웠고,


니체에게 분주함과 공포에 속아 자신을 잃지 않는 법을 배웠고,


하이데거에게 중요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중요하지 않고 죽음 앞에서 타고 남은 재처럼 쓸모없고 무상한 것들을 덜어내면 비로소 보이는, 지금 이 순간의 경이로움이 존재의 본질이라는 것을 배웠다.


인간의 삶은 유전자와 사회 구조로 대부분 결정되기도 하지만


빅터 프랭클은 그래도 누군가는 운명을 거슬러 분명 고귀한 선택을 한다는 사실을 말해주었고, 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세상에 열린 마음으로 자신의 삶이 던지는 질문에 답하다 보면 발견되는 자신만의 '의미'라고 했다.


붓다는 아무것도 없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고 했고


톨스토이는 인간의 지식으로는 자살이 필연적인 선택이라는 자기 파괴적인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으며, 오직 신앙만이 살아야 할 이유를 말해준다고 했다.


책을 읽을수록 나는,

혼돈의 세상에 외따로 던져진 점이었다가

인류의 역사라는 선 위의 한 지점이었다가

광대무변한 우주의 티끌임을 깨달았다.


그에 따라 내가 내린 결론은

삶은 한낱 인간이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가 아닌 신의 의지로 흘러가는 것이기에

살아야 한다, 살아서 내 뜻대로만은 되지 않는 변화를 두 손 벌려 환영하고

상처 받고, 또 상처 받으면서

더 나아지지 않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안에서 내 삶이 내 맘 같지 않음을 부끄러워할 필요도,

한낱 모자란 인간임을 수치스러워할 필요도 없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죽음 에 평등한 인간일 뿐이니.


이것이 칸트의 정언명령이라면, '살아야 한다'는  나 스스로 부여하고 그 자체가 목적인 명제다. 그 어떤 쓸모도 없고, 그 외의 이유도 없으며 다른 전제나 증명도 없이 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는 무사히 어른이 되는 데까지도 해야 할 일이 지나치게 많다. 한국 사회의 개인은 물려받은 '문화적 자본'이 빈약할수록 이룬 것 없이 분주하게 사는 방식을 고수했다. 그러나  타인이 부여한 의무는 정언명령이 될 수 없다. 그것은 니체가 말한 낙타의 삶이다. 그러므로 타인의 지식으로 어떤 이익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면, 그것은 그저 타인에게 빌려온 삶일 뿐 내 삶을 작동하는 정언명령일 수 없다. 


나에게는 '살아야 한다'와 '진실해야 한다' '책을 읽어야 한다'가 정언명령이다. 아무런 이익 없이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나를 압도할 만큼 거대하지만 무겁지 않은, 즐겁지 않은 행복과 웃지 않는 기쁨을 주는 그런 것이다.


책은 나를 변화시켰다.

내가 변할수록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이들이

한 사람씩 꿈에 나왔다.

나는 그들에게 울부짖기도 했고

그들과 웃으며 화해하기도 했다.

그런 꿈을 꾸는 순간부터는 

조금씩 괜찮아졌다.




나를 고통스럽게 만든 것에 전쟁을 선포한 후 살면서 가장 고독한 시간을 보냈다.

나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했다.

그때까지 나는 고통에 무심했고, 뜨겁지도 않은 일에 쉬이 나를 희생했었다.

더 이상 그렇게는 살 수 없겠다, 죽거나, 싸우거나 그것밖에는 길이 없겠다고 생각했을 때

비로소 나의 침묵이 두려움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죽음의 고통 앞에서 침묵을 감싸고 있던 옷을 훌훌 벗어던지더니 두려움이 버티고 서 있었다.

나를 비난하는 타인에 대한 두려움,

잘못된 선택으로 타인에게 해를 끼칠까 하는 강박적 두려움.

그 두려움을 깨지 않고서 나는 달라질 수 없었다.

나는 신이 아니었다.

내 자유가 그들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한, 혐오의 감정으로 혼자 상처 받고 나를 미워하는 타인들의 내밀한 사정까지 일일이 헤아릴 수 없다.  

비난의 화살에 뻔뻔하게 방패를 들고

때로는 타인에게 상처 주고도 당당함을 잃지 않아야

때로는 타인을 미워하고도 결국은 사랑할 수 있었다.

내가 강박적으로 타인으로부터 나를, 나로부터 타인을 보호한들 어차피

인간이라면

누군가에게 상처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상처를 주고받는 존재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인간은 가장 욕망하는, 즉 사랑하는 것들로부터 상처를 받기에

미워해도 사랑해도 상처는 남는다.


지난 2년 간, 습관적으로 움츠러드는 어깨를 펴고 수치심을 이겨내고 진심을 발화하고 비난을 받아내면서 나에게 남겨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고통과의 고독한 싸움 속에서, 승리는, 없었다.

다만 나는 두려움을 견디는 법을 배웠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더라도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법을 배웠고,

나에게 해로운 것과 해롭지 않은 것을 알게 되었다.


"... 자신의 진정한 사명을 깨닫기 위해 때때로 강요된 고독함이 필요하다."

-슈테판 츠바이크-


앞으로는 현실적인 성취보다 더 사소하지만 중요한 일로 하루를 채울 것이다.

나 스스로 이유를 찾지 않고는 그 어떤 노력에도 쉬이 몸을 내어주지 않을 것이다.

작은 도전들로 삶을 살찌우되

잊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잊지 않으려는 노력을 할 것이다.

용기를 내어 볼 것이다.




산책하다가 까치를 한 마리 보았다.

까치는 땅을 쪼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까치가 쪼고 있던 것은 개미였다.

까치는 날아갔고

개미를 보았다.

개미굴을 보았다.

여왕개미는 보이지 않았다.


진정 가치로운 것은  보이지 않는다.


고독한 시간을 누렸다.

손수 밥을 지어먹었다.

가족과 시간을 보냈다.

강아지를 돌보고

좋은 친구를 만나 우정을 다졌다.

따뜻한 차를 마셨다.

사랑하는 공간을 만났다.

새로운 도전을 했다.

더 많이 걸었다.

책을 읽었다.

꿈을 꿨다.


인생을

사치하느라

남은 것이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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