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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Oct 12. 2020

당분간, 효도는 그만 하기로

효도 파업

추석 이후로 긴 몸살을 앓았다.


나는 평생 제사를 지내왔고 지금도 제사 지내는 페미니스트라 명절 때마다 전통과 여권 신장 사이에서 갈팡질팡 한다.

우리는 명절 때마다 음식을 두 배로 만들고 큰집과 시어머니 댁을 오가며 차례상도 두 번 차리는데 이게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시아버님 차례상과 돌아가신 시누이 차례상에 올릴 전을 부치고 있으면, 노동은 당연히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몫이라 여기는  함의를 드러낸 말들이 기름진 연기 속에서 내 신경에 날카롭게 꽂힌다.

내 신경을 긁는 데는 어른 아이 할 것 없다.

제 엄마의 제사상을 준비하는 내 노동력은 아랑곳하지 않고 요리 훈수두기를 좋아하는 남편의 조카는, 명절 동안 받을 용돈을 미리 계산하느라 여념이 없다.

모두들 나를 아끼고 잘해주지만

(이건 진심이다. 다들 나를 예뻐해 주고 아무도 잔소리하지 않는다. 시어머니는 끼니때마다 맛있는 밥을 차려주시고 남편의 조카도 나를 제일 믿고 따른다.)

나는 가족에 깊게 배인 그 전통 앞에 무력감과 분노를 동시에 느낀다.

남자들은 전통 지킴이로서 예법을 가르치면서 때 되면 정장을 차려입고 절을 하고, 여자들은 더 예쁘게 전을 부치고 예법에 맞게 상을 차리고 치우고 설거지와 청소까지 하면서 명절이랍시고 찾아온 손님을 웃으면서 맞이 한다.

아무도 나에게 강요하진 않지만 그저 당연하게 집안 전체가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

남편은 내가 힘들까 봐 틈틈이 나를 '돕고' 있긴 하다.

나는 내가 하지 못한 일을 생각하며 발을 동동 구르는데 반해, 남편은 자기가 한 일을 기억하며 뿌듯해한다는 점에서

그와 내가 받아들이는 가사노동의 무게감이 확연히 다르긴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이를 인지하지 못한다.

화를 꾹꾹 눌러 담고 골이 나 있는 나를 보며 나름의 노력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저도 서운해한다.

그럴 때면 잠시 화제를 돌리고 근처  카페라도 가서 바람쐬야 한.

누구의 잘못도 아닌 이런 일로 싸울 수는 없다.

신념으로 사람을 때리면 그건 신념이 아니라 혐오일 뿐이다.

시간이 필요한 일에 화만 내서는 달라질 것도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앞으로 다가올 일을 떠올리며 내가 받아야 할 화를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지금은 참아야 할 때라는 약간의 계산도 한다.


그다음 날이 되면 남편과 나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뀐다.

남편은 화가 나고 나는 그를 다독인다.




우리 부모님은 자식들에게 헌신함으로써 자식들을 통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자식들이 올 때마다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다 먹지 못하면 '이 아까운 걸 누가 다 먹겠냐'며 억지로 다 먹게 하는 그로테스크함이랄까.

부모님 스스로도, 자식들에게도, 속이 부대끼게 먹어내도록 요구하면 그 요구대로 그 음식을 다 먹는 자식은 우리 삼 형제 중에 나밖에 없다.

그것이 아마 문제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의 요구에 그나마 잘 부응하던 나의, 남편은 우리 가족의 신입사원이다.


부모님은 집안의 궂은일은 아들 대신 남편을 시킨다.

가족들이 모일 때면 운전부터 밤새 술 거드는 일에 술기운에 거나해진 아빠와 형부를 대신해 술 상 치우는 일까지 죄다 남편의 몫이다.

아, 멀리 시집가는 언니의 결혼식 손님을 모시는 버스에서도 할 일을 내팽개치고 먼저 가버린 부모님 대신 남편과 내가 동네 손님을 쳤다.

남편은 새벽 6시부터 흔들리는 버스에서 소주를 나르고, 블랙커피만 드신다는 어르신을 위해 믹스커피의 프리마를 골라내야 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결혼한 지 한 달만의 일이었다.


아빠가 여행 가고 싶다고 해서 여행을 모시고 가려고 하면 하루에도 서너 번씩 변덕을 부려 계획이 와해됐다가, 또다시 가족이 화합하지 않는다고 서운해하면 그 마음의 짐은 고스란히 나와 남편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

어렵사리 시간 내어 자리를 마련하면 우리 가족은 모여서 자기 욕구를 채우기 바쁘다.

뽐도 내야 하고, 훈계도 해야 하고, 일하지 않으면서 배는 채워야 한다.  

땀을 뻘뻘 흘리며 수발드는 남편은 그들의 손발이 되는 것도 모자라 자신들의 우월감을 증명할 감정 받이도 돼주어야 한다.

밤낮없이 수발들다 남편이 지쳐 쓰러지기라도 하면

아빠는 도대체 뭐가 힘드냐고, 왜 아프냐고 핀잔을 주고, 

언니는 이러면 자기 신랑이랑은 누가 놀아주냐고 철없이 투정을 부린다.

습관적으로 신경질을 내거나 버럭 화를 내고는 자기들은 잘 모른다.

그 화를 받은 남편만 오래도록 속앓이를 할 뿐이다.


가만히 있지 못하게 잔소리하면서,

시키는 대로 하는 족족 쫓아와서 구박,

그마저도 잘하지 못한다고 핀잔,

잘하지도 못하면서 왜 나서냐고 구박,

습관적 빈정거림,

 아빠는 그런 식으로 자기만의 즐거움에 목소리를 높이고 어린아이처럼 외로웠던 시간을 보상받길 바란다.

남편이 궂은일은 궂은 일대로 하고도 그 수모를 당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아직 애가 없고, 만만하기 때문이란다.

나는 아빠에게서

수십 년 전 그만둔 회사에서부터 인지, 아득한 젊은 시절 군대에서인지, 외로이 혼자 생계를 꾸려나갔던 어린 시절에서인지, 회복할 수 없이 일그러진 직장 상사의 모습을 본다.




애초에 남편이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나는 우리 가족의 부풀린 자기중심적 면면을 잘 알고 있었기에 성인이 되고부터는 웬만하면 가족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으려 했다.

그러나 남편은 나의 그 규칙을 흔들어버렸다.

겪어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현상을 그는 이해하지 못했다.

남편은 돌아가신 아버지를 가슴 깊이 품은 아픔에, 훗날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내가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지 못한 것을 후회할까 봐 걱정했다.

내가 혼자 남은 시어머니나 돌아가신 시누이의 딸과 시간을 보내는 날이 많다는 마음의 부채감에,

나보다도 더 나서서 우리 가족을 챙겼다.

그렇게 명절 때든, 생신 때든 나서서 우리 가족의 수발을 들고 나면 한 달은 화병에 시달렸다.

덩달아 나도 남편 쫓아 가족들 챙기랴, 화병 난 남편 감정 받이 되랴, 화병에 시달렸다.


그렇게 어언 5년,

 그도 이제는 내 규칙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밤새 술을 받아도 좋고 잔소리도 다 참을 수 있고 잠시도 쉴틈을 주지 않는 아빠의 수발도  수 있지만, 습관적인 인신공격은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일손 하나 보태지 않으면서 친정에 오는 족족 우리가 나들이도 데리고 가줘야 하고 애도 봐줘야 하고 밤새 술상도 챙겨줘야 하는 언니네도,

중요한 일마다 쏙쏙 빠져나가는 막냇동생도,

이제는 더 이상은 힘들다.


그저께 부모님께 전화를 드렸다.

자식 같아서 그랬다는 말에

사위는 당신의 자식이 아니라고 말씀드렸다.

편해서 그런다는 말에

편하다고 해서 사람을 함부로 대해서는 안된다고 말씀드렸다.

좋아서 그런다는 말에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모욕감을 줘서는 안 된다고 말씀드렸다.

되려 화를 내고 서운해하는 아빠에게

나도 사위도 지금 많이 힘들어하는 상태이며 당분간은 사위를 집에 데려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지난 일들은 이혼사유에도 해당되는 심각한 일이라고 말씀드렸다.


나의 괴로움은 가족들의 아픔이기도 하지만,

불안이자 분노이자 원망이기도 하다.

그들은 혼란을 감당하지 못하고, 왜 조금 더 견디지 못하냐고 화냈다가, 가족의 욕망을 더 충족시켜주지 못한 데에 대해 서운함을 표한다.

가족은 내가 힘들 때일수록 멀리하고 싶은 사람들이다.

이제 방법이 없다.

아무리 말해도 문제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분리만이 답이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남편은 이제야 나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왜 그렇게 힘든 일들을 가족과 나누지 않고 혼자 짊어지는지, 타인에게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 왜 자신에게는 그렇지 못한 지, 왜 그렇게 사람들을 두려워하는지, 이제 이해한다 했다.

그는 나의 모든 취약함을 끌어안아 주었다.

아마 그가 내 입장이었다면 자기는 살아남지 못했을 거라 위로 아닌 위로를 한다.


20살 넘어서면 부모님 원망하는 짓은 그만두고 내 앞길은 내가 꾸려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30을 훌쩍 넘긴 아직도 가족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건 쉽지 않다.

이럴 땐 유전자가 모든 걸 결정한다는 진화심리학적 운명론이 내 이야기만 같아서 서글프다.


가족의 자기중심적 성향대로,

자신의 이익에 따라 변덕스러운 신념을 가지고

마치 그 신념이 대단한 진리인 양 타인을 통제하기를 즐기며 

주로 신경질적이지만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는 그런 성향을 가진 사람이 될까 봐

나는

병적으로 화를 참는다.

모든 문제는 내 탓으로 여긴다.

빨리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내가 혹시라도 그런 못난 모습을 할까 봐 점검하고 또 점검한다.

그러니 늘 가족을 감당하고, 또 가족을 지워내려는 이중고에 시달린다.


내 인생을 압도하는 그 노력들은 결국 나를 피해자의 전형으로 만들어 냈다.

생존력이 뛰어난 인간은 간 보며 슬금슬금 침해하는 습성이 있고,

그 선을 넘어서면 더 이상 그 사람의 감정은 안중에도 없어진다.

그들은 나를 가장 단순한 단어로 정의하고, 조롱하고, 비하해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고 행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들은 선택적 기억과 거기에 끼워 맞춘 좌뇌의 거짓말로 자신을 변호하며 살아간다.

화를 내지 못하는 나는 그들의 자기애를 통통하게 키우는 거름진 토양이다.

군주론에서 마키아밸리는 인간은 선천적으로 이익을 좋아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비단 재물의 이익이 아니라 심리적 이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타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위를 확인받고 자존감을 세우는 이익이 그런 것이다.


가족의 연은 생각보다 나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다.

그들은 나를 살찌웠고 나를 키워냈다.

동시에 나를 괴롭히고 구속했다.

가족들에게서 끊임없이 들었던 말은 그들이 옆에 없어도 매 순간 모든 선택에서 귓가에 울려 나를 조종한다.

라깡이 아기가 처음 태어나 세상의 모든 것을 자기의 일부로 여기는 상상계를 지나 언어와 규칙의 세계인 상징계로 이행할 때 그 틀의 근간을 이루는 법을 Father's law라고 명명한 이유가 이것일까.

이제는 내 귓전 등을 울리는 비난의 목소리를 분별하고

과거의 나와 인연을 끊어야 한다.

내 감정을 조금 더 믿고, 때론 과감한 판단도 내려야 하며, 조금 더 자주 '아니'라고 말해야 한다.


마이클 싱어는 명상을 하기 시작한 이유로

끊임없이 머릿속에서 지껄이는 아무 의미 없는 생각의 목소리를 지우기 위해서라고 했다.

정보가 차고 넘치는 세상에서는 더 이상 빠르고 많은 정보가 승리의 기를 쥐어줄 수는 없다.

이미 인공지능 투자자들은 3분이면 전 세계의 트위터를 분석해 결단을 내릴 수 있다.

이제 많은 CEO들은 정보를 줄이고, 선별하여, 집중하기 위해 명상을 하라 권한다.

명상까지 갈 것도 없다.

미국 국방부에서는 전두엽을 자극해 명상과 비슷한 수준으로 뇌의 역량을 끌어올리는 기술을 이미 가지고 있다.

전두엽을 단련시켜야 한다.

전두엽을 단련시켜 태도를 바꾸어야 한다.

태도는 타인의 말 한 조각을 모방한다고 바뀔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태도는 내가 살아 모든 시간이 풍기는 아우라다.

논리가 로고스고, 감정이 파토스라면,

태도는 내 인생 전체의 윤리관을 드러내는 에토스다.

에토스를 지키기 위해 가장 경계해야 할 것은 분주함이다.

가족의 불안함이 내 머릿속에 꽂아 넣은 생각과 의무를 멀리 해야 한다.


익숙한 대로 산다는 건 가족의 관습에 의존하여 산다는 것과 다름없다.

대한민국 성년들이 회사나 조직 국가의 그늘에 자신의 미래를 맡기고 싶어 하는 이유도 의존의 안온함을 누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그러나 의존이 더 큰 결핍을 낳는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부모님의 정서적 의존도

나의 관습적 의존도

평안한 가족의 온도에는 걸맞지 않다.


고로,

당분간, 효도는 그만하기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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