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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반장 Oct 01. 2021

담뱃불만큼의 불행

심상소생 心像蘇生

  여자는 소주방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소주방의 간판은 샛노랬고, 통유리는 흐린 시트지를 발라 의뭉스러운 분위기를 풍겼다. 나는 좁은 인도 한가운데 버티고 선 그녀가 갑지 않았다.  


길이라도 좀 비키지


피할 수 없이 집으로 가는 유일한 길. 여자를 둘러 가려는데, 욕설이 반토막 튀어나왔다. 두 번째 음절을 내뱉기도 전에 따끔한 감각은 쓰라린 아픔으로 변했다. 새끼손톱만 한 화상이었다.


그녀가 담배를 털며 날아간 담뱃불이 내 오른쪽 쇄골에 꽂혔다. 속옷 안으로 재가 떨어지고 식지 않은 불이 젖가슴을 따갑게 데웠다. 온몸에서 재떨이 냄새가 났다.


여자는 호들갑을 떨었다. 소주방 안으로 나를 데려가 천연덕스럽게 내 가슴을 털고 오만 원을 내밀었다. 잠시 과실치상으로 고소를 할까 고민했지만, 오만 원 연고 값에 재떨이가 된 기분은 무엇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순간 나는 내 인생이 그 무엇으로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사는 게 엿같았다.



유독 지치는 나날들이었다.


곱게 원피스를 차려입은 치매 어르신은 오늘도 남편과 집을 나섰다 길을 잃었다. 이제는 남편도 치매라 한다.  경찰의 생리에 빤한 아이들은 집을 나서자마자 핸드폰을 끈다. 찾는다 한들 먹고살기 바빠 폭언이 학대인 줄도 모르는 부모에게 곱게 돌아갈 리 없다. 돼지 머리를 삶아놓고 사라져 버린 전전세 세입자도, 술만 마시면 개가 되는 호인도 그 사정을 알 바 없다. 전과 20범이 넘는 할머니는 또 을 훔쳤고, 구운 계란을 훔쳐 징역살이를 한 노인은 평생 700만 원 남짓한 음식을 훔쳐 12년을 감옥에서 살았다.


가난은 어찌 그리 뻔뻔한가.

가난한 자는 돈이 없어 시간이 없고, 시간이 없어 사람이 없다. 사람을 잃으면 고독해서 술을 찾고 만성적으로 병을 앓는다. 가난하면 배움이 얕고, 그 누구도 배움이 중요하다 알려주지 않는다. 책상에 앉아 배우고 익힐 여유가 없는 이가 자기 안의 힘을 단단하게 발효시킬 리 만무하다. 질긴 가난은 고통의 감각도 질식시킨다. 세상에서 가장 아픈 사람은 아픈 줄도 모르고 아픈 사람이다.


가난은 인간을 잡아먹는다. 가난한 자가 살아 숨 쉬는 창문 없는 단칸방 공기에는 죽음의 냄새가 난다. 살아서도 희망 없는 사소한 불편함들이 모두 죽음의 냄새다. 무지한 인간은 곧잘 단조로운 시선으로 가난한 자의 이름 없는 불편함 들을 멸시한다. 그러나 인간은 누구든 가난할 수 있고, 언제고 고독할 수 있다. 보자기만 한 시야로 타인을 멸시하고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마음은 얼마나 부박한가. 건강보험료 고지서에 놀라 20년 전 집나간 딸을 찾는 어미가 마뜩잖으면서도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는 나는, 어찌 이리 뻔뻔한가.


판잣집을 깨끗이 치우고 사라진 남자의 청년 적 사진을 보았다. 멀끔한 청청 패션에 장발 헤어, 말상의 얼굴형이 어우러져 미소가 멋지다. 그는 알았을까. 그의 60년 인생의 끝에는 핸드폰을 두고 사라져도 일주일 넘도록 그 사실을 알아채는 사람조차 없을 거라는 것을. 새파란 청년이 외로운 중년이 되기까지 매 순간 새로운 가능성이 중첩되어 삶의 이야기들이 크레페 케이크처럼 쌓였어도, 궁금해 할 이가 누가 있을까.

이제 바닥이 드러났다.


지난 몇 달간 사람을 너무 많이 만났다. 책을 읽는 사람들과 함께 3개의 문화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더 많은 사람들을 끌어들여 모임을 진행했다. 이제껏 쓴 보고서가 50페이지에 이르고 아직 그 여정은 끝나지 않았다. 삶을 욕심내는 사람들과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가는 건 의미 있지만 체력 소모가 많았다. 익숙지 않은 온라인 환경에서 참여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 또한 만만치 않았다.


지난 몇 달간 변동도 많았다. 예기치 못한 불운이 여론을 점화하여 조직은 국민들의 원성을 샀다. 청년의 죽음을 둘러싼 음모론이 수사의 전문성에 대한 오래된 의심을 겨냥하고, 너도 나도 겪었다는 억울한 경험들은 윤색되어 끊임없이 새로 태어났다. 조직은 결단을 내렸다. 업무 자체를 여성청소년과 에서 형사과로 이관해 버린 것이다.


몇 번의 의견서와 분석 자료가 오가고 계획안을 거쳐 계획서가 나오기 까지, 팀원들과 사뭇 다른 위치에 있었던 나는 혼자서만 38선을 가랑이에 끼고 고무줄놀이를 하는 기분으로 최후의 날을 기다렸다. 최후의 날, 홀로 본래 과에 남아 어중간한 업무 폭탄을 떠안게 된 지 2시간 만에, 인복인지 일복인지 모를 기막힌 운을 타고 팀원들과 함께 과를 옮겼다. 과장님은 사무실에 들러 축하를 전하고는, 나지막이 진정한 승자는 나라고 했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휴직한 내가 따가운 시선을 타개하고는 경찰의 꽃인 형사과로 갈 것이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모든 변화는 힘들다. 매일 보고해야 할 양이 5배로 늘었고, 100여 명의 단체 대화방은 매일이 비상이다. 단위가 클수록 보고는 촘촘하고 간부들은 궁금한 것이 제각각 많아 일을 하고 있어도 전화벨은 계속 나를 다그쳤다. 툭하면 뿅 하고 일이 이루어지길 바라는 사람들 앞에서 친절한 태도를 유지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렇게 치이다 보니 막다른 길에서 타인의 사정에 내 품을 내어주기가 힘들어졌다.


나는 가난을 모르는 이들을 시기하기에 이르렀다.

더 나은 삶을 기약하고 가진 것을 내세워 노력할 줄 아는 이들, 문화와 예술의 향취에 젖어 때론 타인의 고통을 애석해하고 품위있는 정의를 주장하는 이들, 아름다움을 동경하고 티 없는 미소를 사람들과 나누는 이들의 정당한 권리를 시기했다. 그들과 나를 분별하여 인생은 왜 이리 불공평하며 하찮은가, 하는 감상에 자주 젖었다.


퇴근할 때면 가슴이 아리고 시큰해서 알싸한 소주 향이 목구멍에서 혀까지 타고 올라왔다. 오늘은 기필코 읽고 쓰리라 했던 다짐은 쉬이 잊고 술을 찾았다. 하루가 다급하게 스쳐 지나가 미처 따라잡지 못한 잉여물들이 덩굴식물처럼 나를 포박했다. 이것은 숙취인가, 공허인가.

보자기 공예 포장, 예술적 체험으로 승화한 환경보호 방식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에서 거트루드 스타인은 말한다.

인간은 죽음을 두려워하고
우주에서 우리 위치를 묻죠.
예술가의 책임은 절망에 굴복하지 않고
존재의 공허함을 채워줄 해답을 주는 거예요. 표현이 힘 있고 명확해요.  
패배주의자처럼 굴지 마요.


이 말을 듣기 전까지 주인공은 소설을 쓰고 싶은 꿈과 영화 시나리오 작가로 인정받는 현재의 커리어 사이에서 갈등했다. 거트루드 스타인은 애매하게 구는 그의 태도를 단번에 알아차렸다. 그는 선택을 해야 했다. 예술가는 더 고양된 사상을 배태한 작품을 욕망하기 마련이고, 그러한 기질은 속세에서 미친놈 취급받기 십상이다. 더더구나 바람난 약혼녀부터 그 부모까지 모두 허영에 찌들은 가운데 그 혼자 순수한 예술을 부르짖는다면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하다. 미쳐서 죽거나 굶어 죽거나 자연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명 앞에서 주인공이 해야 할 일은 패배주의를 벗어 던지고 진솔하게 삶과 마주하는 태도였다.


가난이 두렵고, 생존이 고단하다고 해서 패배주의에 젖을 필요는 없다. 인간은 언제나 전리품으로 무엇을 취할 수 있을지 고민하지만, 진정 고민해야 하는 것은 삶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가이다. 대추나무처럼 열매를 맺으면 열매를 나누고 삼나무처럼 열매 없이도 사시사철 푸르다면 진정한 자유, 아자드로 살면 된다. '월든'에서 소로가 그랬다. 인간에게는 진실을 재는 기계가 필요하다고. 진실을 제대로 보면 미리 절망할 이유가 무엇이 있을까.


오랜만에 글을 읽고 생각에 잠겼다. 조급함을 걷어내고 타인을 시기하던 무상한 마음 바닥에서 심상(心像)이라는 사금을 캐냈다. 기억은 가연성이라 쉬이 불타 없어지지만, 심상은 수용성이라 피에도 녹아 있고 세포에도 녹아 있다. 오래 묵힌 글과 고뇌하는 체험이 만나 심상이 몽글몽글 솟아나면 양심이 뼈처럼 돋아 난다. 상상하지 않고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제대로 상상해야 한다고 심상이 힘주어 말했. 냉철한 지성을 갖추고 대담하게 상상하라고.


패배주의자처럼 굴지 말자.

패배할지라도 패배주의자는 되지 말자.

망망대해에서 5미터가 넘는 고기 뼈를 매달고 온 노인처럼, 패배하고도 다시 바다로 나가 고기를 잡자.


담뱃불에 데이면,

담뱃불만큼의 불운만 불행하면 되는 거다.

인생은 아무런 잘못이 없다.



Epilogue

오래도록 크리미 베개로 쓰던 <월든>을 드디어 다 읽었다.

(145) 참으로 맛깔스러운 저녁이다. 온몸이 하나의 감각이 되어 모든 숨구멍으로 희열을 빨아들인다.

(147) 내가 계절의 변화와 흘러가는 세월을 만끽하는 한 그 무엇도 내 인생을 짐으로 만들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읽어야 할 책이 많다. 어림잡아 500권도 넘는 책이 거실에 아무렇게나 쌓여 있다. 책방은 논외로 하고. 죽기 전에 이 책을 다 읽는 게 꿈이다.


기획 프로젝트 중 PM으로서 가장 몰입도가 높게 진행했던 온라인 독서모임 '밤이 선생이다'의 반응이 좋아 온라인 필사 모임으로 명맥을 이어가기로 했다. 매주 목요일마다 줌을 열어두면 한 시간 동안 각자 필사를 하고 한 시간 동안 필사한 내용을 공유하며 대화하는 어른들의 문화 놀이터 같은 개념이다. 누구든지 들어올 수 있고, 정해진 인원도 없다. 이 모임에서 한 동안은 '월든'의 문장을 필사하기로 했다. 손으로 꾹꾹 눌러쓰기엔 좋은 문장이 너무 많아서 디지털 필사로.


참고로 이전 '밤이 선생이다'는 한 달간 매주 수요일 줌에서 만나 1시간은 각자 독서를 하고(마치 구루미 온라인 스터디처럼) 1시간은 자기소개, 책 소개, 두 번의 독립서점 서점주 독서 멘토 강연을 진행하는 독서습관 형성 프로그램이었다. 책을 사랑하는 독서 멘토님의 강연이 생각보다 더 반응이 좋았다. 책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책 읽는 다른 이의 독서 루틴과 그가 익힌 영감을 탐험하고 싶은 가보다.


연기처럼 사라지는 순간마다 피어나는 시詩가 있고, 무심코 스쳤던 풀이라도 오래 보고 싶을 때가 있다. 한 겨울 새벽녘 시장 상인들이 피워놓은 불이라도 뺏어 쬐고 싶을 때는 사심 없이 그들에게 말을 걸고 싶다. 나른한 오후게으르게 한 문장씩 씹어 삼키다 식곤증에 졸음이 쏟아졌으면 좋겠다. 소로는 '월든'에서 자연은 나태를 비난하지 않는다고 했다. 숲 속에서 늘어지게 자다가 어슴푸레한 저녁쯤에는 억울한 게 많은 멧비둘기의 푸념이나 들어주고 싶다.


이번 주말엔 캠핑을 간다. 요즘에는 송충이나 노린재를 직접 보는 재미에 푹 빠졌다. 엉덩이에 노란 꽃 모양 치마를 걸친 듯한 귀여운 벌레도 있던데, 해충이라 했다. 이번엔 어떤 벌레를 만날지, 그곳의 새는 어떻게 지저귈지 궁금하다.

나만의 공간이라 생각했던 브런치에 괜히 안부를 묻고 싶다.


다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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