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모르잖아요 서로.
이동진 영화 평론가의 전설적인 한 줄 평 "상승과 하강으로 명징하게 직조해 낸 처연한 계급 우화"에 대해 "말을 꼭 그렇게 어렵게 써야만 하냐"며 불만을 토하는 여론이 꽤나 있다는 얘기를 어디서 전해 들었다. 이에 대해 혹자는 "교육이 잘못됐는지 요즘 애들은 책도 안 읽고 공부도 이상하게 해서 말귀를 못 알아먹는다"며 날선 비판을 하기도 한다더라. 나는 활자 중독에, 쉴 때 유튜브를 잠깐 보거나 나머지 시간을 대부분 글을 읽는 데 사용하는 사람인지라 이해하는 데 있어 별 어려움이 없었다. 오히려 저런 한 문장으로 영화 전체를 부감할 수 있는 능력에 속으로 조용히 찬사를 보냈다. 물론 그 평을 읽으며 '명징하다', '직조하다'와 같은 말은 잘 쓰이지 않는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명징', '직조'와 같은 말을 굳이 쓰지 않더라도 살아가는 데 큰 문제가 발생하지는 않는다. 나처럼 말과 글이 버릇인 사람도 굳이 저런 단어를 사용하지 않아도 문장을 만들어내는 데 큰 지장은 없을 정도니. 내 생각에도 아무리 쉬운 말로 바꾼다고 해도 이동진 평론가의 위대한 한 줄 평을 대체할 수는 없지만, "상류층과 하류층의 간격과 넘나들지 못하는 그 두 계층 사이의 복잡함을 너무도 간결하게 보여 준, 씁쓸한 계급 사회에 관한 영화"처럼 한 줄 평을 바꿔서 쓸 수도 있다는 데 크게 동의를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고 싶은 말을 오해의 소지 없이 전달하기만 하면 됐지, 말이 어려울 수도 있다는 점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기어코 잘 사용하지 않는 단어로 문장을 만들겠다는 의지는 '지적 허영심'에서 오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적인 의견을 내뱉는 사람도 왕왕 있다. 나도 간혹 지나치게 현학적인 어구로 읽으라고 쓴 글인지 분간이 안 가는 그런 문장을 만나면 당혹스러울 때도 있긴 하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생각이라는 의견도 존재한다. 나도 이에 꽤나 동의하는 바다. 어려운 말이란 특정 사람이 모르는 말에 불과하고, 본인이 잘 알지 못하는 말로 구성된 이야기니 입 밖으로 꺼내지 말라는 주장은 너무도 자기중심적이지 않을까. 만일 내가 "훈풍 아래 홀로 길을 걷다 보이는 풍경에 시나브로 갈마드는 시상과 통찰"과 같은 문장을 썼다고 하자. 하지만 말이 어렵다는 피드백을 반영해 "여름에 부는 바람 아래 혼자 길을 걷다가 보이는 풍경을 보고 무의식 중에 조금씩 번갈아 나타나는 영감과 아이디어"로 문장을 바꾼다면, 이 두 글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같을 말일까.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영화 '기생충'에 대한 이동진 평론가의 한 줄 평과 위에서 만든 나의 조악하기 짝이 없는 문장이 다를 수밖에 없는 것도 같은 이치다. "많이 좋아하다"와 "사랑하다"가 다르듯, "명징하다"를 "간결하게 보여주다"로 바꿔 쓰면 말도 달라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요즘 이러한 두 가지의 생각이 충돌하는 양상을 많이 접한다. "나는 이런 사람이니까 바꾸려고 하지 말고 협력하라"와 "그대는 문제고 틀렸으니, 고칠 줄 알아야 한다" 사이에서 벌어지는 뜨거운 논쟁은 늘 이목을 주목시킨다. 교감과 소통을 통한 상호보완보다 당장의 불편함과 분노를 모면하려는 태도,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결코 권장할 수 없는 자세다. 백성이 주인이자 실권자가 된 이상 대화와 양보로 조금씩 나은 내일을 만들기에도 바쁨에도, 이런 골칫거리는 해결의 실마리가 잘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젊은 층의 문해력과 어휘력 결핍에 관한 문제도 이 '갈라치기 갈등'의 카테고리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본다. 이것은 세대의 차이에서 빚어진 갈등문제이지, 젊은 층의 지적 수준 저하로 문제를 종결할 수 없는 것이다.
어휘와 문화에 대한 이해와 존중 문제는 젊은 층에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도 알아야 한다. 나는 심히 우려스럽다. 빠른 속도로 발전하는 IT 산업에 따른 변화와 문화 트렌드에 속도를 맞추어 살아가지 못하는 중장년층이 꾸준히 늘어나니 말이다. 점점 공고한 역삼각형 형태의 인구구조가 만들어질 테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새로움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니 변화에 발맞추어 따라가지 못하는 사람의 수는 계속 늘어가기만 할 가능성이 크다. 현재도 이미 키오스크 사용법이나 다양한 페이를 이용한 혜택 등의 서비스를 고령층은 쉽게 이해하고 적용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문학과 신문만 이해할 줄 알면 똑똑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치명적인 착각이다. 사회의 다양한 면은 이미 유튜브로, 틱톡으로, 인스타그램을 통해 많이 드러난다. 많은 기업이 신문에 무언가를 설명하는 기사를 싣기보다 자체적으로 각 플랫폼에 채널을 만들어 이를 통해 광고를 하든, 내용설명을 하든 한다. 언론사도 메인 뉴스 정도만 간략히 다루고 심층적으로 파헤치는 콘텐츠는 유튜브나 OTT 플랫폼에 업로드하는 경우도 많아지고 있는 추세다. 만일 이런 변화 경향을 모르면서 구시대의 유물만을 붙잡고 세상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을까.
즉 문해력, 어휘력 문제는 세대 갈등의 발로로 볼 수밖에 없다. 또한 이 문제는 앞서 언급했듯 젊은 층이든 고령 층이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적용된다. 나는 글에 집착하는 인간이니 최근 들어 젊은 층의 '반지성주의 태도'가 자주 눈에 밟히는 점에 대해 우려스러운 마음을 감출 수는 없다. 반면에 뉴 노멀에 대해 이해해 보려는 시도나 노력의 자세를 중장년층의 경우 얼마나 잘 취하고 있는지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서로는 세상에 대해서 무지하고, 서로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그것은 나도 마찬가지고, 여러분도 아마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넓은 그릇을 구축해 너그러이 상대가 느낄 새로움에 대한 불편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인간성이란 쉽게 갖출 수 없다. 그러니 우리는 겸손해질 수 있고, 겸허해질 수 있는 게 아닐까. 사회를 구성해서 살아가려면 무시하고 배격하기보다, 오래된 자에 대한 존중과 새로운 자에 대한 반가움을 늘 몸에 지니려 노력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길 수 있으니 말이다. '온고지신'이라는 말이 있다. 옛것을 익히고 그것을 통해 새로운 것을 아는 행위 또는 자세, 태도를 뜻하는 말이다. 공자라는 성인이 꽤나 오랜 옛날에 올드와 뉴의 가치를 중히 여겨 이런 말을 남겼다는 심오함에 대해 조금은 깊게 생각해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무지한 것은 잘못이 아니다. 여태 서울에서만 살다 도쿄로 유학을 가서 그들에게는 당연한 작은 행정처리 하나하나 어색하게 느껴져 당황했던 4년 전의 나는 문제였던 걸까. 아니다. 익숙지 않은 세상에 대한 두려움과 무지함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나약함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에 대한 수치심이 없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부족함을 부끄러이 여겨 조금이나마 나은 나를 만들고,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이 사람과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제일 중요한 덕목 중 하나다.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겸허히 여기며 상대의 결점도 최대한 너그러이 받아들이려는 마음가짐 또한 민주사회의 필수 항목이다. 따라서 문해력 문제를 거론하며 청소년을 싸잡아 깎아내리는 고령의 아무개도, 아저씨나 아주머니가 새로운 기술이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점을 두고 속칭 꼰대들은 역시 무식하다며 비난하는 젊은 아무개도, 상기한 관점에서 바라볼 때 도토리 키재기, 오십 보 백보다.
6년 정도 과거의 나는 '이지적'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같은 공간에서 공부하던 주변의 친구들은 모두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래서 나는 물었다. "미안한데 이지적이라는 말이 뭐야?"라고 질문했고, 이에 대해 친구는 "이지적이라는 건 뭐랄까, 이성적이고 지혜롭다고 할까나?"라는 식으로 대답해 줬다. 그래서 나는 '이지적이다'라는 말을 평생 잊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모르는 것을 물어봤고, 누군가는 알려줬다. 나는 성장했고, 그와 나의 유대감은 상승했다. 대체 여기에 어떤 문제가 있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