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만에 지수를 만났다. 할 얘기가 많아 보이는 지수는 카페에 들어서자마자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시켜놓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벌컥벌컥 마신 후 컵을 내려 놓으며 말을 시작했다.
"언니, 이제 진짜 못 살 것 같아."
지수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미를 찾기 위해 뇌는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지수는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다. 아픈 지수를 버리고 어느 날 남편은 시댁으로 들어갔고 이후 지수는 혼자서 7년 동안 힘든 시간을 이겨내야만 했다.
혹시 우울증이 재발한 것일까.
"언니, 6개월 전에 남편이 집으로 들어왔어. 처음에는 정말 잘해주면서 돈도 갖다주고, 어디든 함께 하더라. 근데 이번 추석이 지나고부터 다시 원점이야."
모든 사람들이 지수의 이혼을 바랐지만, 지수는 무슨 생각인지 이혼을 하지 않았다. 추석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7년 만에 사위가 왔는데 엄마가 외식을 하자고 했는데......"
지수가 운다.
"그 인간이 뭐라는 줄 알아? 7년 만에 사위가 왔는데 나가서 먹는 게 말이 되냐며 집에 와서 난리를 치는 거야. 우리 집 가난한 거 아는데 엄마가 나를 위해 조금만 배려해 줬다면 어땠을까 하며 원망스러웠어. 남편과 잘해보려고 했는데 엄마가 다 망쳤어."
지수가 서럽게 운다. 지수 엄마도 몇 년 전 큰 수술로 돌아가실 뻔했다. 그때 지수는 자신이 아프다는 이유로 모른 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자식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젊은 날 누구보다 올곧은 생각으로 야무지게 일처리를 해내던 지수는 어디로 사라진 걸까.
지수가 두려워하는 것은 뭘까. 이혼녀라는 딱지가 두려운 것일까. 잘못된 선택을 반복해서 하고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지수를 볼수록 마음이 아린다. 남 탓을 하며 지금 이 상황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지수의 모습이 안쓰럽다. 30대 당당하던 그녀가 보고 싶다. 인생이 길어졌음에도 지수의 시간은 멈춰있는 것 같다.
지수가 한 말 중에 뇌리 속에서 떠나지 않던 말 '부모라면 당연히 자식이 잘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하는 거야. 우리 부모는 부모 자격이 없어. 나는 맏이라서 평생 희생하면서 살았는데 부모는 아니었어.' 지수는 억지를 쓰고 있었다. 지수네가 어렵게 살았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곁에서 오랫동안 지켜본 나는 안다. 누구보다 지수 부모님은 열심히 삶을 살아내셨다.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셨고, 자식들을 어떻게든 더 가르치려고 노력하셨다. 가난한 집 맏이라서 희생해야 하는 부분은 있었겠지만, 사랑까지 의심하는 지수가 안타까웠다.
부모는 자녀가 성인이 될 때까지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지지해주어야 하는 것은 맞다. 다만, 마흔이 넘은 자식에게까지 지속적으로 해야 할 의무는 없다. 해줄 수는 있는 부모라면 더없이 감사하겠지만,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인생의 반을 살아보니 알겠다. 이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며 살아갈 뿐이다.
성인이 되어도 정신적, 물질적으로 독립하지 못하는 것은 누구의 잘못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