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들이 많아 계속 사랑에 빠지는 곳
S언니가 떠났다. 언니는 “앞으로 필요할 수도 있다”며 각종 조미료와 전기장판, 가위 등을 내게 주고 한국으로 떠났다. 다시 혼자 남게 된 나는 달링하버쪽으로 하염 없이 걸었다. 행복한 표정으로 거리공연하는 이들이 눈에띈다. 참 달달하다. 달링하버쪽을 걷다 조깅 중인 이민자에게 길을 물었다. 그녀는 나에게 “여행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시드니가 참 좋다. 떠나고 싶지 않다. 이곳에 사는 당신이 참 부럽다.” 그녀는 “나도 이곳의 시민인 게 자랑스럽다”며 “호주는 축복받은 땅이다”고 맞받아쳤다.
문득 ‘내가 호주에 태어났다면 참 좋았을텐데’라고 생각했다. 천연자원이 풍부한 호주 정부는 국민들에게 다양한 복지혜택을 제공한다. 불법 캐쉬잡이 아니라면 최저시급은 무려 18.93 호주달러다. 누구라도 노력만 하면 정당한 노동의 대가를 받을 수 있는 곳이다.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곳이 바로 여기 호주다. 다시 오페라하우스로 발길을 돌렸다.
수차례 방문했지만 여전히 사무치도록 좋다. 특정 장소에 이토록 반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다. 과거 남들이 찍은 몇컷의 사진으로 이곳을 판단했던 내가 한심했구나란 생각마저 스친다. 하버브릿지 앞으로 갔다. 오페라하우스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고 싶었다. 바로 앞 한국인 커플이 눈에 띈다. 민망하지만 언제 떠날 지 모르니 사진을 찍어달라고 했다. 멀끔하게 생긴 젊은 남성이 흔쾌히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는 몸을 이리저리 돌려가며 여러번 셔터를 눌렀다. 타지에서 이런 배려를 받으니 감동이 폭풍처럼 밀려온다. 그렇게 셋이서 셀카까지 찍고 페이스북 친구까지 맺게 됐다.
오페라하우스쪽으로 걷다가 오른편의 로열보터닉가든에서 미세스포인트로 향했다. 오페라하우스와 하버브릿지가 절묘하게 겹친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다. 이곳에서 아름다운 석양을 찍겠다고 기다리는데 휴대폰 밧데리가 제로를 향해 간다. 급한대로 노트북에 USB 케이블을 연결해 스마트폰을 충전했다. 그 상태에서 노트북 뚜껑을 닫아버렸다. 아뿔싸. 노트북 액정이 나가있다. 가난한 장기여행자의 울고 싶은 순간이다. 그 와중에 선셋은 왜 이렇게 아름다운지 모르겠다.
다시 써큘러키역으로 돌아가려고 하는데 왔던 길이 막혀 있다. 설상가상 비까지 내린다. 이제 한국으로 갈 때가 된 건가 싶어 서글퍼진다. 그런데 한 남자가 나타나 우산을 씌워주고 길까지 알려준다. 백마탄 왕자님이 아닌 그는 이곳에서 쉐프로 일하는 인도 출신의 남성이다. 그의 아버지가 광부고 다른 가족은 퍼스에 산다고 했다. 그는 시드니에서 5년 차 거주 중이고 레스토랑 쉐프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시드니 is 뭔들’의 나는 “좋겠다”며 부러워했다.
그는 시드니는 “기회가 많은 땅”이라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그는 “호주가 인도와 달리 정부가 부패하지 않아 좋다”고 했다. 그는 사심 없이 지하철 플랫폼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세상에 좋은 사람이 많은 건지 이곳에 좋은 사람이 많은 건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숙소로 돌아갔다. 노트북 멘붕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나는 또 한번의 좌절에 맞닥뜨린다. 백패커하우스에 도착했더니 자물쇠 열쇠가 없어진 거다. 한달 넘게 잘 썼던 자물쇠인데 허무하기 짝이 없다.
직원한테 사정을 설명하니 쿨한 목소리로 문제 없단다. 그리고 재빨리 커다란 도구를 가져와 번개처럼 자물쇠를 부순다. 그리고 씩 웃으며 말한다. “기념품으로 가질래?” 잘생긴 얼굴에 이런 위트라니. 매번 빠져든다. 호스텔 공용공간으로 가 소파에 앉았다. 독일에서 왔다는 할머니가 옆자리에 앉아 있다. 호주에 친척이 있다는 그녀는 매년 호주에 방문해 한달 정도 여행을 한다고 했다. 호주에서 가보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다. 호주에서 진주 채취하기 좋은 곳까지 알려준다.
이런 쿨한 인생이 다 있나 싶다. 지금껏 미혼이라는 할머니에게 “결혼하지 않은 걸 후회한 적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결혼을 했다면 이렇게 살 수 있었겠냐”고 되묻는다. 그녀는 주변에 자신과 같은 미혼 친구가 많아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다고 했다. 그녀는 자유가 좋다고 했다. 그렇게 그녀의 호주 여행기에 빠져 들었다. 그렇게 하루가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