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아닌데, 왜 울컥했을까

감정을 잃은 돌봄자

by 나아선




오늘도 어김없이 정신없는 저녁 시간이 시작되었다.
놀이터에서 집에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겨우 달래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숨 돌릴 틈도 없이 주방으로 향했다.

밖에서 뛰어놀다 온 아이들은
샤워를 마치자마자 곧 배고프다며 주방을 기웃거릴 것이다.
나는 서둘러 밥을 안치고, 재료를 썰며 저녁을 준비했다.

그러던 중, 아이가 실수로 물을 엎질렀고
엉킨 전선 사이, 놀이매트 아래로 물이 빠르게 번져갔다.
순간, 내 안에서 무언가 툭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왜 하필 지금 이러는데에!”

나는 발을 동동 구르며 양손으로 머리카락을 붙들었다.
아이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그제야 정신이 들어 “괜찮아? 다치지 않았어?” 하며 아이들에게 사과했지만,
정작 나는 괜찮지 않았다.

아이들 앞에서 미숙한 모습을 보인 데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이 몰려와 스스로를 탓하며,
마루와 놀이매트 사이에 넓게 퍼진 물기만 말없이 닦아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은 가스불 위 끓고 있는 냄비, 재워둔 고기,
물에 젖은 아이들의 머리카락, 뒷정리되지 않은 욕실,
끝나지 않은 숙제와 아이들의 취침 시간 등으로 빙빙 돌았다.

복잡한 마음 한켠에서 울컥, 눈물이 차올랐다.

별일 아닌 일이었는데 왜 이럴까?
아이들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 되는데, 왜 그랬을까?
다들 하는 일인데, 왜 나만 이렇게 버거운 걸까?

혼란스러웠다.
답을 찾기 어려웠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울컥함은 분명 나의 감정인데,
왜 이렇게 낯설고, 왜 이렇게 설명하기 어려운 걸까?

말할 수 없었던 감정은 결국,
말이 되지 않은 채 내 안에 가라앉았다.

이 혼란은 비단 나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퇴근 후 집으로 돌아온 부모, 전업 육아 중인 엄마, 혹은 할머니까지.
돌봄과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은, 주로 감정에 침묵하기를 요구받는다.

화내는 건 예민하다고 했고,
엄마라면 참아야 하는 것이라 배웠다.
힘들다고 하면 다들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들은 언제나
감정을 말하려는 시도를 효과적으로 제압했다.

‘이런 말 하면 내가 유난스럽게 보일까?’
‘이 정도는 참아야 하는 건가?’
‘혹시 내가 너무 나약한 건 아닐까?’

감정은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몇 번이고 부정당하고 삭제된다.
그 감정들을 드러내는 순간
신경질적인 아내, 게으른 주부,
자격 없는 엄마처럼 보일까 두려워진다.

다들 잘만 버티는 것 같은데, 나만.
다들 밝고 현명한 것 같은데, 나만.
끊임없이 나에게서 문제를 찾고, 검열한다.
감정이 불편한 것이 아니라,
그 감정을 느끼는 나 자신이 불편해진다.

결국 감정을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를 길들인다.
요동치는 감정들을 안으로 쓸어 넣은 채
표정을 감추고, 말을 줄인다.

그러나 정말, 그 감정들은 잘못된 것일까?
가사노동과 돌봄을 하는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는 건, 왜 문제가 되는 걸까?

가사노동은 그저 몸으로만 하는 일이 아니다.
그 안에는 수많은 감정이 있다.
억제된 짜증, 삼켜낸 분노,
사라지지 않는 외로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덮어놓았지만, 그 아래에는 오래된 피로가 있다.

그 피로는 말해지지 않았고, 설명되지 않았으며,
결국 이해받지 못한 채 침묵 속에 묻혔다.
도대체 이 오래된 감정의 억압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오랜 시간 동안, 돌봄과 가사노동에 있어
감정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가정과 사회가 문제없이 돌아가기 위해서는
돌봄을 맡은 사람이 감정 없이 기능해야 한다.

누군가가 화를 내거나, 좌절하거나, 침대에 우울하게 누워 있으면
밥이 만들어지지 않고,
아이가 챙겨지지 않고,
입을 옷이 준비되지 않는다.

즉, 돌봄을 맡은 사람이 감정을 드러내는 순간 일상 전체가 흔들린다.

그래서 우리는 돌봄을 희생으로 여겨왔다.
감정을 표현하는 것은 이 희생의 미덕을 해치는 일처럼 여겨진다.

슬퍼도, 힘들어도, 화가 나도
내색하지 않고 참는 사람이
좋은 엄마, 좋은 아내, 좋은 돌봄자로 칭송받는다.

반대로, 돌봄을 맡은 이가 기분에 따라 일을 거부하거나
불만을 표현하면 불안정한 존재가 된다.

그래서 사회는 이들을
조용하고 온화하며, 예측 가능한 사람으로 유지하려 한다.
이 요구는 명시되지 않았지만, 무엇보다 강력하다.

그러나 감정을 억누르는 삶은 결국 사람을 무너뜨린다.
슬픔, 분노, 피로, 절망은 억압한다고 사라지지 않는다.
말해지지 못한 감정은 몸과 표정과 관계 속에 남아
예상치 못한 순간,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터져 나온다.

'감정 없는 돌봄자'라는 이상향은 애초에 실현 불가능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밥을 차리고,
눈물을 삼키며 바닥을 닦는 사람이
정말로 아이에게 안정감을 줄 수 있을까?

돌봄은 기능이 아니라, 감정이 깃든 관계다.
감정이 건강하게 표현되고 조율되는 경험 속에서,
아이도 감정을 이해하고 다루는 법을 배운다.

"아, 힘들 땐 쉬어야 하는구나."
"속상할 때도 있지만, 회복할 수도 있구나."
"엄마도 나처럼 인간이구나."

감정을 인정하지 않는 환경은
아이에게도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라는 신호를 준다.
결국 감정을 이해하지 못하고,
다룰 줄 모르는 아이로 성장하게 된다.
감정 없는 돌봄은 감정 없는 아이로,
다시 감정 없는 가족으로 이어진다.

그러니, 지속 가능한 돌봄을 가로막는 것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을 억압하고 침묵시키는 구조 그 자체다.

진정으로 안정된 돌봄과 건강한 가족을 원한다면,
먼저 물어야 한다.

지금 이 감정에
누가, 어떤 이름을 붙였는가.

'버겁다'는 감정에는 '무능함'이,
'괜찮지 않다'는 감정에는 '예민함'이라는 낙인이 찍혀 있다.
이 모든 이름 붙이기의 배경에는
감정을 허용하지 않는 구조와
돌봄을 기능으로만 여겨온 사회의 인식이 자리한다.

이제 우리는,
그 이름표를 두려워하며 감정을 억누르기보다
있는 그대로 마주해야 한다.
울컥한 눈물을 애써 감추기보다,
그 감정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귀 기울여야 한다.
그제야 비로소 인식과 회복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한다.

감정을 회복한다는 건,
단지 말하는 기술을 익히는 문제가 아니다.
그 감정을 온전히 나의 것으로 되찾고,
침묵을 강요한 구조에 균열을 내는 일이다.

그리고 마침내,
돌봄의 자리에 기능이 아닌 사람을 다시 놓는 일이다.



✍ 이 글은 『가사의 존재』라는 책을 준비하며 쓴 원고의 일부입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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