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과 에너지의 탈취
오늘은 꼭 글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아이들과 약속한 놀이 시간 전에 딱 한 시간만,
내 시간을 갖자고 다짐했다.
노트북을 켜고 커서가 깜빡이기 시작한 지 10분쯤 지났을까.
“엄마, 뭐 먹을 거 없어?”
간식을 챙기고, 음료를 타주고,
조잘대는 아이들 이야기를 들으며
어지러진 조리대를 치우고 돌아오니,
어느새 점심시간이 가까워 있었다.
밥을 안치고 감자를 씻으며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 두 줄을 되뇌었다.
식사를 마치자 설거지가 이어졌고,
아이들의 공부와 놀이 시간이 뒤따랐다.
그 사이, 건조기에서 익숙한 멜로디가 흘러나왔다.
꺼낸 빨래를 개다 말고, 소파 위에 쏟아진 과자 부스러기를 청소기로 밀었다.
잠시 뒤엔 저녁 밥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었다.
하루는 그렇게 흘러갔다.
노트북은 아침 그대로였고,
쓰고 싶었던 문장은 하루 종일 머릿속을 맴돌다 잊혀졌다.
분명 쉬는 날이었고, 시간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왜 하고 싶던 일은 늘 하지 못했을까.
집중력의 문제일까.
내가 게을러서일까.
그러나 이것은 나만의 문제가 아니다.
가사노동과 돌봄을 맡는 이들이
익숙하게 겪는 일상의 구조다.
시간은 분명 있었지만,
그 시간은 내가 온전히 쓸 수 있는 시간이 아니었다.
가사노동은 대부분 짧고 단속적인 과업들의 연속이다.
설거지를 하다 말고 아이를 씻기고,
청소를 하다 말고 택배를 받고,
요리를 하다 말고 싸움을 말린다.
하나의 일도 끝내지 못한 채, 늘 다른 일에 끌려간다.
이 단속성은 몰입을 차단하고, 성취를 어렵게 만든다.
집중은 시작되기도 전에 흩어지고,
에너지는 일 자체보다 전환에 더 많이 쓰인다.
할 일은 끝이 없는데,
무엇을 끝냈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이것이 첫 번째 탈취다.
집중을 방해하는 구조적 단속성.
가사노동은 본질적으로 연속성이 아닌 분절성, 주도성이 아닌 반응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생각을 이어갈 틈도,
자신만의 리듬을 만들 여유도 없다.
몸과 마음은 흩어진 시간에 휘말리고,
하루의 끝엔 무력한 피로만이 남는다.
두 번째 탈취는 시간의 주도권을 빼앗는 방식이다.
가사노동은 내 시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인의 일정에 종속된다.
식단을 짜고, 등하교를 준비하고,
필요한 옷을 빨고,
물에 젖은 욕실을 청소하는 그 어떤 일도
내가 정한 시점에, 내가 정한 순서로 이뤄지지 않는다.
그 시간은 언제나 타인의 필요에 반응해야만 하는 시간이다.
그러니까 시간이 없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시간은 있지만,
그 시간을 쓸 권한이 없다는 것이 진짜다.
시간이 있지만 내가 통제할 수 없다면,
그 시간은 사실상 내 것이 아닌 시간이다.
의지대로 흐르지 않는 시간은
나를 끊임없이 반응하게 만들고,
삶의 에너지를 조금씩 소진시킨다.
세 번째 탈취는 정서적 에너지의 고갈이다.
업무라면 위임하거나, 일정과 책임을 나누거나, 감정을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가사노동, 특히 돌봄 노동은 감정을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엄마, 왜 나 안 봐?”
“나랑 놀기로 했잖아.”
이 말들 속에는 단순한 호출이 아니라,
정서적 응답을 요구하는 관계가 담겨 있다.
눈빛, 말투, 표정 하나까지 감정의 진심을 담아야 한다.
우리는 이를 사랑이라 부르지만,
실제로는 매 순간 쏟아내야 하는 주의력과 정서적 에너지,
끊임없는 자기조절을 요구하는 감정 노동이다.
이 보이지 않는 노동은 외주화도, 분담도 쉽지 않다.
감정적 과로에는 숨 돌릴 틈조차 허락되지 않고,
그렇게 마음의 여력은 서서히 닳아간다.
네 번째 탈취는 회복의 구조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보통의 일에는 시작과 끝이 있고,
그 끝에 도달하면 쉼과 회복이 가능하다.
하지만 가사노동은 다르다.
일이 멈추지 않고,
쉼조차 대기 상태로 주어진다.
설거지를 마쳐도 누군가의 호출이 이어지고,
한 끼 식사를 마무리해도 다음 끼니 걱정이 시작된다.
아이들이 잠들어도 바닥에 널브러진 장난감이 기다린다.
무엇보다 피로한 건,
일이 끝나도 뇌가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혹시 빠뜨린 건 없나’,
‘샴푸가 떨어졌었나‘,
‘아이 숙제는 잘 챙겼나’ 같은 생각들이
쉬는 시간조차 일의 연장선으로 만든다.
가사노동에는 완결이 없고, 회복의 구간도 없다.
그저 다음 일을 위해 대기하는 구조 속에 놓여 있을 뿐이다.
반응을 멈추지 못하는 뇌,
경계를 지을 수 없는 쉼,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흐름.
피로보다 더 무서운, 회복 불가능의 구조다.
이 네 가지 탈취는
단순히 일상이 피곤하다는 말로 정리되지 않는다.
시간이라는 자원,
집중이라는 정신,
감정이라는 에너지,
그리고 존재로서의 주체성이
모두 빠져나가는 구조다.
왜 난 이렇게 멍해졌을까.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도저히 집중이 안 돼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너무 지쳐요.
아직도 수많은 이들의 공통된 호소를
그저 기분 탓으로만 돌릴 수 있을까.
가사노동은 단순히 시간을 빼앗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나로 하여금 집중하지 못하게 만들고,
회복하지 못하게 하며,
스스로를 믿지 못하게 만든다.
이것은 인지 자원의 탈진이며,
나라는 주체가 온전히 작동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구조의 결과다.
이것이야말로 진짜 탈취다.
시간의 탈취, 에너지의 탈취, 그리고 존재의 탈취.
그래서 결국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무언가를 하려 해도, 하지 못하게 된다.
글을 쓰고 싶고, 공부를 시작하고 싶고,
자격증 시험을 준비하거나 사회에 복귀하고 싶은 마음은 있는데,
막상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노트북을 펴지만 커서만 깜빡이고,
책을 펼쳐도 한 줄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준비물을 사두고, 강의를 수강 신청하고, 계획을 세워도
어느 순간 그것은 멈춘다.
그렇게 몇 번의 실패를 겪고 나면,
시작하려는 마음조차 꺼내기 어려워진다.
이 실패는 의지가 약해서도, 시간이 없어서도 아니다.
시간이 있어도, 이미 탈취된 집중력과 회복력,
그리고 감정의 소진은 몰입과 지속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이 구조 안에서는 아무리 애써도
자꾸 중단되고, 계속 좌절되며, 점점 스스로에 대한 의심만 쌓여간다.
결국 하고 싶던 일은 언젠가로 미뤄지고,
그 언젠가는 매일같이 도착하지 않는다.
가능성은 남아 있으나, 가능하지 않은 현실.
이것이 탈취의 가장 잔인한 결과다.
어떤 사람들은 이 구조 속에서도 무언가를 해내고,
사회에 복귀하고, 커리어를 다시 세운다.
또 누군가는 그런 이들을 보며
“어떻게 가능했을까, 왜 나는 그러지 못할까”
자책하듯 되묻는다.
그 차이를 의지나 성향에서 찾으려는 경향도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개인의 결심만으로 설명되기 어렵다.
그 뒤에는 삶을 지탱하는 기반, 협력적인 파트너십, 외부 지원의 유무,
축적된 자기 자원, 감정과 시간을 유보한 선택들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우리는 누가 해냈는가만을 볼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어떤 구조가 있었고,
무엇을 감내해야 했는지를 함께 보아야 한다.
의지를 가졌다고 해서, 탈취의 구조 위를 날아다닐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탈취는 시간을, 에너지를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도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방식으로 중단되고,
좌절되며,
자신을 조금씩 잃어버린다.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도,
무언가를 하려 했지만
그 일을 끝내지 못한 채
지친 마음으로 스스로를 탓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당신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당신이 게으르거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당신 역시 이 탈취의 구조 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 이 글은 『가사의 존재』라는 책을 준비하며 쓴 원고의 일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