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내 이름이 그리웠을까

기능으로 대체된 존재

by 나아선




엄마들끼리, 대단한 모의라도 하듯
“우리, 이제 서로 이름으로 불러볼까?” 하던 순간이 있었다.
그 말에 나는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 내 이름을 처음 불렀을 때는 어색하고 쭈뼛했지만,
왠지 모르게 마음 한켠이 일렁였다.
마치 작은 일탈이라도 한 것처럼, 심장이 근질거려 웃음이 나왔다.

누구 엄마, 누구 아내… 틀린 말은 아닌데,
무엇이 우리를 그 은밀한 반항으로 이끌었던 걸까.
닳고 닳은 그 이름이 왜 그토록 낯설면서도 반가웠던 걸까.

돌이켜보면, 한때는 매일 듣던 이름이었다.
누구든 자연스럽게 불렀고, 나도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내 이름은 일상에서 거의 사라졌다.
누가 내 이름을 마지막으로 불러줬는지조차 가물가물하다.

나는 그 이름이 그리웠던 걸까?
아마 그랬던 것 같다.

요즘 나는, 대부분의 대화 속에서 ‘그거 좀’으로 불린다.
“내 바지 빨았나?”
“엄마, 린스가 안 나와.”
“소화제가 있었던 거 같은데.”

불리는 건 분명 나인데, 내 이름은 그 어디에도 없다.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이름 대신 문화적 호칭이 따로 있고,
매일 마주하는 사이에서는 말줄임표가 늘어나는 법이다.
그런데도, 언제부터인가 이름 없는 삶 속에서 허전함을 느낀다.

나를 부른 것 같은데, 내가 불린 게 아닌 기분.
수없이 불리고 있으면서도, 아무도
나를 찾지 않는 느낌.

그 호칭들은 정말 나를 부르는 말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해줄 무언가를 부르는 말이었을까.

어느 순간부터 나는 점점 기능으로 불리고 있었다.
누군가의 필요가 생기면 나는 자동으로 작동한다.
“바지”가 필요하면 빨래가 호출되고,
“출출해” 하면 간식이 호출된다.

호출에는 언제나 생략된 전제가 있다.
‘당연히 할 수 있잖아.’
‘지금 필요하니까 해 줘.’

그 안에 내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는 포함되지 않는다.
청소기나 세탁기처럼 그저 요구에 따라 움직이고, 응답하고, 해결하는 것이 우선이다.

호출에 응답하는 삶은 나를 하나의 온전한 존재로 남겨두지 않는다.
나는 정리하는 손이 되고, 돌보는 팔이 되고, 기억하는 뇌가 되어
그중 필요한 기능만 꺼내 쓰인다.

그렇게 기능으로 분리된 나에게,
더 이상 사람으로서의 맥락은 중요하지 않다.
그 손이 누구의 손인지, 그 기억이 어떤 삶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상관없다.
필요한 건 오직 결과뿐이다.

그래서 기능은 존재를 통과하지 않는다.
‘어떤 결과가 필요한가’로만 나를 소환할 뿐이다.
‘내가 누구인가’는 묻지 않는다.

질문받지 못한 나는, 점점 질문하는 법도 잊어갔다.
내가 느끼는 것은 호출을 바꾸지 못했고,
내가 원하는 것은 필요를 밀어내지 못했다.
그 속에서 질문은 쓸모 없는 것이 되어 갔다.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니까’
‘지금은 내가 해야 하니까’

그 이유 없는 순응이 계속되는 동안,
나조차 나를 궁금해하지 않게 된다.
무엇을 느끼는지, 이걸 하고 싶은지,
내가 나인 채로 여기에 존재하는지를
굳이 확인하지 않는다.

질문이 사라지자, 언어도 사라졌다.
나는 점점 의견 없는 사람이 되어갔다.
무엇이 좋은지, 무엇이 먹고 싶은지, 오늘 하루 기분은 어땠는지
어쩌다 누군가 물어봐도 대답할 말이 없었다.

그 자리를 채운 건 언제나
“괜찮아”, “아무거나”, “나는 됐어” 같은 말들이었다.

그 말들은 배려도, 양보도, 여유도 아니었다.
그것은 내가 여기에 있다는 신호의 종료이자,
세상과의 연결이 끊겼다는 징후였다.

그렇게 나는 고립되었고, 서서히 잊혀졌다.
말을 줄인다는 건, 결국 존재를 포기하는 방식이었다.

문득, 거울 속 얼굴이 낯설다.
분명 나인데, 내가 알던 나는 그 안에 없다.

예전의 나는 좋아하는 음악이 있었고,
마음 맞는 친구가 있었고,
쓰고 싶은 문장이 있었고,
내일을 기다리는 설렘도 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지금 나는 기능으로만 호출되는 익명의 그림자처럼 서 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능으로만 기억하며 살아왔을까.
당신의 어머니, 당신의 아내, 그리고 당신 자신은
기능이 아니라면 어떤 존재였을까.

그들이 어떤 사람이었고,
무엇을 꿈꾸었으며,
어떻게 존재하고 싶었는지를
우리는 왜 궁금해하지 않았을까.

존재는 이름으로 불릴 때 뿌리를 내린다.
가사노동은 대부분 몸을 쓰는 일이지만
그 안에서 사라지는 건 몸이 아니라
마음이고, 존재이고, 이름이다.

우리는 너무 오랜 시간, 이름을 잃고 기능으로만 작동하는 구조에 길들여졌다.
그 구조는 내가 누구이며,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원하는지를 묻지 않는다.

묻지 않는 당신은, 정말 존재하는가?
지금, 당신의 이름은 어디에 있는가.

질문은 주체를 유지하는 통로다.
질문하지 않는 삶은 존재를 희석시킨다.

내 이름을 묻지 않고,
나조차 나에게 질문하지 않는다면,
결국 나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더 이상 사라지지 않기 위해,
다시 존재하기 위해,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의 끝에 마주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온전한 주체로서 살아가는 한 사람의 삶일 것이다.



✍ 이 글은 『가사의 존재』라는 책을 준비하며 쓴 원고의 일부입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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