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나는 여전히 일기를 쓰고 싶었을까

존재를 증명하는 기록

by 나아선




일기를 쓴다.
그 말은 오래도록 내게 낭만의 다른 이름이었다.

현실의 나는 사는 게 바빴다.
먹으면 치우고, 치우면 다시 쌓였다.
쌓이면 또 비워야 했다.
등하원과 장보기, 학원 시간에 맞춰 나가다보면
하루는 잘게 잘려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사는 것도 벅찬데, 일기라니.
반복되는 하루를 적어 무엇이 달라질까.
낭만은 해야 할 일의 맨 뒷자리로 밀려 손이 닿지도 않았다.
나는 애써 팔을 뻗을 기운조차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종종 일기를 떠올렸다.
무거운 몸은 움직이지 않아도,
하얀 종이 위에 무언가를 끄적이는 내 모습을 상상하곤 했다.

왜일까.
왜 나는 여전히 일기를 쓰고 싶었을까.

그러던 어느 날, 충동처럼 일기 앱을 설치했다.
낯설게 빛나는 여백 위로 깜박이는 커서가 나를 재촉했다.
하지만 손가락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오늘 한 일을 적자니 일정표와 다름 없고,
특별한 일을 찾자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남은 건, 잡념뿐이었다.
그것들은 늘 출처가 모호했다.
이리저리 흩날리다 어디론가 사라질 뿐,
별다른 쓸모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 나는 그 떠돌던 잡념들을 있는 그대로 붙잡아
일기장에 구겨 넣기 시작했다.
적막한 밤, 피곤한 몸, 오늘의 후회, 내일의 걱정.
어지럽게 쏟아낸 감정들이 한 줄, 또 한 줄 채워졌다.

그리고 마침내 저장 버튼을 눌렀을 때, 알게 됐다.
저장된 것은 잡념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임을.

그 안엔 내가 어디에 놓여있는지.
언제 기쁘고 힘든지.
무엇을 원하는 사람인지가
한 점 거짓 없이 담겨있었다.

그러자 평범했던 시간들이 전혀 다르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무 일 없었던 하루는 사건이 되었고,
종잡을 수 없던 마음은 장면이 되었다.

매일 똑같다고 생각했던 일상 속에도,
기쁨과 걱정, 분노와 안도가 교차하며
예측할 수 없는 전개가 이어졌다.
나는 그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며
성장하기를 갈망하는 인물이었다.

그렇게 하루하루의 기록이 쌓이며,
시련과 분노는 한 편의 드라마가 되었고,
지루한 일상은 새로운 도전의 발판이 되었으며,
기쁨은 내가 원하는 길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 모든 변주의 끝에서, 나는 마침내 나를 비추는 카타르시스를 발견했다.

나라는 인물에게 서사가 부여되는 순간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자, 유일한 독자였다.

일기를 쓰고 싶었던 이유는 그래서였다.
나는 확인하고 싶었다.
내가 정말, 내 삶의 주인공인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건 없고,
의지대로 살아가기도 힘든 게 인생이었다.
하루는 늘 어디론가 끌려가듯,
누군가에게 맞춰가듯 흘러갔다.

그런 삶 속에서 나는 감히 나를 주인공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건 나의 오래된 의문이었다.
그런데 그 답이 일기 속에 있었다.

내가 사랑해온 주인공들은 모두 서사를 가진 인물들이었다.
결핍과 좌절 속에서 흔들렸지만, 끝내 회복하고 성장하는 그들을 나는 응원했다.
불완전했기에 더 많은 장면을 남겼고, 그래서 더욱 마음을 붙잡았다.
그들의 삶은 매혹적이었고, 나는 홀리듯 그들에게 빠져들었다.

그리고 일기 속의 나 또한, 그런 서사를 가진 인물이었다.
더 이상 흘러가다 사라지는 존재가 아니었다.

삶은 때로 서툴고 흔들렸지만, 여느 이야기처럼 불완전한 채로 빛났다.
그 중심에서 나는 장면을 남기고, 의미를 찾으며, 의지를 가진 존재였다.
이야기 속 인물을 사랑했던 것처럼,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할 수 있었다.

주인공으로 살아가는 나의 이야기를 눈으로 확인하고,
마음을 쓰며 지지하는 기록.
일기는 결국, 나를 사랑하기 위한 연습이었다.

그래서 나는 말해주고 싶었다.
당신에게도 사랑에 빠질만큼, 아름다운 서사가 있음을.

문득 일기장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 그것이 충동이 아니라 마음에서 보내는 신호임을 기억했으면 한다.
흐릿하게 스쳐가는 잡념들이 무의미한 게 아니라, 당신이 만들어갈 서사임 알아챘으면 한다.

지금 기록하기로 마음먹은 이 순간, 떠오르는 모든 생각을 적어보길 바란다.

당신을 둘러싼 공기, 조명, 어둠, 소리, 향기, 시간, 어지러운 공간까지도 일기장 안에서는 감각적인 미장센이 된다.
매일의 뻔한 일상이 프롤로그처럼 펼쳐지고, 사소한 순간들이 놓칠 수 없는 장면으로 전환된다.

그 기록에 작은 이름을 붙여주자.
문득 스쳐간 따뜻함, 짙게 스며든 서운함, 불현듯 치밀었던 분노, 오래 남은 그리움,
짧게 번진 설렘.
그 모든 것이 내러티브로 변모한다.

주목받지 못했던 오늘이
당신의 감정선을 따라 한편의 드라마가 된다.

그 다음에는 질문이 따라온다.
이 감정은 어디에서 비롯되었을까.
왜 그렇게 느꼈으며, 그 순간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무엇을 바라고 있었고, 또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 답하지 못해도 괜찮다.
묻는 순간, 이미 여정은 시작되었으니까.
그 여정이 곧 당신의 이야기이며,
그 이야기는 세상 어디에도 없는 단 하나의 서사가 된다.

때론 그 이야기 속 주인공이 낯설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는 결코 완벽하지 않다.
모순적이거나, 감정적이거나, 어리석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독자인 나는 그저 흥미롭게 지켜볼 뿐이다.
그 눈길이 이야기 속 인물에게 너그러워지는 순간,
불완전함은 온기와 깊이가 되어 당신을 매혹한다.

빠져든 마음은 이제 팬레터에 옮겨진다.
힘들었던 나에게 위로를, 부족했던 나에게 격려를,
기뻐했던 나에게 축하를, 용기냈던 나에게 칭찬을 선물한다.

불안했던 나를 품어주고,
행복했던 나에게 감사하며,
서툴지만 진심으로 나를 사랑하는 법을 배운다.

우리는 각자가 저마다의 서사를 가진 존재다.
보잘 것 없어 보이는 기록이 그것을 증명한다.
종이 위에 떨어지는 글자 하나하나가
잊혀져가던 이야기를 되살리고,
사라질 뻔한 존재를 붙잡는다.

그래서 일기는 나를 삶의 중심에 세우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다.
나는 늘 낭만을 현실의 뒤편으로 미뤄두고 거들떠보지 않았지만,
지쳐가는 삶 속에서 진정으로 필요했던 건 결국 낭만이었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기록한다.
그 기록 속에서 나는 언제나,
나의 하루를 살아가는 주인공이다.



✍ 이 글은 『가사의 존재』라는 책을 준비하며 쓴 원고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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