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안일은 왜 늘 서툴게 배워야 하는 걸까

세대를 잇는 배움

by 나아선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

성인이 된 지금도 귓가에 맴도는 어린 시절의 노랫말이다.
그래서 나 역시 다른 아이들처럼 장난감을 바구니에 담고, 밥상에 수저를 놓고, 물컵을 씻으며 자랐다.

하지만 나는 정말 내 삶을 스스로 돌볼 수 있도록 자란 걸까?
곰곰이 돌아보면, 그렇지 않았다.

결혼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라면을 끓이는 정도였다.
자취를 할 때도 외식으로 끼니를 때우거나, 본가에서 보내준 반찬에 의존했다.
청소는 즐겼지만, 음식물 쓰레기나 변기 청소처럼 불쾌한 일에는 한 번도 손을 대지 않았다.

그러니 결혼 후 내가 맞닥뜨린 현실이 얼마나 충격적이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간을 넘게 요리해도 식탁 위에 놓이는 건 밥과 국, 반찬 한두 가지뿐이었다.
생닭이나 생선을 손질하는 생경한 느낌은 차치하더라도 말이다.

여름철 음식물 쓰레기는 며칠 만에 벌레가 꼬였고, 주방 후드는 기름때로, 배수구와 변기는 곰팡이로 속을 썩였다.
늘 깨끗하고 정갈해 보였던 집안일은, 사실 더럽고 고된 일을 포함해 쉬지 않고 손이 가야 유지되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물을 수밖에 없었다.
분명 내 곁에서 늘 이루어지던 일이었을 텐데, 왜 나는 그것을 이제야 알게 된 걸까?
왜 이렇게도 충격이었을까?

나는 집안일에 참여하며 자랐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눈에 보이는 단편적 경험에 불과했다.
빨래를 개거나 설거지를 하고, 청소기를 돌리는 일은 눈에 띄니 경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집안일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일이 훨씬 많았다.

설거지 뒤에도 젖은 행주를 삶아내고, 싱크대와 바닥을 정리하는 것처럼 계속 이어지는 일.
육아와 교육을 챙기고, 생필품이 떨어지지 않도록 살피고, 집 구석구석 위생을 관리하는 일.
그런 일들은 눈에 보이지 않았고,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다.

결국 결혼하고 아기를 낳은 뒤, 대책 없는 상황에 맞닥뜨려서야 인터넷 검색과 주변 어른들의 도움으로 겨우 배우게 되었다.

그렇게 배운 집안일을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도 난감했다.
나는 꾸준히 아이들에게 방 청소를 시키고, 식사 준비를 돕게 하고, 심부름을 맡겼다.
입에 달고 살았던 말은 늘 “좀 도와라”, “치워라”였다.

하지만 어릴 때는 놀이처럼 신나게 도왔던 아이들이, 시간이 지날수록 집안일을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겨우 시켜 놓으면 대충 해놓고 달아나는 일이 잦았다.

강제로 시키는 노동이 습관이나 책임으로 이어질 리 없었다.
그건 자기 몫의 일이 아니라, 그저 부모의 일에 끼어드는 행위일 뿐이었다.

아이들이 배우는 것은 결국 풍경이었다.
소파에 앉아 TV를 보는 가족들 사이에서 홀로 주방에 선 엄마의 뒷모습,
이어지는 잔소리와 갈등이 아이들이 바라보는 가사노동의 전부였다.

가사노동은 왜 늘 이런 방식으로만 배우게 되는 걸까?
왜 이 노동의 교육은 여전히 과거의 틀에 갇혀, 같은 실수를 반복하게 만드는 걸까?

가사노동은 인류의 역사만큼 오래된 노동이다.
하지만 수많은 지혜와 지식이 기록되고 연구된 것과 달리, 가사노동은 이론화되지 않았다.
삶의 근간이 되는 일을 사람들은 매 세대마다, 매뉴얼 하나 없이 처음부터 다시 배운다.

아마도 가사노동이 오랫동안 하찮은 계급의 일로 여겨졌기 때문일 것이다.
현대에 들어 인간의 평등을 말하면서도, 그 노동은 여전히 사적인 일, 부수적인 일로 치부된다.
그 사이, 가사노동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특정한 누군가의 몫으로 남겨졌다.

그리고 그 일은 또다시 다음 세대로 고스란히 넘어간다.
아이들은 성인이 되어, 그 모든 일을 처음부터 서툴게 배워야 한다.
우리는 이토록 어리석은 순환을 세대를 거듭하며 반복하고 있다.

가사노동은 그토록 가치 없는 일일까?
왜 오랜 시간 교육의 대상으로조차 논의되지 않았을까?
왜 이 노동 없이는 아무도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을 잊고 있을까?

가사노동은 삶을 지탱하는 토대이자, 가장 본질적인 일이다.
어쩌면 수학이나 영어보다 먼저, 교육의 자리에 놓였어야 했다.

만약 우리가 어릴 때부터 가사노동을 체계적으로 배웠다면 어땠을까.
삶을 설계하고 유지하는 보편적 기술로 누구에게나 제공되는 기본 교육이었다면,
결혼이나 출산 이후의 삶이 덜 혼란스러웠을지도 모른다.

노동 역시 아는 만큼 보인다.
가족이 모두 함께 볼 수 있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모습이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노동이 한 사람의 삶을 갉아먹는 일은 줄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노동은 갈등이 아니라,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방법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이들에게 무엇을 남겨야 할까?
아이들이 이 노동 위에서 살아가고, 가정을 꾸리며, 자신의 삶을 단단히 세워갈 수 있도록 길을 보여주어야 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길은 어디서부터 시작되는 걸까?

어느 날, 싱크대 앞에 서 있던 내게 아이가 다가왔다.

“엄마, 설거지 내가 해볼게.”

예전엔 발끝을 들어야 겨우 닿던 싱크대가, 이제는 아이의 눈높이 아래에 있었다.
아이는 기세 좋게 내 손에서 텀블러를 빼갔다.

“이거 어떻게 씻어야 해?”

분리 방법을 알려주려는 순간, 아이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게 분리되는 거였어?”

유치원 때부터 매일 가지고 다니던 텀블러.
그러나 그것이 다섯 개의 부품으로 나뉜다는 사실은 전혀 몰랐을 것이다.

하나하나 솔로 닦으며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짓는다.
마지막 부품까지 헹궈 건조대에 올려놓은 아이가 뿌듯한 얼굴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그러더니 와락 품에 안긴다.

“엄마, 고마워.”

그날 아이는 물 한 모금 뒤에 숨어 있던 과정을 처음으로 보았다.
당연하게 여겼던 것들이 세심한 관계와 돌봄 속에서 이어지고 있음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반짝이는 아이의 눈빛 속에서, 이 노동의 미래를 떠올렸다.

삶이 노동 위에 세워진다면, 노동을 안다는 것은 단순한 기술이 아니라 삶의 토대를 굳건히 하는 일이다.
아이는 그것을 앎과 동시에, 감사할 줄도 알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이 노동의 미래를 밝히는 열쇠가 될지도 모른다.

보이지 않는 손길과 끝없는 과정 속에서, 서로의 삶을 지켜주는 법을 배우는 일.
그 작은 깨달음과 감사의 마음이 쌓일 때, 우리는 단순히 일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법과 삶을 지탱하는 힘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게 된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의 손길로 그 가치가 이어질 때,
비로소 우리는 세대를 넘어 흐르는 노동과 사랑의 의미를 조금씩 이해하게 될 것이다.



✍ 이 글은 『가사의 존재』라는 책을 준비하며 쓴 원고의 일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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