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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Nov 09. 2023

선생님,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요

- 30분, 우리의 동행

 

선생님, 이제 저는 학교를 그만두고 싶어요.     

 

 맙소사. 오지 않았으면 했던 순간이 왔다. 수업시간마다 무기력한 모습에 표정은 늘 어두웠던 아이였다. 뭐랄까 24시간 뚱함을 유지할 것 같은 느낌. 웃는 얼굴을 찾으려고 애써 보아도 늘 허사였고, 눈을 뜨고 있는 시간보다 감고 있는 시간이 많을 것 같았다. 수업 중 던지는 농담에도 시큰둥했다. 누가 봐도 학교생활에 흥미는 제로였다. 체육 시간이 끝나고 하하 웃으며 들어오는 아이들 사이에서 밝지 않은 그 아이의 얼굴을 종종 보곤 했다. 고1 남학생의 사춘기치곤 좀 위태로워 보였다.


 처음부터 그 아이의 담임은 아니었다. 원래 담임이셨던 선생님이 교통사고로 입원을 하시는 바람에 대타가 필요해진 거다. 당시 부담임이었던 나는 초임 여교사였고 그곳은 남고였고, 온갖 사건 사고가 많은 반이었다. 바람 잘 날 없다는 표현은 여기에 쓰면 딱이다 싶었다. 나 대신 남자 음악 교사에게 담임을 넘겨주기로 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순간 뭐가 그리 억울했는지, 초임의 객기였는지 부장님 책상에 굳이! 그걸 굳이! 찾아가서      

 “저도 할 수 있어요. 부장님” 말했다. ( 뒤에 이 순간을 후회한 적이 열 번쯤 됐던 건 비밀)

   

(사진: pixabay)

 어찌 됐든 개구쟁이 집합소의 담임이 됐다. 제 발로 얼결에 떠안았다는 게 정확하다. 그래도 뭐 소중한 나의 첫 담임, 우리 반 내 새끼들이었다.

 학교를 왜 다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만두고 싶어요.

 담임 업무 적응에 매일 헤롱 대던 때였다. 믹스커피를 물 삼아 마시며 살았는데, 이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학부모와 통화를 하니 이미 반 이상 포기하신 목소리였다. 어머니는 아주 축축하고 눈물 젖은 어투였다. 화도 내보고 설득도 해봤지만 소용이 없다 하셨다. 이렇게 말하기까지 얼마나 갈등의 과정이 있었을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마음이 아렸다.


 서류 한 장으로 이대로 보내주는 게 아이를 위한 일인지, 뒷날의 계획들은 있는지 아무것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상담선생님도 수차례 상담을 했지만 마음을 돌리기가 어렵겠다 하셨다.      


 아이가 학교 밖에서 생활할 모습을 상상해 봤다. 점심 즈음 일어나 밥을 대충 욱여넣고, 게임을 하거나 휴대폰을 만지다 시들해지면 책을 몇 장 넘기다 또 자겠지. 검정고시 학원이나 매일 가면 다행이다 싶었다. 이를 어쩌나, 나 역시 열정만 있지 노하우는 없는 신참내기인 걸. 큰일이다. 어쩔 수 없다. 이번에도 그냥 나답게 해 보자는 결론을 냈다. 결과가 어찌 되든 꾸준히 해내는 습관 딱! 하나만 선물해 주고 보내야겠다 싶었다. 재영에게 문자를 보냈다.


 “재영아, 좋아. 네 결정을 존중할게. 하지만 조건이 있어. 학교를 그만둘 때 두더라도 딱 한 달만 선생님이랑 저녁 시간 6시 반부터 30분 간만 운동장을 걷자. 딱히 이야기 많이 하지 않아도 돼. 이것저것 묻지도 않을 거야. 저녁 먹고 그냥 걷자 우리. 한 달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니까. 이건 선생님이 재영이에게 하는 부탁이야. 들어줄 수 있니? "

 “네.”

 짧은 대답이 왔다. 그래, 우리의 동행 이제 시작이다.


 당장 그날부터 시작했다. 첫날 재영이와의 산책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이 선생이 또 무슨 말을 하려는가 의심하는 눈초리였다. 눈을 어디다 둘지 손발은 어떤 템포로 걸어야 하는지 모르는, 뭐랄까 고장 난 로봇과 산책하는 느낌이었다.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냥 오늘의 공기, 수업시간에 했던 농담의 뒷이야기 같은 시답잖은 담소만이 있었다. 재잘대는 내가 있고 조용히 듣는 아이가 있을 뿐이었다. 재영이는 신발을 질질 끌기에 바빴다. ‘저러다 뒤축 없이 집에 돌아가겠구나’ 싶을 정도였다.

 매일 걸었다. 아이는 급식실에서 저녁을 먹고 나면 교무실에 들어와 내 자리를 찾았다. 존경스러울 정도로 한결같이 뚱한 표정이었는데 신기할 정도로 시간 약속을 잘 지켰다. 일주일쯤이 지났을 때 아이가 한두 마디 농담을 던졌고, 짧게나마 내 이야기에 대꾸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저녁 급식이 쓰레기였다고 하면 나도 “그치? 억지로 삼켰다니까.” 같은 이야기도 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말문이 열렸고 더없이 반가운 일이었다. 운동장에서 축구를 하던 다른 아이들이 재밌어 보이는지 함께 걷기도 했다.

“뭐해요? 저녁 운동해요? 같이 하자 같이!” 하며 수다를 거들었고, 벌떼처럼 우르르 걷기도 했다. 아이들 덕에 나도 재영이도 산책의 재미를 더했다.


 2주를 꼬빡 채운 날, 걷기를 끝내며 아이에게 조심스레 마음을 전했다.     


 “ 재영아, 학교가 아닌 바깥세상은 선택의 연속일 거야. 그리고 선택에 책임을 지라고 하겠지. 선생님은 네가 힘들어하고 있는 이 시기에, 학교의 보호를 받으면서 조금은 천천히 컸으면 좋겠다. 성적이나 성공 때문이 아니라 친구들과 지금처럼 산책하고 운동하면서 추억을 조금 더 쌓고 졸업했으면 좋겠어. 그게 솔직한 선생님 마음이야.”          


 다음 날, 재영이는 운동장에 나오지 않았다. 왜 오지 않냐고 굳이 묻지 않았지만 내 조언이 부담이 된 건 아닌지 밤잠을 설쳤다.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을 때, 아이가 교무실로 찾아왔다. 나직하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선생님 말씀 듣고 며칠 동안 많이 고민해 봤는데요. 저.. 다시 학교에 다닐래요.
    

 영화 속 어떤 명대사가 이보다 감동적일까. 마음을 돌린 건 나의 노력이 아니라, 그 아이의 힘이었다. 고맙고 또 고마웠다. 아이는 다음 해에도, 그다음 해에도 즐겁게 학교생활을 했다.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밝아지고, 장난이 늘고, 수다스러워졌다. 3년간 따라 올라가며 가르쳤던 아이들의 졸업식날이 왔다. 꼬맹이들이 언제 커서 벌써 대학에 간다는 건지, 대견하면서 헤어짐이 아쉬운 날이었다.


 몸을 베베 꼬며 한 아이가 들어왔다. “감사했습니다.” 한다. 역시 그 아이다운 간결한 인사다. 건강하고 행복하라고 서로를 격려하며 헤어졌다. 그날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백 마디의 말보다 함께 하는 걸음이 더 위로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해 준 소중한 제자. 재영이와의 산책은 해피엔딩이었다.

그래, 나도 한 때 스승이었지? 알게 해 주는 연락. 아픈 손가락이었던 녀석이 이제는 엄지척이 되었다.

꿈을 좇아 더 넓은 세상으로 간 너는 선생님의 보람이다. 내 자긍심이다.

그러니 부지런히 더더 행복하라! 이재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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