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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Nov 03. 2023

달갑지 않은 글감

-아이가 다쳤다.

"어머니, 도담이가 좀 다쳤습니다."

 가슴이 쿵 떨어지는 전화다. 하교 시간까지 시계를 몇 번 봤는지 셀 수 없다. 하교하는 도담이의 목소리는 밝다. '그래, 심각한 부상이면 바로 데려가라고 하셨겠지. 집에서 찜질 좀 하면 괜찮을 거야.' 집에 돌아온 도담이의 손을 보니, 생각보다 심한 부상인 듯했다.


 사고의 전말을 들어보니 남자아이들의 전형적이고도 부주의한 장난이다. 정말이지 다소 과격했다. 두 명의 친구가 줄넘기를 걸어 도담이가 넘어진 상황이었다. 처음 사고 소식을 접했을 때는 너무 걱정이 됐고, 그 뒤엔 속이 상해 명치가 뜨거워졌다. 하지만 기분보다 치료를 앞세워야 할 타이밍이었다.

(사진:pixabay)

 도담이를 보니 말이 아니다. 입술에는 피가 났다 멎은 자국이 그대로 있고, 손가락에는 부목을 대 놓은 상태였다. 손가락에 멍이 들기 시작하는 게 심상찮다.


 아.. 올 것이 왔구나. 나도 어엿한 두 아들맘 아닌가. 바야흐로 정형외과와 친해질 시간이 되었노라. 전장에 나가는 장수의 마음으로 병원에 갔다. 아이는 아픈 건지, 안 아픈 건지 분간이 안 갈 정도로 쾌활하다가 손가락에 뭐라도 닿으면 소리를 질렀다. 그러다 또 즐겁고. 이상한 상태다. 얘가 머리를 다친 건 아니겠지. 합리적 의심도 잠깐 해 봤다.


 병원에 도착해, 길고 긴 대기 시간을 버틴 끝에 손가락 골절이라는 아름다운 진단 결과를 받았다. 5주 간 깁스를 해야 한다는 상쾌한 이야기도 들었다. 아. 그래, 이게 아들맘이지. 담담하게 병원 진료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괜찮은 척 웃으며 담이를 위로했다.

(사진: pixabay)

"도담아,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앞니를 안 다쳐서! 또 얼마나 좋아? 여름 다 가고 선선할 때 다쳐서! 다리가 아니라 다행이고, 통깁스 아니고 반깁스라 너무 다행이다! 그치?"


 내 말 때문이었을까. 도담이도 연신 즐겁다. 그렇게 좋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다만, 뭐 너 좋다니 되었다. 오른손이라 이제 젓가락질은 못하고, 머리도 못 감는단다. 결정적으로 연필을 잡는 건 무리가 갈 것 같단다. 이런 명분은 금세 찾아내는 영특한 내 아들. 그래, 어쩌겠나! 한 달 동안 좀 놀자!


 ' 네가 마음이 아니라 몸이 다쳐서 그나마 엄마는 제일 다행스럽다. 웃으니 됐다.'     


 그렇게 저녁 시간이 되었고, 지친 우리를 달래줄 치킨이 도착했다. 그때, 모르는 번호로 문자가 왔다.

 도담이 엄마, 저 B엄마예요.
혹시 잠깐 통화되실까요?

 정중하고, 조심스러운 문자였다. 장난을 친 두 명 중 한 명의 엄마다. 미룰 수 없는 통화였기에 고민 없이 응했다. 아니, 3초쯤 고민한 것 같다. 속상하고 놀랐던 마음을 날 것대로 비춰야 할지, 괜찮다고 답을 해야 할지 내가 취할 스텐스에 대한 고민이 있었다. 깁스도 처음이지만, 이런 통화도 처음이다. 낯선 하루다.


 이 깁스로 인해, 당장 다음 주말에 예정되었던 피아노 연주회에 불참하게 됐다. 수영 레벨테스트도 물 건너갔다. 결정적으로 전국 검도대회에 못 가게 됐다. 오래 기다렸던 대회였는데 아쉽기 짝이 없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정이 한 달간 올스톱이 됐다. 뭣보다 아이가 불편해할 그 시간이 너무 싫었다. 하지만 속사정을 이야기하면 뭐 하리. 정말이지. 고의가 아니었는데.. 그냥 나는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의 쿨한 스텐스를 유지하기로 한다.


 B의 엄마가 말문을 열었다.

 "저희 아이는 그런 애가 아니고, 누군가한테 피해를 주는 아이가 아닌데... 개구쟁이 누구누구가 잡으라 해서 덩달아하다가 항상 마지막에 억울한 일을 겪곤 해요. 그리고 다 같이 장난치다가 그랬다는데.. 아유. 이유야 어찌 됐든 그래도 우리 애 줄에 넘어졌다 하니 너무 미안합니다. "  


 나 못지않게 속상하고, 거기다 좀 억울한 마음이 커 보였다. 거기다 이런 말도 덧붙인다.

“너무 장난 심하고, 떠드는 애들하고는 놀지 말라고 해야겠어요. 자리를 바꿔달라 할까 생각 중이었어요. 이번에도 걔가 도담이 잡으라 했다던데.. ”  

 뉘앙스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굳이 이 통화에서 나눌 이야기는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차분하고 문제 삼지 않는 자세를 유지해 본다.


"아... 네... 안 그래도 개구쟁이 친구들 많은 것 같아요.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걸 알기 때문에, 저도 크게 신경 쓰지 않을 생각이에요. 그러니 아이 너무 나무라지 마시고, 속상해하지 마세요. 애들 크다 보면 그럴 수 있죠. 남자아이들이잖아요. 아이들도 이번에 놀라서 다 같이 좀 조심하지 싶습니다. 하하. "   


  통화하면서 너무 하하 웃었나. 뻘쭘할 때 웃는 이 고질적 습관. 나 자신이 좀 싫어지려 했는데, 그래도 잘했다 싶은 순간이 왔다. 그녀는 혹시나 일이 커질까 우려했던 마음이 사르르 녹았는지, 연신 고맙다며 이렇게 이해를 해주시니 너무 감사하다고 거듭 인사를 건넨다. '감사합니다-괜찮아요-고마워요-아니에요 뭘-'의 패턴을 2-3회 정도 반복하고 전화를 끊었다.


 만약 거기서 내가 기분대로 날을 세웠다면 대화는 어디로 갔을까. 갈 곳은 파국 밖에 없다. 그래, 잘 마무리했다. 이미 아이는 다쳤고, 상황은 벌어졌다. 원망할 에너지를 회복에 쏟기로 한다.


 " 엄마, 좀 멋진데?" 도담이에게 오늘만 두 번 들었다. 이 말.

 멋지단 말 안 들어도 좋으니 이런 일 안 겪었으면 싶다.

 


 도담이가 B의 상황이 되었으면 어땠을까. 나는 어떻게 말을 했을까. 표현은 달랐을지언정 마음은 다르지 않았을 듯싶다. ‘우리 아이는 본디 온순한 아이입니다. 마음은 나쁜 뜻이 아니었고, 평소에는 그리 와일드하지 않은데 어쩌다 보니 이런 장난에 휘말렸고, 그리하여 피해를 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라는 맥락이 그녀에겐 필요했던 것 같다.


 모든 엄마의 같은 마음. 웃으며 받고, 쿨하게 잊자.  


 이런 역지사지의 달인. 오늘 마인드 좀 멋진데? 사실 이런 결론을 내는 것은 누구를 위함도 아니다. 내 마음의 평온을 위한 것. 이 멋짐이 한 달 동안 쭉 이어지기만을 바라본다.


 이런, 바로 위기다. 저녁에 밥을 먹다 아이가 깁스에 양념을 묻혔다. 깁스 끝이 빨갛다. 1차 위기다. 머리를 감겨달란다. 손가락이 아파서 만화책을 사서 읽어야겠단다. 2,3차 위기가 연달아 왔다. 자, 이제 또 멋짐을 발휘할 시간이다.


내면의 평화를 위해 오늘도 삐뽀삐뽀.

멋짐 주의보를 발령합니다.

네 아픈 손 꺼내다 쓴 거 미안해, 글쟁이 아들의 숙명

제 몸을 강당에 날려 엄마에게 멋진 글감을 물어와 준 나의 아기새. 이도담.


그런데 말이죠. 앞으로 이런 글감은 안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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