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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Nov 01. 2023

가장 슬픈 별

 도담이의 참관수업날. 교실 안은 달뜬 긴장감으로 채워져 있다. 아이들은 부지런히 제 부모를 찾느라 분주하고, 눈이 마주치면 쑥스러운 웃음을 보낸다. 그 속에 내 아이가 있다. 도담이도 초생달 같은 눈으로 찡긋 인사를 보낸다. 교실 뒤편에 엄마들이 쪼롬히 둘러섰고, 아이들이 준비한 내용을 한 명씩 발표하기 시작했다.

 귀엽게 꽁지머리를 한 여자 친구가 나왔다. 본인이 준비한 내용은 넌센스 퀴즈란다. 역시 아이들의 퀴즈 사랑은 대단하다. 모르는 어른이 수북하니 긴장이 됐는지, 바들대는 손으로 스케치북을 넘긴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별은?     

 순간, 나는 홀로 과거로 떠났다. 아빠가 퇴근길 교통사고로 별이 되었다. 엄마는 아빠와 함께 살던 그 추억이 가득한 곳에서 차마 살 수 없었다 했다. 아빠와 함께 지었던 그 집을 정리하고서 우리는 이사를 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어린 언니와 나는 이사되어졌다. 얼마나 슬픈 이삿길이었을까. 언니와 나에게는 없는, 엄마에게만 남은 기억.  


 엄마는 새 곳에 자리를 잡았다. 취업을 했고, 집을 얻었다. 그렇게 우리의 대구살이가 시작되었다. 엄마는 직장생활에 바빴고, 사회생활에 필요한 공부를 더 해갔다. 엄마를 사랑했지만, 늘 바쁜 엄마에게 안아달라 놀아달라 칭얼댈 수 없었다.


 어느 날부턴가 이모할머니라는 분이 우리집에 오셨다. 외할머니의 언니. 그러니까 엄마의 큰 이모다. 그렇게 우리의 시간은 시작되었다. 나의 감자 할머니. 키가 크고, 유난히 둥근 얼굴에 입술이 도톰하던 그녀. 어느 즈음의 시간이 되면 그녀가 오는 소리가 들렸다. 힘 있는 소리는 아니지만, 신발 뒤축을 끌지 않는 단정한 걸음. 어느 날은 할머니 손에 든 비닐 소리가 함께 오기도 했고, 또 어떤 날엔 맛있는 반찬 냄새가 따라오기도 했다. 나는 소리와 냄새로 할머니를 기다렸다.  


(사진: pixabay)

 할머니는 감자를 참 잘 삶으셨다. 감자 삶는 냄새는 지금도 나를 그곳으로 데려가곤 한다. 할머니와 삶아 먹던 감자. 포슬포슬한 촉감에, 달콤하고 짭조름한 그 맛을 혀끝에서 지울 수는 없다.


   “ 아이고, 나리야. 소금 찍어 묵어야 맛있데이.”

   “ 할머니! 나는 설탕 찍어 먹을 거예요. 설탕! 설탕! ” 


 못 이기는 척 솔솔 뿌려주시던 설탕. 우유에도 설탕을 넣어야만 조금 마시던 나였다. 엄마 없을 때, 살짝씩 태워주시던 설탕 우유의 맛을 어찌 잊으랴. 토마토에 살살 뿌려주시던 그 달달한 맛. 유일하게 내가 땡깡을 부릴 수 있는 대상이었다.


 “할머니는 어떻게 그렇게 감자를 잘 깎아요??”

 “허허허, 평생 이것만 했는데 이거라도 잘해야지”


 하던 할머니의 음성. 녹음해 두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리운 목소리.  

 할머니가 감자만 깎았다는 건 순 뻥이다. 우리 집에 오면 항상 신문을 읽으셨다. 어려운 한자도 줄줄 읽는 나름 ‘배운 여성’이었다. 감자를 잘 삶는 똑똑한 할머니. 그렇게 할머니 옆에서 곁눈질로 신문을 읽으면서 글을 접했던 나였다. 그렇게 어린 나는 자라고 있었다.


저녁이 되면 싫었다. 할머니가 우리 집에서 같이 잤으면, 아니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자주 말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해가 어스름할 때면 꼭 집으로 돌아가셨다.

 “치! 할머니는 나리 좋다 해놓고 맨날 집에 가고.”

 그럴 때면 할머니는 “허허허, 담에. 담에 꼭 자고 갈게” 하셨다. 엄마는 꼭 택시 타고 가시라며 할머니의 주머니에 본인의 주먹을 쑤욱 넣었다가 뺐다. 싸움 같은 옥신각신이 있은 후, 마지못해 주머니의 그것을 받아서 가시곤 했다.


(사진: unsplash)

 할머니가 더 이상 오시지 않아도 될 만큼 자라고 나서야 알았다. 왜 아침 일찍 못 오셨는지. 왜 어스름이 되면 집에 돌아가야 했는지. 할머니에게는 식사를 챙겨야 하는 노모(시어머니)가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녀의 집은 우리 집에서 버스를 두 번 갈아타야만 올 수 있는 거리였다는 것을. 엄마가 그토록 용을 쓰고 택시비를 챙겨드려도 결국엔 버스를 타셨다는 것을.


 그 길을 수없이 오가셨구나. 아기새처럼 할머니를 기다리다 안기는 나를 꼭 안아주기 위해. 새벽달과 노을을 버스에서 보셨겠구나. 예쁘다 쓰다듬고 안아주던 그 마음이, 그 사랑이 나를 키웠다. 내가 먹은 건 그녀의 감자가 아니라 그녀의 사랑이었다.

           

“이모할머니가 엘리베이터 문에 넘어지셨는데 그 뒤로 못 일어나신단다.”     

 내가 스무 살쯤 됐을 때다. 할머니를 오랜만에 뵈었다.

똑바로 누운 채 전혀 거동을 못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낯설어 쭈뼛댔다.  

 “얘가 어릴 때 정말 이뻤다. 얼마나 이뻤다고”

 여러 번 말씀하셨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 얼굴은 인물도 아니라고. 우스갯소리도 하셨다. 그런 실없는 말들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였다.


 할머니의 영정사진을 보며, 그 옛날처럼 웃고 있는 얼굴을 보며 전할 방법이 없는 말을 건넸다.

‘감사해요. 제 어린 시절이 할머니로 인해 참 따뜻했어요. 안아주셔서 업어주셔서. 당신의 사랑을 먹고 제가 잘 클 수 있었습니다.’


82세. 더 이상 나이 먹지 않게 된 할머니와 이별했다.

그렇게 세상에서 가장 슬픈 별을 보았다. 감자 할머니와 나의 기약할 수 없는 ‘이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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