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희 [남편]
" 엄마, 혹시 아빠랑 싸웠어? "
" 민아, 미안한데 의견 차이. 성격 차이. 생각 차이. 가치관의 차이라고 해 줄래. 싸웠다니 뭔가 너무 결투 같잖아."
" 히히. 의견 차이로 다퉜어? 그럼 며칠 정도 걸릴 것 같아?"
" 음, 이번 건은 좀.. 걸리겠어. 이틀, 아니 3일 정도? 엄마 아빠의 묵언수행을 이해해 주겠니. 3일 안 넘길게. 약속! "
" 알았어. 대신 3일 안에 화해하는 거다!"
" 응, 3일도 길다. 이틀 정도만 이해해 주라. 불편한 분위기 미안해."
“ 괜찮아. 엄마 아빠도 서로 다른 사람이니 그럴 수 있지.”
열한 살의 너와, 마흔이 넘은 내가 나누는 대화라니 웃프다. 이제 부모의 묵언수행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눌 만큼 자랐다니. 신기한 순간이야. 부모가 소리를 지르고 다투지 않아도 아이들은 집안에 흐르는 냉랭한 기류를 동물적으로 감지하나 봐. 타고난 섬세함일까, 아니면 인생 10년을 살아온 내공일까. 어느 쪽이든 미안해. 종종 불편한 공기에 체류하게 해서 말이야. 사실 그날 우리가 왜 다퉜는지 지금은 생각도 나질 않는다. 기억도 안 날 문제로 이틀을 보냈다 생각하니 억울하고, 행복했을 48시간이 새삼 아까워.
엄마, 아빠는 타고난 파이터들은 아니어서 다툼도 치열하진 않은데 가끔 이런 일이 생기곤 해. 그럴 땐 네게 숨기지 않고 이야기하려고 해. 아빠에 대한 험담을 하자는 건 아니고, 그저 상황에 대한 이해. 지금 엄마 아빠가 잠시 투닥거렸지만 너도 알다시피 금세 다시 맥주 한 잔 기울이며 좋아질 테니, 너무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말이야. 부모의 다툼으로 너희가 불안함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아.
너희가 함께 있는 중에 충돌이 생기면 엄마, 아빠는 손가락이 너무 아파. 카톡으로 우다다다 생각을 나누기도 하는데 글은 감정을 정제하는 대신 둥근 감정도 뾰족하게 전달하는 경우가 많어. 그래서 골이 살짝 패이기도 하지. 그러다 지문이 닳아 없어지기 전에 카톡 대화에 휴전을 선언하면 약간의 시간이 필요해. 올라온 감정을 한 김 식힐 브레이크타임 말야. 그러다 눈이 마주치면, 누가 먼저랄 것 없이 픽- 웃음이 나와버리면 쳇- 하면서 풀리는 거. 어른들이 뭐 이래. 그치? 이건 비밀인데, 어른들이 때론 아이보다 유치해.
" 라면 끓일 건데, 같이 먹을래?"
" 김치 썰어둔 거 냉장고에 있어. 꺼내서 먹자."
이러면 엄마 아빠의 N차전은 끝이 난다.
" 엄마는 아빠랑 싸우고 나면 아빠가 미워? 나는 친구랑 다투고 나면 좀 밉거든. "
어느 날엔가, 뜬금없이 네가 던진 말이었어.
" 아니, 안 미워. 아빠에 대한 감정의 기본값은 언제나 사랑이야."
네가 이해하기는 어려울 다음 말은 삼켰어.
' 아빠는 엄마에게 전쟁과 사랑을 함께 가르쳐주는 사람이란다.'
9월의 화창한 어느 날, 준이의 어린이집 운동회에서 우리 가족은 신나는 하루를 보냈지. 줄다리기도 하고, 달리기, 댄스타임까지 정신없는 시간이었잖아. 넌 다른 걸 기억하겠지만 엄마는 그날 봤던 딱 한 장면만 떠올라. 아빠의 허리춤에 있던 낡은 벨트. 사실 알고 있었어. 아빠 벨트가 꽤 낡아 바꿔야 한다는 걸. 그러면서도 너희의 자라나는 팔과 다리의 속도에 맞춰 옷을 사기에 바빴지. 아빠 허리춤에 보이는 그건 어쩌면 눈감았는지 몰라. 그러다 강당에서 아빠의 벨트를 봤는데 엄마는 순간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은 거야. 운동회 한다고 준이에게 새로 사 신긴 새 운동화와 아빠의 벨트가 너무 대조적으로 와닿았거든. 형편이 찢어지지도 않는데 왜 저걸 내가 지금껏 안 샀을까. 매번 쇼핑 갈 때마다 벨트 하나 사자 하면 노발대발 손을 저으며 안 산다는 너희 아빠.
" 괜찮아! 가죽이 뭐 끊어지냐? 거뜬해. 어차피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닌데 뭘."
그러며 웃더라. 그 순간 엄마 눈에는 지금의 아빠 얼굴이 아닌 서른 살의 윤이 나고 앳되던 아빠의 얼굴이 보였어. '부모로 사느라 참 애쓴다 우리.'
도파민의 장난질로 쉴 새 없이 콩닥대던 심장은 이제 정상 바이탈을 찾아 차분하게 흐르고 있어. 아직도 두근댄다면 그건 부정맥일 거라는 농담도 해. 그럼 무미건조하냐고? 그건 또 아니더라. 설레던 가슴 대신 또 다른 모양의 미묘한 떨림이 생겼어. 베프, 전우에 대한 애틋함에다 측은함까지. 설렘이 줄어든 자리에 또 다른 생김의 감정이 채워지는 게 부부의 세월인 걸까. 종종 생각한단다. 아빠를 생각할 때면 함께 떠오르는 시가 있어. 엄마가 참 좋아하는 문정희 작가의 이 시를 읽을 때면 애인이었던 동그리가 남편이 되고, 함께 부모가 되어 공유하게 된 많은 추억과 감정이 떠오르거든.
아버지도 아닌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은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 문정희, <남편>
투정과 애정이 버무려진 시라는 느낌이 들어. 나이는 들어도 철들지 않는 아이가 어른의 가슴에도 산단다. 그걸 제일 알아주는 사람. 전쟁과 사랑을 복합적으로 가장 많이 가르쳐주는 사이. 그게 부부인지도 모르겠어.
엄마가 이번 주말에 아빠 벨트 사러 가려고 아빠 몰래 벨트 버렸거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조건, 반드시, 기필코 가려 했거든. 근데, 어제 아빠가 침대를 밀다 엄마 발가락을 밀어버렸네?
역시 내게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주고 있는) 남자.
그렇게 그날 아빠는 벨트를, 엄마는 발톱을 잃었다고 한다.
민아, 벨트와 발톱이 얼른 다시 생기길 빌어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