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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Aug 29. 2024

‘시’는 왜 이렇게 어려운가요?

아이와 벗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

 혹시, 글의 제목을 보고 친정, 처가의 반대말 그 '시'라고 생각했다면 상당히 오해가 깊다. 물론 그 ‘시’도 어려운 건 맞지만 여기에서의 시는 기혼 여성들이 자주 읊조리는 그 '시'가 아닌 아름다운 문학의 장르로서의 시다. 얼마 전 시집을 한 권 사면서 잠시 망설였다. 서점에서 자기 지갑을 열어 시집을 사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를 생각했다. 여백이 3분의 2를 차지하는 책을 놓고 잠시 고민했다면 나는 속물일까.


 교사로 재직할 당시, 학생들에게 가장 많이 받았던 질문 중 하나가 바로 "시는 왜 이렇게 어려워요?"였다. 그렇다. 시는 만만한 녀석이 아니다. 그것은 마치 뭐랄까. 속내를 100프로 오픈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이해해 주길 바라는 의뭉스런 느낌 비슷하달까.


 학창 시절에도, 졸업을 해서도 시를 그닥 좋아하지 않았다. 사범대학스럽게 시를 쓰고 읽는 동아리가 있었다. 이름도 멋진 ‘말과 여백’. 하지만 근처도 발 들이지 않았다. 애매한 말과 짧은 글로 멋을 부리는 것 같다는, 약간은 옹졸한 마음도 갖고 있었다. 시를 그럴싸하게 써낼 자신이 없었다는 게 정확하겠다. 시를 좋아할 수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발로 차더니, 시에 빠져들게 됐다. 재미있게도, 학생들과 교실에서 문제를 풀다가. 시를 낭독하다가, 낭독하는 학생의 목소리를 듣다가. 아,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이럴 수가. 아하.. 자주 감탄했고, 자꾸 울컥했다.


 "얘들아, 정말 이 시 너무 아름답지 않니? 어떻게 사랑이라는 감정을 이토록 간결하고도 진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방과 후 수업 문제집을 읽다가 이렇게 반응하는 내 모습이 신기했는지, 남자 고등학생들의 눈빛에는 동감할 의지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학년실에 돌아와 이런 이야기를 하니, 나이 지긋한 선배 교사가 웃으며 하신 말씀. 아직도 기억에 남았다.


 "원래, 시라는 게 배울 때는 못 느끼다 가르칠 때 울컥한 법이지. 어릴 때 동시 조금 읽은 거 외에 애들이 시를 어디서 읽었겠어. 그러다 문제 정답 찾으려고 시를 들여다보니 감동을 할 겨를이 없겠지."


  그랬다. 아이들은 사춘기의 풍랑을 열심히 노 저어 가는 중에, 학습으로서 시를 접하니 가슴으로 읽지 못하고 머리로 해석하기 분주했다. 난데없이 짧은 시 두 어편을 엮어 화자의 마음을 읽으란다. 비슷한 처지를 골라내라 하고, 표현의 공통점을 찾으라 하니 없던 두통이 몰려올 법도 하다. 그 공간에서 가슴이 개입될 여지는 없다는 게 안타까웠다.

 그 아이들이 보다 어릴 때부터 시를 읽고, 마음으로 느꼈다면 참 좋았겠다. 시험의 정답률을 위해? 대답은 NO다. 시에 더 감동하고, 공감하고, 울컥한다 해서 국어영역의 점수가 올라간다 보장할 수 없다. 되려 분석적인 태도로 달려드는 아이들이 더 높은 점수를 받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러나, 반드시. 아이들에게 시는 필요하다. 아기들이 부르는 동요도 시다. 어린이들은 모두 작은 시인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짧은 시를 통해서, 여백을 남기는 글을 통해 아이들은 공감을 배우고, 생각이 성장하고, 감성이 자란다. 살아가며 깨닫는다. 시는 읽어내기 불편하고, 불친절한 글이 아니라는 것을. 독자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기는, 타인의 마음을 이해할 기회를 주는 문학 장르다. 


 똑똑한 사람의 시대는 어쩌면 정점으로 치달아 있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스마트한 지피티 비서가 생기지 않았나. 물어보면 그 녀석은 모르는 것 자체가 없는 것 같다. 그렇다면 AI가

넘볼 수 없는 한 가지는 뭘까. 어린아이의 감수성. 인간의 삶 속에서 일렁이는 마음, 그에 따른 공감. 이런 경험은 아무리 과학이 발전해도 인간 아이덴티티의 마지막 보루가 될지 모르겠다:


 사실 AI, 감수성, 인생. 이런 비장한 단어들은 필요치 않다. 그냥 맥락 없이 책을 펼쳐 한 줄 읽으면 그뿐이다. 그런 마음으로 도담이가 뱃속에 있을 때부터 자주 시를 읽어줬다. 동시일 필요는 없었다. 인터넷에서 우연히 발견한 시, 하다 못해 감동적인 노래가사도 좋았다. 잠자리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어느 날엔 시도 한 편씩 읽어주는 정도. 딱 거기까지다. 지금은 같은 시를 읽고, 이런저런 생각을 나눌 만큼 아이가 성장해 대화가 무르익는 것 같다.


 사춘기의 터널에 진입하면 또 어떤 격변의 시대가 우리의 앞에 놓일까. 그때도 아마 엄마인 나는 시를 읽으며 위로받겠지. 전하고 싶은 말을 짧은 시를 빌어다 표현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도담이가 엄마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 주면 좋고, 아니어도 뭐, 어때.


 평소, 아이에게 들려주고 싶었는데 일상에 쫓겨 말로 하지 못하는 이야기를 써보려 한다. 전직 국어교사의 경험이 도움이 될지, 방해가 될지는 모를 노릇이다.


시는 어렵지 않다. 많이 읽고 열심히 공감해보지 않은 우리가 있을 뿐.


 교사 아닌 엄마가 들려주고픈 시 스토리. 조심스레 한 페이지를 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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