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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효나 Sep 05. 2024

어떤 아침, 아이에게 보내는 편지

정호승 [새벽에 아가에게]

 민이와 준이.

[이 연재북에서는 '도담, 도동' 대신 너희의 본명을 불러주고 싶다. 그렇게 했을 때 엄마의 이야기가 보다 더 진짜의 것으로 다다를 것 같은 막연한 느낌 탓이란다.]


 민아, 우리의 아침 등굣길은 총알 없는 전쟁 같아. 매일 삼인일체로 움직여야 하는 분주한 시간이지. 늘 비슷한 루틴인데, 신기할 정도로 아침의 빛깔은 매일이 조금씩 다르다. 그래서 아침을 더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생겼나봐. 걸어가기엔 먼 거리라 매일 너를 태우고 아파트 주차장을 나서면 좁은 골목길이 나오잖아. 편의점 모퉁이를 돌아 좁은 길에 들어설 때면 엄마는 항상 약간의 긴장감을 품고 핸들을 돌린단다. 그 귀퉁이에는 ㄱ자로 굽은 등에, 하얗게 눈 내린 머리칼, 낡았지만 본디 분홍빛이었을 상아색 모자를 눌러쓴 할머니가 곧 부서져도 이상하지 않을 리어카 옆에 앉아 박스를 해체하고 계시곤 하니까. 전혀 안전해 보이지 않는 그 위치가 안락해서인지, 골목이라 사람이 적은 평온 때문인지 모를 일이지만 폐지를 줍는 그 할머니를 자주 보게 돼.


 타인의 삶을 어림짐작해 버리는 게 얼마나 무례한 일인지 모르지 않아. 그런데 그냥 한 가지. 고단한 삶의 시간이 할머니의 굽은 등에 내려앉은 건 느껴지더라. 가끔 등교 시간이 촌각을 다툴 때, 느리게 걷고 있는 할머니의 리어카의 뒷태를 만나면 막막한 느낌이 없지 않아. 시간이 멈춘 듯 천천히 이어지는 골목길이니까. 그래도 그냥 고요히 따라가 주는 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최소한의 응원인 것 같아서 조용히 기다리곤 한단다.


 골목을 지나 도로를 달리다 보면, 일주일에 2-3일은 보게 되는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잖아. 네가 '하루종일'이라고 칭하는 그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고 있는지 너무나 궁금한 사람. 어리게 본대도 40대 후반은 되어보이는, 50줄이래도 이상하지 않을 얼굴에 가늘고 빛바랜 금속테의 안경. 곱슬 머리를 한 갈래로 묶은 사람. 1초만 봐도 몸과 마음이 어딘지 좀 불편하다는 걸 짐작케 하는 모습이지. 한쪽으로 기울어진 몸에다 왼팔을 좌우로 떨며 흔들며 휘젓고 걸어가는 모습. 뭐가 들었나 싶은 검은 백팩을 메고 모자도 하나 없이 땡볕을 걷는 그녀를 올 여름에 참 많이 목격(?)했어. 너무 더워 쓰러질 것 같은 날씨에도 밤낮없이 걷는 모습을 보면 알 수 없는 사연을 어렴풋이 생각만 한단다.


  " 엄마! 저기 또 지나간다!! 팔 휘저으며 가는 아주머니. 근데 있잖아. 아빠 아침에 일찍 출근할 때도 저분 본 적 있대. 이 더운 날 땀을 비처럼 흘리면서 대체 왜 걷는 거지? 산책은 아닌 것 같은데 말이야. ”


  “ 그러게. 궁금해 할 수 있지만 섣불리 판단하지는 말자. 몸이 아플 수도, 마음이 좀 힘들 수도 있잖아.”


  “ 당연하지. 근데 아마 우리반 00이 같은 친구들이 봤으면 저 모습 따라 하면서 웃었을지도 몰라. 나는 안 그럴 거야. 어쩐지 좀 딱해. 이유는 몰라도 좀 힘들어 보이기도 하고. “


 할머니와 '하루종일의 그녀'에겐 공통점이 있더라. 체구가 작고, 구릿빛을 넘어 나무 기둥같은 고동의 피부를 가졌다는 것.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을 것 같은 느낌 말이야. 이 또한 엄마의 편견일지 모르지만. 무튼 그렇게 우리는 그녀에 관한 말을 더 잇지 않았지만 엄마는 그날 사실 조금 안도했어. 네 마음에 타인에 대한 이해? 연민? 같은 류의 마음이 함께 자라고 있음을 느꼈기 때문인가 봐.


 민아, 동정과 연민은 좀 다른 마음일 거야. 타인을 불쌍하고 힘없는 사람으로 생각하고 혀를 차기 보다는 그 사람의 마음과 힘듦을 이해하기 위해 애쓰는 노력. 그 과정에서 약간의 측은함을 갖는 것. 그건 어떤 인간 관계에서도 아주 필요하고 소중한 감정이거든. 짠하고 안쓰러운 마음을 가지면 사람을 아주 미워하거나, 혐오하거나, 증오하기는 힘들 일이지.


 학생으로서 해야 할 것은 공부라고. 엄마를 포함한 어른들이 참 많이도 가르치잖아. 내 옆에 함께 문제를 푸는 친구보다 더 높은 점수를 받아야 하고, 더 빨리 달려야 하고 말이야. 옆집 애는 벌써 2단 줄넘기를 한다는데, 수학 선행을 어디까지 했다던데. 우린 어쩌면 이런 말들 속에 살아. 더 잘 해야하고. 결과물을 보여줘야 하는 삶. 그래야 멋진 삶이 올 것 같고 살아남을 것처럼 앞을 보라고 말이야. 더 높은 곳을 향해 꿈을 크게 가지라고도 말해. 목표의식은 필요해, 높은 지향점도 중요하고 말이야. 엄마도 그 부분에서 아주 빠져나갈 수 없다는 걸 인정해. 그래서 이런 말을 하기에 겸연쩍기도 하단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건, 그것만이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이야. 민이가 서 있는 자리가 어디든 그 언저리에는 너보다 힘이 없고, 조금 더 어려운 사람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 무턱대고 ‘내가 나서서 모두를 도와야만 해 ’ 같은 마음이 필요한 건 아니야. "불쌍한 사람 내가 도와야지" 같은 마음은 때로 오만을 부르기도 해. 그냥 헤아리는 마음. 네가 가졌으면 하는 마음은 그런 거란다.


 고개를 들면 하늘빛은 아름답고, 높은 산은 멋지지. 높은 빌딩 속에 비싼 시계를 차고 있는 네 모습만이 좋은 삶의 완성이라 여기지 않기를 바라는 엄마의 간절한 바람이 긴 이야기를 만들어버렸어. 그냥 고개를 내려 조금만 둘러보면 길가에 아주 작게 피어 있는 들꽃이, 홀로 핀 애기똥풀이 보일 테니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가끔은 봐주는 이 없이 꺾이기 쉬운 들꽃을 보며 측은함을 느끼고, 애기똥풀에게도 생명과 생애가 있음을 깨닫는 마음이기를 바란단다.



아가야 햇살에 녹아내리는 봄눈을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사랑은 있는가 보다


아가야 봄하늘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를 보면

이 세상 어딘가에 눈물은 있는가 보다


길가에 홀로 핀 애기똥풀 같은

산길에 홀로 핀 산씀바귀 같은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한 송이 들꽃을 위로하는 사람이 되라


오늘도 어둠의 계절은 깊어

새벽하늘 별빛마저 저물었나니


오늘도 진실에 대한 확신처럼

이 세상에는 아름다운 것은 아직 없나니


아가야 너는 길을 가다가

눈물을 노래하는 사람이 되라  

                                - <새벽에 아가에게>, 정호승  

< 작고 고운 애기똥풀,  사진: pixabay>

 

예쁜 꽃을 보면 엄마를 떠올린다는 네게, 이 시를 보며 언제나 너를 떠올린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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