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춘의 무모함이 부러운
2024.08.23.
어린 시절, [보물섬] 등의 만화 잡지에서 이상무, 허영만, 이현세 작가의 야구만화들을 재밌게 읽었는데, 야구만화의 청춘들은 몸이 망가지더라도 내일은 없다는 듯이 오늘의 경기에 매진한다. 젊고 건강한 신체가 유한한 것임을 알지 못하는 때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지난 8월 23일 재일 한국계 학교인 교토국제고등학교가 106년 역사의 갑자원(고시엔)에서 우승하여 화제가 되었다. [H2] 등의 일본야구만화를 재밌게 읽은 사람으로서 갑자원*에 대한 특별한 마음이 있어서 결승전의 마지막 장면을 라이브로 지켜봤다.
빡빡머리의 고등학생들이 섭씨 35도에 육박하는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치고 달리고 던진다. 또래친구들은 뙤약볕도 마다하지 않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온몸이 부서져라 경기를 하는 모습이 만화가 아니라 실제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뭉클해졌다.
[설계자](2024년)는 청부살인을 사고사로 조작하는 이야기를 담은 영화인데, 엄하게 거대 음모론으로 빠지는 바람에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 알 수 없는 영화가 되어 버려 아쉽다. 여하튼 청부살인을 사고사로 위장해야 하기 때문에 킬러들이 팀으로 움직이는데, 팀원 중에 이미숙 배우가 연기한 재키라는 인물이 있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것으로 보이는 재키는 베트남 시절을 자주 회고한다. 그 시절이 뭐 그리 좋다고 자꾸 이야기하냐는 동료의 말에 재키는 이렇게 대답한다.
"젊을 때는 지옥이라도 아름다워."
첫 번째 항암 주사를 맞고 처방받아 온 약들 중에 근육통에 먹는 진통제가 있었는데 나는 되도록 진통제는 안 먹으려고 했다. 항암 후에 술을 한잔씩 할 욕심이 있었기에 간을 최대한 보호하고 싶었다. ㅎㅎ 결국 항암제가 독해서인지 팔다리가 아파와서 진통제를 먹긴 했지만 아직도 약이 좀 남아있다.
젊을 때는 몸을 아낄 줄 몰랐다. 아낄 필요가 없었다. 거의 매일 새벽까지 술을 마시고도 6시면 일어나서 출근했다. 사실 숙취가 뭔지도 잘 몰랐다. 운 좋게도 건강을 타고났다 보니 어쩌면 독이 된 것일 수 있겠으나 즐거웠으니 됐다. [설계자들]의 재키의 말처럼 설령 지옥이었더라도 그 시절의 젊음과 건강에 질투가 날 뿐이다. 그렇다고 늙고 병든 몸으로 사는 지금이 아름답지 않은 절대 아니다. 다만 젊은 시절이 부럽고 그리울 뿐.
8월 16일, 한 사진작가의 아내 1주기 추모식에 다녀왔다. 작은 인연으로 참석하게 되었는데 사진작가인 그분은 아내와 보낸 3,960일의 기록을 사진전으로 펼쳐냈다.
그의 아내는 삼중음성 유방암이 재발하여 돌아가셨다고 한다. 삼중음성 유방암은 에스트로겐 음성, 프로게스테론 음성, 표피성장인자(HER2) 음성, 이렇게 유방암의 원인 인자 3개가 모두 음성인데도 암이라서 삼중음성이라고 한다. 원인을 알 수 없기 때문에 치료가 어렵고 재발과 전이도 빈번하기 때문에 위험한 암이다.
함께 간 친구가 "ㅇㅇ씨는 좋겠다. 남편이 저렇게 기억해 줘서."라고 해서 나는 "죽은 사람이 뭘 알아? 다 산 사람의 자기 위안이지. 죽으면 끝이야."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다. 산 사람은 살아야지. 되도록 즐겁게.
먼저 간 아내가 그리워 추도식을 성대하게 치르는 것도 산 사람은 살아야겠기에 치르는 의식이다. 그 사진작가가 아직은 많이 힘든가 보다. 맘껏 그리워하고 그리울수록 더 즐겁게 살아가길 바란다.
난소암 정밀 검사 결과를 앞두고 있는 나도 더 재밌게 살면 된다. 난소암은 유방암과 달리 장기와 인접해 있는 부위라 만약 양성으로 나오면 사태는 좀 더 심각해질 것이다. 그래도 뭐 어쩌냐? 당장 죽는 것도 아니고 죽을 때까지 살아야지.
영화 [괴물](2006)에 이런 장면이 있다. 강두(송강호)의 딸 현서(고아성)가 괴물에게 죽은 줄 안 가족들은 장례식에 나타나 울고불고하다가 결국 서로 싸운다. 분명 슬픈 장면인데 코믹하게 연출한 감독의 실력에 탄복했었다.
기쁘기만 한 삶이 없듯이 슬프기만 한 삶도 없는 것 같다. 아직 덜 아파서 그런지 몰라도 병든 몸이라도 사는 건 고만고만하다. 예전 같지 않지만 마냥 쭈그리고 있지 않다. 아직은 살만하니까 즐거움을 조금이라도 더 추구하려고 하게 된다.
에세이 [허송세월]에서 김훈 작가는 심장질환 때문에 의사가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도 술을 마신다. 와인 두어 잔을 마셨다고 하는데 두어 잔은 세 잔 이상이라는 걸 술꾼들은 안다. ㅎㅎㅎ 치료에 도움이 안 될뿐더러 자신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음을 알고도 마시는 술은 더 달다.
유방암 환자와 술을 검색해 보면 단 한 방울도 안 된다는 의사가 있는 반면 와인 한 잔(^^*) 정도는 괜찮다고 하는 의사도 있다. 어떤 의사는 한 잔이 두 잔 되고 두 잔이 두 병 되고, 또 다음날은 해장을 해야 되니까 라면 끓여 먹게 되고.... 몸에 안 좋은 것을 쓰리콤보로 하게 되니까 아예 안 마시는 게 낫다고 했다. 완전 이치에 닿는 말이다. 그런데 술은 이치와는 거리가 좀 있다.
영화 [행복](2007)은 방탕한 생활을 하던 영수(황정민)가 간경변 치료를 위해 들어간 요양원에서 은희(임수정)를 만나 전개되는 사랑 이야기이다. 은희와 함께 살면서 술도 끊고 건강해진 영수는 어느 날 트럭에 짐을 싣는 일을 돕게 된다. 도움을 받은 트럭기사가 맥주 한 잔을 영수에게 권한다. 영수는 별 고민도 없이 한 잔을 쭉 들이키고 빈 잔을 보고 이렇게 말한다.
"참 어렵게 끊었는데..."
그러자 트럭기사는 무심하게 다음과 같이 말한다.
"몸에는 좋은데 재미가 없지."
플라톤은 술을 마시는 것으로 어른이 됐는지를 테스트할 수 있다고 했다 한다. 술을 마시고도 절제할 수 있어야 하니까 어른인지 아닌지 지표로 삼을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플라톤은 초기 저작인 [국가] 편에서는 술을 마시지 말라고 했는데, 나이가 가장 많을 때 쓴 [법률] 편에서는 위와 같이 술을 권한다고 한다. 대철학가는 나이가 들면서 왜 생각이 달라졌을까?
영화 [봄날은 간다](2001)는 녹음기사로 일하는 20대 중반인 상우(유지태)가 연상의 라디오 피디 은수(이영애)를 만나 사랑하고 헤어지며 성장한다는 이야기이다. 은수는 상우와 헤어지고 난 후, 어느 날 문득 상우를 찾아와 화분을 선물하며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길거리 한가운데서 상우는 은수가 선물한 화분을 되돌려 주는 것으로 둘 사이가 완전히 끝났다는 것을 확실히 한다. 서로 돌아서서 가는데, 은수는 여러 번 돌아보지만 상우는 딱 한 번 돌아본 후 고개를 돌린다.
이 장면을 찍을 때 거리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딱 한 번 정도 찍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필름으로 촬영을 하던 때라 제약이 많았을 거다. 허진호 감독은 상우가 돌아보지 않기를 원했다고 한다. 돌아보지 않아야 상우가 사랑을 통해 성장했다는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며 유지태 배우에게 절대 돌아보지 말라고 했다고 한다. 유지태 배우는 극 중 26살인 상우는 분명 돌아봤을 거라고 생각해서 돌아봐 버렸다고 한다. 26살의 남자는 첫사랑을 결코 잊을 수 없다고.... 다시 한번 더 찍을 기회가 없어서 결국 감독은 그 컷을 쓸 수밖에 없었고, 우리가 본 마지막 장면이 된 것이다.
[봄날은 간다]가 2001년에 개봉을 했으니까 촬영을 할 즈음 허진호 감독의 나이가 37세 또는 38세였을 것이다. 청춘이라고 하기엔 늦은 나이지만 그래도 젊은 나이다. 젊을 때는 자신에게도 세상에게도 좀 엄격하다. 이제 60대가 된 허진호 감독의 생각은 좀 달라졌을 수 있다. 되돌아보지 않아야 꼭 성장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셨으리라 생각한다. 되돌아봤지만 상우는 이별을 받아들였다. 오히려 돌아봤기 때문에 자신의 길을 더 잘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술을 꼭 끊어야 하는 것이 환자의 자세는 아닐 것이다. 유방암 재발률을 높일 수 있다고는 하지만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하고 싶다. 위험보다 사는 즐거움이 더 소중하다.
쾌락주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절제가 있어야 제대로 된 쾌락을 느낄 수 있으며, 술을 마시되 취해서 통제력을 잃지 말라고 했다 한다.
병든 몸이라서 예전처럼 매일 마실 수도 없으니 에피쿠로스가 말한 제대로 된 쾌락을 느끼려고 한다. 술을 끊지는 않았지만 어쩌다보니 모범적으로 술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니 지인들이여, 아픈 몸이라고 너무 엄격하게 술을 금지하지 말아 주시길. ^^*
갑자원*
갑자원을 고시엔으로 쓰는 게 표기법에 맞지만, 일본야구만화들이 처음 한국에 들어왔을 때는 고시엔을 한자음 그대로 읽은 갑자원으로 번역했기에 갑자원이 더 정서에 깊게 뿌리 박혀 있다. [슬램덩크]의 강백호가 원래 이름인 사쿠라기 하나미치가 아니라 영원히 강백호이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