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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영 Nov 16. 2021

내년에도 김장할 수 있게 해주세요.

할머니 김치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이유

김장을 했다. 올해도 또.


분명 작년에 다 죽어가는 소리를 내던, “이제 정말 김치는 사먹어야겠다”며 김장 종식 선언을 했던 할머니는 올해도 또 김장 날짜를 잡고 온식구를 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나는 올해도 어김없이 달려갔다. 대체 왜 여든넷의 힘든 몸을 이끌며 김치를 담가 먹느냐며 툴툴대기는 했지만.


사실 김장이 아니더라도 우리 집 외가 식구들은 이상하리만치 자주 모인다. 보통은 명절, 할머니와 할아버지 생신 정도에 모이겠지만 우리는 한달에 한번은 꼭 외가 모든 식구가 모여서 점심, 저녁을 함께 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 엄마, 아빠, 동생, 이모, 이모부, 삼촌, 외숙모. 재작년에 쌍둥이 사촌동생들이 생긴 후로부터는 두 명 추가. 아 참 우리 집에서는 팔자가 제일 좋은 올해로 네 살 먹은 강아지 별이까지.


말이 좋아 한달이지 가끔은 2주만에 다시 모이기도 한다. 아빠는 그게 지겨운지 이따금씩 약속이 있다고 둘러대며 할머니네로 가지 않는다.


사실 나도 가끔은 귀찮다. 평일에는 하루종일 회사에서 일하고 겨우 이틀 주어지는 내 시간인데. 그 시간에는 못다한 취미생활도 해야하고, 병원도 들러야하며, 남자친구와의 데이트도, 친구들 또는 인연을 이어가고 싶은 지인들과의 만남도 가져야 하니까.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할머니가 고작 집에서 5분 거리에 있는 할머니네로 부르는데 그걸 거절할 만큼 나는 모질지 못하다. 가끔은 일이 있어서, 바빠서 못간다고 해보지만 꼭 그런 날에는 음식을 한보따리 해서 직접 들고 오시기 때문에 괜한 수작은 부리지 않는 편이 낫다. 그리고 엄청나게 게으른 나를 일으킬 만큼 그 시간이 행복하기도 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장날 밥상
김장이 뭔지는 모르지만 배춧잎을 자꾸 얻어 먹으니 그저 좋은 별이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래, 올해도 배추를 스무 포기나 담갔다. 할머니는 커피가루부터 시작해서 돼지 잡내를 없애준다는 온갖 재료를 다 넣고 수육도 삶았다. 배탈이 자주 나는 탓에 이제는 잘 먹지 않는 생굴도, 배추속에 넣고 남은 양념도 식탁위에 올라왔다. 마지막으로 뜨끈한 배춧국까지. 김장날 밥상이 완성됐다. 허리를 두드리면서 복대를 졸라매는 할머니까지 상 앞에 앉으면 미션 클리어.


십 년 넘게 같은 레파토리다. 모두들 왜 자꾸 힘들게 김치를 담그냐고 툴툴대지만 젓가락을 든 손놀림은 빨라진다.


아니 이렇게 맛있게 하면 식당들은 어떻게 먹고 살아?
내가 할머니 밥 먹고 커서 다른 데 가면 웬만한 건 다 맛이 없더라.


어차피 올해도 해버린 김장을 어찌한담. 몸은 힘들어도 우리 할머니 마음은 행복해야하니까 괜스레 주접을 떤다. 강아지 살찐다면서 먹을 거 주지 말라는 이모 몰래 별이한테 배추도 몇개 던져준다. 살 좀 찌면 어때, 오늘 같은 날이 얼마나 된다구.


27년째 항상 내 옆에 있는 할머니

할머니가 여든 줄에 접어들면서 나는 모든 일의 0순위를 할머니가 부르는 것으로 바꾸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항상 나의 보호자였던 할머니였는데. 어느순간 할머니의 보호자가 나로 바뀌어있음을 느낀 게 그 즈음이었다.


할머니가 힘든 건 죽어도 싫지만, 할머니가 해주는 김치는 계속 먹고 싶다. 수육도, 곰탕도, 갈비찜도, 나박김치도. 할머니가 더 늙기 전에 요리법을 물려받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막상 배우려니 쓸데없이 일찍 이별을 준비하는 기분이 들어서 별로였다.


그래서 내 소원은 내년에도 김장을 하는 거다. 내후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그리고 어느날 더이상 김장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도 후회하지 않도록 세상만사 다 제쳐두고 할머니네로 달려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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