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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자 혜운 Oct 01. 2017

불평의 해결은 역지사지로부터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는 여성인 내가, 부자이지 않은 내가 살아가기에 어려운 부분들이 많이 있다.  
  
여성으로서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이 되는 것이 무섭고, 여성으로서 양육에 전념하지 않으면 비난을 받는 손가락질이 무섭다. 게다가 남성의 일자리가 부족해지는 상황이 왔을 때, 여성의 모성 본능을 불러일으키며 그에 대한 중요성을 더욱더 강조하게 되는 이 사회의 보이지 않는 힘이 무섭다.  
      
재벌가 다운 재력이 없음으로 인해 자유롭고 편안하게 배움을 영위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고, 재벌가 다운 재력이 없음으로 인해 다양한 사회‧문화적 경험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게다가 그 모든 아쉬움으로 인해 추후의 나의 사회적 지위에도 영향을 미치는 이 사회가 안타깝다.  
      
나처럼 이 사회에 대한 불만이 있는 사람들은 크든 작든 자신들의 불만 사항을 토로한다.  
“우리 회사에 있는 출산휴가는 그냥 이름뿐이야. 나 이번에 출산휴가 쓰면 승진에 문제 생길 거야.” 
“돈 있는 애들은 사교육도 많이 받고, 좋은 대학에 가고, 결국엔 좋은 직업을 갖게 되잖아. 다 지들끼리 해 먹는 걸.”

실제로 미국의 사회학자 파슨스(T. Parsons)는 사회질서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각장의 능력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자리에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하였는데, 즉 남성은 직장 내에서 경쟁을 하며 일을 하고, 여성은 자신의 능력에 맞게 가정을 지키며 어머니의 역할로 가정의 기반을 다져야 한다며 성 역할을 분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능력에 따라 차등 대우를 받는 것에 대한 어쩔 수 없음에 대해 주장하였는데, 이때 사회적 불평등을 야기하는 흐름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에게 Parsons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능력의 차이는 생득적으로 귀속된 원인들(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등)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취(학업성취)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파슨스(T.Parsons)의 이론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성취(개인적인 학업 성취 및 능력) 또한 경제적 자원이 뒷받침되는 경우 더욱 뛰어난 결과를 보이기 때문에 어차피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에 따라 자녀의 사회적 지위도 달라진다고 주장했다. 

    
Parsons를 비판하는 사람들 중심에는 마르크스(K.Marx)가 있었다. 마르크스는 사회적 불평등 자체가 자본주의에 내재되어 있으며, 자본주의. 물질만능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언급을 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자원을 많이 소유하고 있는 소유주/지배계층이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피지배계층을 통해 발생하는 이윤들을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있는 자들은 더욱더 부유해지고, 없는 자들은 더욱더 빈곤해지는 사회구조 속에서 변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들 속에서 내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두 가지이다. 

첫째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 내가/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둘째, 불평등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우리가 취해야 하는 태도는 
무엇인가?


두 번째 이야기부터 먼저 해보자면.
    
얼마 전에는 가슴 아픈 사회적 이슈가 뉴스에 방영되기도 했다. 한 지역에 특수학교 설립 여부를 놓고 토론하는 과정에서 지역 주민들의 반대가 심해서 지역주민과 장애아 부모들 간의 갈등 상황이 발생한 것이었다. 
    
동일한 뉴스를 반복해서 접하다 보니, 장애아 부모들의 심정이 이해가 돼서 속상하기도 하고 입주민들이 눈앞의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었다. ‘연대감’, ‘공동체’와 같은 단어들은 사라진지 오래인 것 같았다. 
    
그러데 솔직히 말해서
내가 그 지역의 주민이고, 나의 경제적인 이익에 중점을 두고 있는 사람이라면 나는 어떻게 행동했을까? 또, 그 지역 주민들에게 양심껏 돌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내 이익와 동등하게 다수의 행복, 혹은 함께 살아가는 타인의 안녕과 안위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가?’


위와 같은 질문에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크든 작은 나의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타인의 안녕에 관심을 두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솔직히 내가 몸담고 있는 직업군에서도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자기 이익을 우선시하는 상황 말이다. 일례로, 상담자가 되기 위해서는 자격증이 필요하다. 그런데 그 자격증을 따기 위해서는 상담 전문가에게 수련을 받아야 하는데 실제로 이 땅의 상담 수련생들은 돈을 받으면서 수련을 받는 경우가 많지 않다. 다수가 돈을 내면서 수련을 받는 경우가 많이 있다. 또한 상담 전문가들도 수련을 시켜줄 수 있는 위치에 올라가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상담에 집중을 하기보다, 수련생들을 받아 돈을 버는 것에 집중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아마도 그러한 몇몇 상담 전문가들도 수련생일 때는 상담계의 이러한 생리에 대해 비판이나 불평을 했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 또한 수련생을 통해 돈을 받을 수 있는 전문가의 위치에 오르고 나니 통념을 따르는 것이든, 혹은 자기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든. 어쨌든 간 이전에 자신이 비난했던 사람들의 전철을 밟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경을 목격할 때마다 나는 생각한다. 나는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으로서, 사회심리학에서는 인간의 특성보다 환경이나 자리에 따라 사람이 달라질 수 있다고 배웠으니. ‘그도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라고. 
    
그러나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기는 하다. 모두가 어떤 자리에 있든 ‘초심’을 잃지 않는다면 조금 더 나눠가질 수 있는 사회가 될 수 있을 텐데 말이다. 
    
그리고 또 하나 생각이 드는 건, 내가 불평했던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법은 그 일에 있어서 ‘나의 희생’ 또한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담계에서 수련생들이 "돈을 내면서" 수련을 받는 셋팅에 불만을 갖고 있다면, 나는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수련생들이 "돈을 받으면서" 수련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들면 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나 또한 상담 전문가들이 수련생들에게 받았던 돈을 받고 싶은 욕심을 버리는 용기. 내 이익을 포기하는 나의 작은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도 어느 정도 먹고 살 정도는 벌어야 하겠지. 다만, 그 기준이 내 양심에 걸맞은지, 그리고 다른 사람의 노동력을 함부로 착취하거나 노동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닌지 끊임없이 나 스스로를 검열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면, 특수학교 설립을 반대했던 지역주민들은 아마도 내게는 해당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지도 모르겠다. 내 가족은 장애가 없어. 내 가족에게는 장애아가 태어날 리 없어. 나는 장애를 갖게 될 일이 없어.라고 말이다. 상대방의 입장이 내게도 일어난다면. 나에게도 적용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도 조금 더 따뜻하고 조금 더 양보하는 합리적인 결정을 할 수 있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문제제기를 하는 것만이 답은 아니다.  
그 이후에 나는 어떻게 행동을 할 것인가가 더 중요하게 작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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