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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자 혜운 Aug 18. 2017

뚱딴지같은 철학적 사유

이번 주 수강신청 기간 동안 나는 엄청난 고민에 휩싸여야 했다.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마지막 학기를 좀 더 편안하게 다닐 수 있게 해주는 수업을 들으며 내 할 일에 좀 더 집중을 할 것인지, 아니면 정말 내가 듣고 싶은 수업을 들으면서 하루하루 죽어갈 것인지.
이번 달 최고의 난제였다. 

결국은 나답게 내가 듣고 싶은 과목을 신청했다.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었으나 나름 내 나이와 몸을 생각해서 잠시 깊게 고민을 했지만 
‘이번 학기도 뒈져버리지 뭐.’라는 생각으로 신청을 했다.

그토록 고민을 했던 수업 중에 철학과 사회학을 베이스로 두고 진행하는 수업들이 있다. 이 수업들을 그토록 듣고 싶었던 이유는 ‘사유’하는 능력을 키우고 싶어서였다. 

언제부턴가 심리학을 공부하고, 상담이론을 공부하며, 상담을 받고, 상담을 하며, 상담에 대한 지도감독을 받으면서 개인 내적인 문제나 개인의 현실적인 문제에 관심을 두는 것에서 벗어나 좀 더 확장된 관심을 갖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와 사회에 속해있는 사람들. 또 그들이 갖고 있는 신념이나 가치들. 

내가 몸을 담고 있는 전공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에 관심을 갖게 되다 보니, 자연스레 타과의 과목들이나 책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러한 일련의 시도의 하나로서 지난 학기에 수강했던 여성학과 수업이 내게는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해주었다. 가장 충격적으로 다가왔던 사실은 수강생들 모두 자신만의 철학, 자신만의 소신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얼핏 들으면 나를 바보로 알 것이다.  

‘너는 생각이 없이 살았니?’
‘너는 네 주관이 없어?’라고 질문을 하며 ‘아니잖아. 왜 그래~’라고 하겠지만 
나는 바보가 맞았다. 

수업은 주차별로 정해진 참고자료를 읽고 와서 토론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이 되었다. 토론을 한다는 것은 지식을 습득하여 자신의 것으로 체화하고, 거기에 더해 내 생각을 곁들여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상태로 갖춰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그 토론의 장에서 지식만 읊어댔다. 물론, 다른 사람이 듣기에는 내가 내 생각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릴 수도 있었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듣고, 읽고, 배운 이야기를 떠들어 대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다른 학생들은 달랐다. 어떤 다양하고 깊은 지식을 쌓았다는 느낌은 덜하지만, 설익고 매끈하지 못한 부분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자신만의 생각이 있었다. 

어떤 주제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
그게 정치가 됐든, 경제가 됐든, 사회가 됐든, 사람이 됐든, 물건이 됐든. 
어떤 그 무언가에 대한 자신만의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이고 중요한지 창피함을 느끼며 온몸으로 체험하게 된 것이다. 

내가 그 수업이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그들의 생각을 듣는 것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특히 더 좋아라 했던 쌤한테 수업 끝나고 감동에 벅차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 저는 선생님 생각을 듣고, 이야기 듣는 게 너무 좋아요. 더 자주 이야기해 주세요.”

내 말을 들은 그 쌤은 당황했을 것이다. 얼굴도 잘 모르고 친분도 없는데 다짜고짜 그런 인사라니.  그 뒤로도 나는 항상 그 쌤 옆자리에 앉아서 그분의 이야기를 초롱초롱한 눈으로 듣고 물었다. 

상담을 하다 보면, 특히나 집단원들끼리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집단상담을 하다 보면 사람에 대해서, 관계에 대해서 생각을 아니할 수 없게 된다. 이때는 상담이론이나 교육을 통해 들었던 지식들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관계에 어려움이 있어서 다시 잘 해보겠다고, 이 집단 안에서 새롭고 건강한 관계를 맺어보는 연습을 하겠다고 집단에 참여를 했지만, 결국엔 변화를 해야 하는 그 중요한 시점에서. 마음을 틀어버리는 경우가 있다. 변화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뼈를 깎는 아픔과 피를 토해내는 고통이 따르기 때문에 모두가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자연스럽게 든다. 

지금까지 건강하지 못하게 관계를 맺어왔던 이유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예, 버림받는 상황)을 마주하지 않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르게 관계를 해보겠다고, 변화를 해보겠다고 온 사람들은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마주해봐야 그다음 변화의 단계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는데, 그런 최악의 상황을 마주하게끔 하는 상황에서는 어떤 이론이든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상담자로서 혹은 집단 리더로서 가장 강력한 힘을 발휘해야 하는 때는 집단원들이 그러한 갈등의 기로에 섰을 때 얼마만큼 설득력 있게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가이다. 지금 내가 이렇게 힘든데, 이 힘든 일들을 돈을 내고 시간을 내면서 왜 해야 하는지. 그 부분이 설득이 되지 않으면 관계를 위해 노력하겠다는 그 의지가 마른 가지처럼 툭 부러져 버리기 때문이다. 

설득의 힘은 설득 관련된 책을 읽으면 키워지나?
아니면 다양한 상담 이론 혹은 인간의 마음과 행동을 연구하는 심리학 공부를 열심히 하면 키워지나? 
아니면 상담과 관련된 지도감독을 많이 받으면 키워지나?

위의 방법들도 물론 도움이 안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하고 영향력이 큰 것은 나만의 철학과 신조를 갖는 것이다. 

어떤 관계를 만들고 싶은 건지. 
왜 그 관계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건지.
사람들은 왜 그 좋은 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건지. 
등등

사람과 관계, 그리고 그 간의 상호작용의 원리들을 이해하며, 분석하고, 쟁점을 갖고 함께 토론하기도 하고. 어떤 이의 생각은 수용하기도 하고 비판하기도 하는.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나만의 생각을 갖게 되는 것이다. 

아직 초보 상담자라면. 
나도 물론 아직 초보 상담자에 속하겠지만. 
우리 모두. 
앵무새처럼. 교과서처럼. 
배운 대로 상담을 시연하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갖고 있는 인생의 철학. 사람에 대한 철학. 관계에 대한 철학. 
그리고 상담에 대한 철학을 가져야 하는 것이. 
진정으로 중요한 임무인 것 같다. 

이론이나 기법들은 내가 지향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단지 필요한 수단일 뿐이다. 중요한 핵심은 나라는 인간이다. 

내가 어떤 생각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냐에 따라 
나의 상담 결과나 방향도 매우 달라질 것이다. 

물론, 우리는 여전히 끊임없이 상담 과정에 대해 지도감독을 받아야 하는 초보 상담자이지만. 지도감독을 해주는 교수님이나 슈퍼바이저에게 반문을 할 정도로 내 생각을 갖고 있어야 한다. 고 나는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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