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이동을 하는 중이었다. 내 앞에 8-9살쯤 보이는 남자아이와 엄마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다. 갈림길이 나오자 둘이 걸음을 멈추게 되었고 내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엄마의 말소리가 내게도 들리게 됐다.
‘오늘은 위로 갈 거야? 아래로 갈 거야?’
‘으으으~~’
‘어떻게 할까?
아이가 몸을 왼쪽에 있는 비탈길로 향하자 엄마는 말했다. ‘우리 아들 오늘은 아래로 내려가기로 결정했구나? 그래. 좋았어 그럼 이따가 집에 갈 때는 위에 있는 길로 가면 되겠다, 우리 아들 결정도 잘하네~.’
엄마가 이야기하는 동안 아들은 자신의 생각을 언어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으아으아으아~’라는 소리만 냈다.
그때 알았다. 아이가 전반적으로 발달이 늦고, 여러 가지 어려움을 갖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동시에 들었던 생각은 반응 없는 아이에게 끊임없이 이야기를 전하는 엄마가 소진될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앞섰다. 이야기를 주거니 받거니 할 때 느끼는 정서적 교감이나 충족감이 이 엄마에게는 없을 거라는 나만의 생각이 퍼뜩 들었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이것도... 지극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편견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살아 있고, 엄마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 엄마에게는 큰 힘이 되고 소중하고 귀한 자식일 텐데, 내가 섣불리 오만한 생각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전에 다큐 프로그램에서 뇌성마비의 아버지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랑스러운 딸의 모습이 방송에 나온 적이 있다. 아버지는 딸아이 친구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딸아이가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할까 봐 항상 숨어 다녔다. 이를 본 딸아이는 아버지의 그런 모습을 오히려 더 속상해하며 친구들에게 당당하게 소개를 하였는데, 이를 본 사람들도 그 딸아이의 따뜻한 마음에 대해 감동을 많이 받았다.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생각들 또한 검열을 하는 일들이 많아졌다. 가끔 어떤 이를 볼 때 안타깝고 도와주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을 우월하게 여기고, 상대방을 나보다 못하다고 여기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에게 묻곤 한다.
생각이 많아지다 보니 걸음이 점차 느려져서 엄마와 아이는 내 앞에 지나쳐 갔고, 나는 또 혼자 조용히 걷게 되었다. 교실로 가는 동안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 내가 들어왔던 이야기들이 떠올랐고 그때 느꼈던 감정들에 빠지게 되었다.
‘청소년동반자’로서 청소년들을 만나는 상담자가 한 얘기가 생각이 났다.
‘복지가 필요한 애들인데 상담이라니...’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많았다. 예전에 근무했던 센터에서는 국가지원을 받는 ‘바우처 사업’을 시행했었다. 발달장애/행동문제/정서적 어려움이 있는 아이들이 나라에서 치료비/상담비를 지원받아 각자에게 적절한 심리지원서비스를 받도록 하는 사업이었다. 이 사업을 통해 만나온 아이들과 부모님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을 만날 때는 단순히 정서적인 부분만을 다룰 수는 없었다. 개인적인 정서적 곤란함의 해소나 부모-자녀 관계의 개선이 그들에게 행복이나 안녕감을 가져다주기 어려운 경우도 많았다. 경제적 어려움, 부모가 가진 인지적 능력의 제한점, 아이가 갖고 있는 신체적 제약 등 한 개인과 한 가정이 해결해야 할,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들이 버겁게 느껴졌던 경우가 많았다.
그와 동일한 시기에 근무했던 다른 센터는 서울 내에서도 교육열이 치열하다는 곳이었고, 그마만큼 경제적으로도 풍족한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곳 부모들의 상황과 아이들이 처한 어려움은 경제적/환경적 자원이 너무 과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두 극단의 환경에서 동시에 일을 하게 되면서 내가 느끼는 괴리감은 상당했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다는 것.
모두에게 기회가 동일하게 주어지지 않는다는 것.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 다른 처지에서 너무 다른 대우를 받으며 살아간다는 것.
그중에서 아직도 계속 마음에 남아, 문득 떠오를 때마다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은 환경적/경제적인 어려움이 아니었다. 나를 마음 아프게 만드는 것은 ‘타인과의 비교를 통해 스스로 작아지는 모습’을 볼 때였다. 스스로 세상의 편견에 몸을 던져 그 고통을 고스란히 체감하는 상황에서 마음이 더 좋지 않았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에 비해 인지 발달의 지연을 보여, 부모 스스로가 이를 부끄러워하고 본인이 숨고 싶어 할 때 그 아이가 느꼈을 외로움과 두려움. ‘혼자서 낯설고 무서운 세상에 맞서 싸워가야 하는 고통감’을 생각해보면 마음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그 부모와도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기에 그 부모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 부모 또한 자신 스스로를 부끄러워 여기기 때문에 나서지 못하는 것이었다.
나는 상담자로서 아이와 부모에게만 접근을 할 수 있어서 이들이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며 자세를 낮추는 상황을 바꿔주기 위해 노력한다. 이런 상황에서는 가끔 개인적인 접근만 하는 것의 한계를 느끼게 되기도 한다. 이따금... 이 세상의 부조리한 편견과 차가운 시선들을 변화시키기는 어렵다고 느낄 때가 있기 때문이다.
개개인에게 접근하여 그들의 생각을 바꾸고, 세상에 당당하게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을 아끼지 않겠지만, 세상의 움직임도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도 강렬하게 일어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