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수리와 소녀
굶주려서 쓰러져 있는 소녀와 그 뒤에서 소녀가 죽어가는 것을 기다리는 굶주린 독수리다. 이 사진은 1994년 퓰리처상을 받은 사진으로, 사진작가인 케빈 카터(Kevin Carter)는 수단의 식량 배급소로 가는 도중에 이 장면을 발견하고 사진에 담기 위해서 무려 20분간은 기다렸다고 한다.
그는 이 사진으로 가장 권위 있는 퓰리처상을 수상하였지만 그와 동시에 보도사진의 윤리성에 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사진이기도 했다. 수상 후 3개월 뒤 그는 자살로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 그의 스토리를 보고 싶다면 아래의 영화를 추천해준다. 또한 포토 저널리스트뿐만 아니라 사회과학 연구자로서 사회적 참여에 대한 고찰을 하기에도 도움이 되는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서 그의 사진을 두고 사람들은 질문을 한다.
‘그 뒤에 소녀는 어떻게 되었나요?’
‘소녀의 운명은요?’
‘사진을 찍고 소녀를 도와주었나요?’
‘독수리를 쫓아냈나요?’
‘바로 도움을 주지 않고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렸나요? 왜요?’
영화 속의 그는 이 질문들을 받고 깊은 고뇌에 빠지게 된다.
실제로, 수단 취재에 같이 동행했던 동료의 말에 의하면 실제 상황은 이렇다. 카터는 한 소녀가 급식센터로 가는 것을 보았고, 그 아이의 사진을 찍으려고 쭈그리고 앉았을 때 소녀 뒤로 독수리 한 마리가 내려앉았고, 독수리가 날갯짓을 하면 더 완성도 높은 사진이 될 것 같아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나 독수리가 아무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셔터를 누르고 독수리를 쫓아냈다고 한다. 그 소녀는 다시 일어나 급식 센터로 걸어갔다고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건 이후의 소녀의 생사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았던 카터에 대해 비난을 쏟아냈다고 한다.
그가 독수리와 소녀를 발견한 시점에서 위험에 처한 한 소녀를 구하는 것이 타당한 행동인지 혹은 죽음의 위기에 처한 소녀의 사진을 통해 전쟁 중인 아프리카 남부 수단의 비참한 현실을 고발하는 것이 사진작가로서 더 타당한 행동인지.
과연 나였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당신이었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
영화 속 그가 생각해낸 질문의 답이 인상에 남는다.
“좋은 사진이란 질문하게 만드는 사진이죠.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닌 사진은 그 이상의 것이죠.
세상에 나가면 나쁜 것들이 보이죠. 악한 행동들이요.
뭔가 하고 싶어서 그 상황을 보여주는 사진을 찍는 거예요. “
사진작가로서 사회적으로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행동이 무엇인지 고민한 후에 찾아낸 답이라고 생각한다. 카터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기 발로 위험이 난무하는 지역에 들어갔다. 일시적인 도움보다 그 당시 수단에서 벌어지고 있는 처참한 현실에 대해 보도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 각자가 중요하다고 여기는 가치에 따라 선택하는 행동이 달라질 것이다.
나는 이 사회에 어떠한 기여를 하고 있는가?
나 또한 1-2년만 해도 사회·경제·정치에 전혀 관심이 없었고 알지도 못했다.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내 힘이나 영향력은 미비하기 때문에 ‘나 하나 잘 살자’라는 생각을 갖고 개인적인 이득에만 취해 살아왔던 것이다. 솔직히 현재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알고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사회적 구조가 어떻게 형성이 되어있는지도 모른다.
다만, 내 개인적인 인식의 변화가 조금씩 일어나고 있을 뿐이고, 내 시야가 조금 더 넓어졌으며, 가슴 벅차게 만드는 활동이나 생각이 무엇인지 알아가게 되고 있을 뿐이다.
영화 도가니의 마지막 장면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우리가 싸우는 이유는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이 우리를 바꾸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나에게도 세상을 바꿀 만한 힘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사고가 무형의 힘에 의해 지배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우리의 힘은 인식의 변화로부터 발생할 수 있다. 기존의 기득권층이 자신들의 권력과 지위를 지키기 위해 사회적 약자에게 주입시켰던 생각들에 젖어있기보다 조금 더 의식적으로 이 사회의 체제에 대해서 인식을 해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회적 약자들도 인식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도록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심리학자나 상담자는 어떠한 일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무엇이 있을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직업의 종류에 따라 각자 지켜야 하는 선이 있는지 말이다. 개인의 심리적 안녕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상담사는 개인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나 심리적인 영역 외에 다른 부분까지도 관심을 가지면 안 되는 것인가? 예를 들어, 사회복지사는 어떤 측면에서는 우리의 직업과 비슷하지만, 개인의 심리적인 부분에 집중을 하고 있는 상담사와 다르게 좀 더 넓은 영역에서 개인의 사회경제적 복지를 책임지고 있다. 나는 우리 상담사들도 너무 개인적인 영역에만 초점을 맞춰서 좁은 시야로 활동하기보다는 좀 더 영역을 확장해서 다양하게 활동을 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 한 개인을 상담할 때 우리는 넘어서면 안 되는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암묵적으로 배우게 되기도 한다. 개인의 심리적 안녕을 넘어 그 사람의 삶에 너무 깊숙이 들어가면 안 된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타인의 인생이나 삶을 좌지우지할 수도 없고 그럴 능력도 없고 자원도 없다. 그러나 직업마다 역할이 분리되어 있고 각자의 영역을 지켜줘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상담사가 사회복지사의 영역까지 혹은 교사의 영역까지 넘나들면 자신의 직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혹은 내담자에게 역전이 감정을 느끼는 것과 같이 해결되지 않은 자신의 문제로 인해 오지랖 넓은 행동을 하게 되는 것일까?
물론, 상담사가 개인의 심리적 안녕을 간과한 채 다른 영역에만 관심을 두라는 것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개인을 면대 면으로 만나 그가 정서적인 안정감을 찾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어떤 가치관과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내담자에게 미치는 영향이 달라질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개인의 안녕감에만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국가나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개인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가치관을 세웠으면 하는 바람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작든 크든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솔직히 말해, 개인에게만 초점을 두는 것이 아니라 더 넓은 영역으로 일을 확대해 나가는 것도 굳이 막을 생각은 없다. 더 넓은 곳에서 다양하게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도록 활동을 한다면 그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겠느냐는 말이다.
사실, 나도 구체적인 답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내가 꿈꾸는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은 무엇인지.
그러니 같이 고민해보자. 내가 하고 있는 공부, 하고 있는 일, 갖고 있는 능력으로 이 사회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