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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상담자 혜운 May 07. 2017

나를 기억해 줄래요?

당신의 하루, 혹은 일상에서 내가 문득이라도 기억이 나기를...

20대 초·중반에는 연애를 하거나 관계를 맺는 것이 서투르고 어려웠으며, 감정적이며 충동적이었다. 그때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사람들이 나를 으레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도 했었고, 내가 원하는 대로 관계가 형성될 것이라고 자만도 했었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고 거절도 많이 당했으니 당연히 현실 감각이 없는 생각이라고 보면 되겠다. 

  
그러한 망상적 사고는 이별을 한 뒤에도 유지가 됐었다. 내가 이별을 통보하자마자 바로 전-남자친구로 전향된 사람이 나에게 여전히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을 것이라고 착각을 하며 지냈었다. 이별을 하게 되기까지 서로가 얼마나 싸우고 투쟁하며 미워했는지도 잊은 채 말이다. 
  
그런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나를 좋아한다고 착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기억해 주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때로부터 몇 년이 흐른 뒤, 오랜만에 좋아하는 감정이 드는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 느껴진 것이 바로 그 마음이었다. 그 사람이 나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기를, 그리고 문득문득 내가 떠올라 내 생각을 하기를 바라고 있는 내 마음.


나를 기억해줘요


그 사람의 삶 속에 내가 없지만 어떤 음식을 먹을 때 내가 생각나고, 어떤 음악을 들을 때 내가 그리워지며, 어떤 장소를 갔을 땐 나와 있었던 일들에 대해 생각이 난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족이 될 것 같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의 일상을 살아가면서 나를 생각하는 찰나가 있다는 것: 그 생각만으로도 소박한 행복감이 드는 일이다. 사뭇 내 존재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 아니라는 반증의 느낌이랄까. 
     
문득 생각이 난다는 것. 생각이 났을 때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고 단지 사실만 떠오르는 그러한 생각 말고, 긍정적인 감정가가 묻어 있는 기억의 회상이 일어난다는 것: 그것은 내 존재가 아직 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에 내 애틋한 마음에서 욕심을 내는 것일 수도 있겠다.


나를 잊지 말아요



반대로 내가 질문을 받는 경우도 많다.
‘평상시에, 일주일 동안 나를 얼마나 생각하세요?’
‘만나는 사람이 많고 일이 많아 바쁜 듯 보이는데, 나를 생각할 시간이 있어요?’
  
그들의 마음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어떤 마음인지 너무 잘 알 것 같아서 공감하게 된다. 누군가에게 존재감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 그 마음. 이는 보편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갖고 있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상대방의 삶에 내가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얼마나 존재감 있는 사람인지 확인하는 방법으로 연락오는 횟수로 판단하게 되기도 한다. 특히 연애를 하는 관계에서는 더욱 그렇다. 내 생각이 날 때마다 연락을 한다고 생각하기에 썸을 타는 시기부터 상대방의 연락오는 횟수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 같다. 나를 얼마나 생각하고, 나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외현적인 징표이기 때문에. 




영화 '러덜리스(Rudderless 2014)'
이 영화를 보며 사람들의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총기 난사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으로 인해 학생 6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 사건의 가해자도 그 자리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7명의 사망자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학교 도서관 앞 기념비에는 단 ‘6명’의 이름만 새겨 기리고 있었다. 가해자의 이름은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 가해자는 생각하기도 싫은 사람이고, 생각나서도 안 되는 사람, 기억 저편에 지워버리려는 사람인 것이다. 어쩌면 온전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을 수도 있고,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악의 존재로 기억될 수도 있겠다.


도서관 기념비에 가해자인 아들의 이름만 제외한 채, 나머지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있는 비를 보고 가해자의 아버지는 '내 아들아, 아들아, 아들아'라고 연신 부르며 오열을 하게 된다.


이 영화는 가해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다. 어느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는 가해자의 이름. 가해자와 알고 지냈다는 것만으로도 수치스럽고 괴로운 일이 되어버린 상황. 이 상황에서 그 가해자의 아버지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인가?
  
영화를 보는 내내 아버지의 마음, 감정에 대해 생각해보고 그 감정선을 따라가게 만드는 영화였다.

"나는 가해자의 엄마입니다(수 클리볼드, 2016)"라는 책 또한 비슷한 내용으로 이는 실제 인물이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갔는데 가해자의 가족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알고 싶다면 이 책도 읽어보면 좋을 듯하다. 출퇴근을 하면서 읽으려고 샀던 책인데, 공공장소에서 읽으면 안 될 책으로 규정되었다. 책을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눈물. 콧물을 감추느라 갖은 애를 다 써야 하기 때문이다.


영화의 주인공, 가해자의 아버지 또한 아들이 죽은 후 아들을 잊은 채 살아가고 있었으나, 조금씩 자신의 마음속에 아들의 자리를 마련해 준다. 그 과정이 가슴 먹먹하고 무겁게 다가왔다.
  
누군가에게 기억된다는 것.
누군가를 기억하며 살아간다는 것.
  
잃어버려 되돌 릴 수 없는 관계라면 가슴 아프겠지만,
그 기억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하는 듯하다.
  
마지막으로 영화의 엔딩 장면에서 가해자의 아버지가 부르는 노래 가사의 일부분을 덧붙이며 이 감정을 함께 공유하고자 한다.   


“.... 만약 이 노래를 어디선가 듣고 있다면 함께 불러다오.
어쩌면 사랑이 유일한 답일지도 몰라.
네 노래를 부를 방법을 찾아볼 테니 함께 불러다오.
잃어버린 것은 돌아오지 않고
떠나버린 것은 잊혀지지 않아
너와 함께 이곳에서 같이 부르고 싶구나.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덧. 민감한 문제라서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피해자에게 고통을 안겨준 가해자의 행동이 승인되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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