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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12. 2022

깨진 유리컵을 치우며

관계의 온도차를 생각하다

차가운 음료를 별로 안 좋아해서 아무리 더운 여름에도 냉커피를 안 마셨었다. 그런데 올해는 유난히 냉커피가 당겼다. 마시고 고생하는 날도 있었지만 차가운 것을 들이켜면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은 쾌감이 좋아 냉커피를 자주 마신 여름이었다.


평소에는 카누 스틱 하나를 뜨거운 물에 녹이고 찬물을 조금 부어서 미지근하게 만든 뒤 얼음이 담긴 컵에 붓고 얼음이 잠길 정도로 찬물을 부어 냉커피 한 잔을 만들었었다. 오늘은 그 과정이 귀찮게 여겨졌다. 유리컵에 커피가루를 넣은 뒤 바로 뜨거운 물을 부었다. 순간, 쩍 소리가 나더니 유리컵에 길게 금이 가버렸다. 아뿔싸! 싶었지만 이미 늦은 일이었다. 이 컵은 더 낮은 온도까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어쩌면 뜨거운 물을 받아들일 수 없는 유리였는지도 모른다.


두 쪽으로 갈라진 컵을 한쪽에 두고 책상에서 흘러내리고 있는 커피를 닦아냈다. 커피는 자기는 아무 잘못이 없다는 듯 여전히 뜨겁다. 그래, 뜨거운 건 잘못이 아니다. 그렇다고 뜨거운 걸 받아들이지 못한 유리컵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서로 온도가 달랐을 뿐이다. 너무 큰 온도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사달이 난 것뿐이다. 뜨거운 커피도, 뜨거운 걸 받아들일 준비가 안된 유리컵도 잘못이 없다.


사람 마음도 온도차가 너무 크면 이렇게 금이 가겠구나. 당신과 나의 마음 온도가 이렇게 컸다는 걸 내가 몰랐던 거구나. 내가 너무 뜨거웠거나 당신이 너무 차가웠거나, 아니면 그 반대이었거나, 우린 이렇게 금이 갈 만큼 차이가 큰 마음 온도를 서로에게 가지고 있던 거였는데 그걸 몰랐던 거였구나. 그걸 알았다면 내가 천천히, 아주 서서히 당신의 온도에 맞춰갔을 텐데.....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깨진 유리컵을 치웠다. 곁에 두면 다치기만 할 뿐 다시 사용하기 어려운 컵이다. 쓸 수 있는 방법은 다 깨 부시고 열을 가해 다시 만드는 수밖에 없다. 나는 만드는 법을 모른다. 안다고 한들 내 능력으로는 힘든 일이다. 그러니 버리는 수밖에.


깨진 컵을 신문지로 싸고 또 싸고 몇 번이나 감싼 뒤 유리테이프로 단단히 감았다. 그 위에 빗물에도 번지지 않을 빨간 매직으로 '깨진 유리'라고 썼다. 이제 그 뭉치를 본 누구라도 깨진 유리라는 것을 알 것이다. 이 유리 때문에 다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쓰레기 봉지에 담아 대문 밖에 내놓고 다시 한번 쳐다본다. 깨진 유리라는 네 글자가 피로 쓴 글자처럼 선연하다.


 골목 저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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