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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우 Jan 12. 2022

슬픈 비상

선입관 깨기

우리 집 마당에는 불청객이 산다. 나무마다 줄을 걸어 놓는 거미이다. 웃자란 넝쿨 장미 가지를 자르려고 소나무 밑을 지나다가 얼굴에 거미줄이 감긴 적이 있다. 그 기분이 얼마나 섬찟한지 모른다. 허리를 최대한 굽히고 조심해서 지나갔는데도 어쩔 수가 없었다. 눈에 안 보이는 줄이 더 있었던 것이다. 그 뒤 거미줄이 보이는 대로 걷어내 버렸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걷어내고 나면 어느새 또 줄을 걸거나 다른 나무에까지 줄을 걸어 영역을 넓힌다. 그 부지런함을 칭찬해야 마땅할 터인데 거미에게만은 그런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엊그제는 빗자루를 들고 나무에 있는 거미줄을 다 걷어버렸다. 그랬더니 급기야 우리 집 키 큰 나무와 앞집 뒷베란다의 비가림 차양 끝에 줄을 걸어 놓았다. '아이고.. 저도 저렇게라도 살아야지 어쩌겠나.' 싶어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오늘 아침 마당을 살피다가 가까이 다가가 올려다보니 거미 한 마리가 공중에 떠 있었다.


아! 거미는 날고 싶었던 것일까. 슬픈 비상이었다.


열심히 줄을 뽑아 망을 짜고 먹잇감이 걸려들기를 기다리는 것이 거미의 생존 전략임을 안다. 그것을 알면서도 생존을 위한 그 행위마저 못마땅해하는 인간의 손을 피할 수 있는 곳은 저 높은 데밖에 없었나 보다. 그래서 창공에 이상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곳은 얼마나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곳이던가. 요란스럽게 울어대며 집 마당에서 먹이활동을 하는 동박새라던가 아침마다 시끄럽게 지저귀며 잠을 깨우는 참새떼라든가 가끔씩 날아드는 비둘기에게 저 거미는 눈에 잘 띄는 사냥감일 게 분명하다.


생명의 가치를 놓고 본다면 거미나 나비와 벌을 구분해선 안될 것이다. 그런데 이로움과 해로움을 논할 필요도 없이 내게 거미는 음흉하거나 사악한 이미지로 낙인찍혀 있다. 내게 특별히 해를 입힌 것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싫은 것을 보면 거미에 대해 지독한 선입관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나무에 걸린 거미줄을 걷어내는 나를 보고 남편은 모기를 잡아주니 그냥 두라고 한다. 나는 벌이나 나비가 걸리면 어떻게 하냐고 한다. 모기는 괜찮고 벌과 나비는 안 되는 편애의 극치. 설령 모기를 잡아준다 하더라도 벌과 나비를 잡아먹는 게 더 싫은 것은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옹호하는 이 편협함. *꽃들에게 희망인 나비가 희생당하는 것을 볼 수 없다는 그럴싸한 이유로 무장한 채 행하는 간섭.  


생존에 필요한 것보다 훨씬 과한 양분을 섭취하여 뒤룩뒤룩 살이 찐 인간이 거미의 생존을 위한 먹이활동에 대해 손가락질할 자격은 없을 터이다. 인간은 더 지독하고 더 잔악한 방법으로 살생을 저지르며 미각의 즐거움을 채우고 있지 않던가.


언젠가 거미의 생태에 대해 읽다가 모성이 지극한 종류도 있다는 것을 얼핏 읽은 기억이 있다. 사실인지 아닌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저 생명도 자식을 낳아 키우는 어미임에는 분명하지 않겠는가. 이제 마음을 고쳐먹어야겠다. 새끼 있는 생명이 가진 고귀한 모성을 모른 체해서는 안될 일이니 내가 마음을 고쳐먹을 수밖에.


그렇다고 거미를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 생명 있는 모든 것은 살아갈 이유가 있을지니 섣부른 편견으로 인해 생긴 미운 맘을 거두기로 했다. 사랑할 수는 없어도 바라볼 수는 있지 않겠는가.


날개 없는 생명이여,

너의 슬픈 비상에 고개 숙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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