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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 11시간전

Ep.06_3 이것저것 맘이 시키는 대로

나를 조각하자

 저녁 비행기로 제주도에 도착하여 밤늦게 기숙사에 짐을 풀고, 다음 날 회사를 찾아갔다. 지정된 장소에서 기다렸더니 인사담당자님께서 오셔서 정신이 없는 나를 이리저리 안내해 주셨다. 난생처음 보는 광경들의 연속이었다. 유니폼실에서 신발과 유니폼을 맞추고, 사원증으로 세탁이 완료된 유니폼을 꺼내는 법을 배웠다. 식당, 휴게실, 샤워실 등 각종 시설을 안내받고, 내가 일하게 될 업장의 차장님과 인사를 나누고 식사를 하러 갔다. 식사 자리에서, 나는 사실상 다섯 시까지 출근해야 한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게 된다. 아침 뷔페 조라서 5시 30분부터 근무 시작인데, 기숙사에서 출발하는 버스가 업장 건물에 5시 아니면 5시 30분에 도착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보다.. 하고 체념한 상태로 점심을 먹고 업장으로 처음 들어갔다. 일에 적응되기 전까지는 손이 빠른 편도, 정교한 편도 아닌데 이것 때문에 첫날부터 욕을 좀 먹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첫날 엉성하게 앞치마를 매고 벙쪄 있는 나에게 작은 소스 그릇에 소스를 조금씩 담아 그릇 50개를 채워 쌓아 놓는 과제를 맡기셨다. 숟가락으로 쓱 떠서 소스 그릇에 툭툭 쳐서 담으면 되는 일이었는데, 그릇 위쪽에 안 묻게 담으려고 몇십 분째 숟가락, 소스 통과 씨름하고 있는 나를 보고 한숨을 쉬시고는 그렇게 해서 언제 끝내냐고 하셨던 게 생각난다. 헬스 키친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고성이 오가는 주방을 화면에서 봐 온 터라, 꼽 먹을 것을 어느 정도는 준비(?)하고 있었지만, 내 무능에 화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첫날인데 앞으로 어쩌나 하는 생각이 머릿속에 맴돌았고, 불편한 마음으로 잠에 들었다.


 다음 날, 빵 파트로 배정된 나는(아침 타임 신입은 처음에는 대부분 빵 파트에 배정된다) 펜과 작은 노트를 들고 오븐과 주방, 홀을 뛰어다니며 첫 인수인계를 받았다. 그다음에는 어쨌는지 솔직히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새로운 것들을 배우며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일주일 정도가 지난 휴일, 제주도에서 꽤나 내륙 지역(?)에 있는 호텔에서 근무하던 나는 제주도에 왔는데 비행기를 타고 넘어올 때를 빼고는 바다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바다였던 사계해변으로 떠났다. 버스를 타고 49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밤이 되어 검푸른 바다와 현무암으로 까만 해변, 시원한 파도 소리와 바다의 짠내가 나를 반겨 주었다. 제주도에 사니까 이런 건 진짜 좋구나.. 생각하며 멍하니 바다를 바라보다, 다음 날 근무가 있던 터라 저녁 8시 반에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맵을 켜 길을 찾았다. 뭔가 이상했다. 기숙사로 가는 차가 없는 것이다. 오싹한 기분이 등골을 훑었다. 추워서 그런가 휴대폰 배터리도 빠르게 줄고 있었다. 급하게 다운받은 카카오택시는 배차가 없다는 사실만 알려줬고, 정신을 다시 차리고 콜택시를 찾아 전화했지만 지금은 차가 없다는 싸늘한 답변만이 돌아왔다. 와.. 이거 더 망설이다간 답도 없겠구나..라고 생각하고 도보 시간을 검색해 봤다. 두 시간 반이 찍혔다. 퍼뜩 지금 가야 대여섯 시간이라도 잘 수 있겠다는 사실이 뇌리를 때렸고, 바다를 떠나는 언덕길로 발을 옮겼다. 버스 안에서 볼 때는 멋지고 웅장해 보였던 산방산이 밤빛에 까맣게 물들어 나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았다.


 가로등이 없어 칠흑 같은 거리를 열심히 걸었고, 몇 없는 가로등과 자동차 불빛을 반가워하며 계속 발을 굴렸다. 한 시간 반이 넘게 갔던가, 옆으로 택시가 쌩 하고 지나갔다. 멍 하는 새에 택시는 저 멀리 붉은 점으로 사라져 갔고, 웃음이 났다. 사실 나는 지금까지 걸어온 게 좀 아까웠던 것 같다. 소리 지르며 뛰었다면 택시를 탈 수 있었을지도 모르건만, 딱히 그러지도 않았고, 그럴 생각도 안 했었다. 그냥 내가 제주도에서 까만 밤에 도로를 걷고 있다는 사실에 웃음만 나왔다.


 휴대폰 배터리는 떨어져 가고, 점점 초초해지던 중에, 다행히도 눈에 익은 풍경이 보였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휴대폰을 확인했고, 휴대폰은 11시 38분이라는 시간을 보여 주고 곧바로 꺼졌다. 다섯 시간도 못 잘 예정이었지만, 그래도 나름의 안도감과 뿌듯함(?)이 있었다. 다음 날 새벽 카페인을 때리고서야 겨우 하루를 버틸 수 있었고, 근무가 끝난 지 얼마 안 돼서 침대에 쓰러지자마자 잠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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