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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A Nov 04. 2024

Ep.06 이것저것 맘이 시키는 대로

나를 조각하자

새로운 방향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다.


 전역 후, 안타깝게도 나에게는 미래를 보장할 어떤 뾰족한 수가 주어져 있지 않았다. 여자사람친구들은 졸업했거나 졸업을 앞두고 있었고, 대학원을 앞두고 있거나 취업을 준비하는 그들의 모습은 나에게 묘한 상실감을 안겨 주었다. 전역 후 칼같이 복학한 나는 교환학생 가산점을 받기 위해 대학을 다니는 외국인 분들을 돕는 봉사 단체에 들어갔다. 교환학생은 나에게 일종의 로망이었고, 수능 이후 가족 여행으로 다녀온 독일 뮌헨에서 꼭 살아 보고 싶었다. 아무튼, 가산점만 보고 들어간 것은 아니고 군대에서 막 나왔으니 나름의 사회 활동을 해 보고 싶기도 했다.


 봉사 동아리에는 좋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아서, 꽤나 재미있게 동아리 활동을 했다. 말주변이 없는 나에게 먼저 다가와 줬던 사람들 덕에, 나도 편하게 활동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지만 외국인 몇 명을 배정받아 1:1 또는 2:1로 사람들을 대면하여 내가 대화를 어느 정도 이끌어 가야 하는 상황에서는 어려움을 느꼈다. 말이 뚝뚝 끊기기 일쑤였고, 몇 번의 핑퐁 후에는 고통스러운 정적이 찾아오곤 했다. 전부터도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지만 내가 스몰토크를 잘 못 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한 학기의 활동 이후 외국인들보다 한국인들과 노는 게 재미있었던 나는(…ㅋㅋㅋ…) 임원진에 지원했다. 그렇지만 떨어졌고, 그때부터 진로 탐색을 위해 경험해 볼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지원해 보기 시작했다.


 먼저, 어릴 때 동물을 좋아했던 것을 떠올려 에버랜드 사육사에 지원했다. 어릴 때 공룡, 곤충을 좋아했고, 몇몇 동물들을 키워 본 경험이 있었어서, 실제 일로 동물을 접하면 어떨까 싶었다. 결과는 면접 전형에서 탈락. 그 후에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3주까지 겨울캠프에 지원했다. (선생님을 경험해 보고 싶었던가...? 아니면 에버랜드 탈락이 마음 아파서 붙을 만한 곳을 찾은 것이었던가...? 정말 모르겠다.) 이곳은 3주 동안 기숙사와 독서실에 갇혀 있는 중고등학생들과 같이 지내며 공부를 알려주는 곳이었다. 어찌저찌 붙어서 3주 동안 애들이랑 같이 어디 시골에 갇혔다. 알바생들을 태운 단체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칙칙한 회색 빛의 바다가 보이고, 그 위로 갈매기 한 마리가 날아가던 게 생각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즐거운 경험이었다. 3주 동안 아이들의 담임 격이었던 나는 너무나 천사 같은 학생들을 배정받았고, 3주 동안 내 속을 썩히는 일 없이 다들 너무 열심히 해 주었다. 게다가 기숙사 같은 방에는 같은 학교 같은 학과의 한 학번 후배, 같은 학교 선배가 몇 명 있었고, 알바 전까지는 서로의 존재도 몰랐지만 3주 동안 동고동락하며 재미있는 추억을 만들었고, 지금도 종종 연락하며 지낸다. 


 과외를 간간히 해 왔던 터라, 학생들의 질문을 받아 주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고, 나 특유의 이과적 공감(?)(=해결책 제시)을 통해 힘들어하는 애들도 나름 케어해 주려고 애썼다. 내가 전반적인 내용에 대해 잘 알고 있어서 학생들에게 야무진 설명을 해 줄 수 있을 때가 꽤나 재미있었다. 애들이 그걸 알아먹고 이해됐다는 표정을 띠었을 때는 왠지 으쓱한 기분이 들었다. 질문이 잘 해결되지 않거나 내 설명이 내 맘에 안 드는 경우에 자발적 밤샘을 하며 더 좋은 설명을 찾아내려고 머리를 굴렸고, 추가 수업을 신청하지 않아 선행학습을 하기가 너무 어렵다는 학생을 몰래 불러 따로 수업을 해 주었다.


 이런 나의 진심이 통했는지, 학생들도 나를 잘 따라 주었고, 편안하게 받아 주어서 나중엔 물총놀이도 하고 애들과 장난도 쳤던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신 연령이 잘 맞아서 재미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ㅋㅋㅋㅋ. 우리 반이 아닌데 나를 엄청 따랐던 친구도 한 명 있었는데, 이 친구에게 뭔가 알려주는 것도 재미있었다. 영감을 툭툭 던져주면 그걸 다 캐치해서 본인만의 이해를 만드는 친구였다. 소위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친구였다.


 우리 반에도 내가 알려주는 것을 스펀지처럼 잘 흡수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이 친구는 하나를 알려주면 그 하나를 진짜 완전히 꼭꼭 씹어 소화해서 자기 것으로 만드는 친구였다. 하나를 알려주면 그 반쯤을 까먹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던 나는 여기서 가르치는 일의 기쁨이자 희열을 느꼈고, 이게 얼마나 좋았으면 친한 고등학교 담임 선생님께 전화해서 선생님이라는 일이 어떤지를 물어보기까지 했다.


 하지만 여기서 노조위원장의 자질(?)이 깨어나기도 했다. 우리 반 애들 말고 다른 반에서는 공부에 집중하지 않는 친구들이 몇몇 있었고, 그런 애들을 잡는다고 전체 학생들을 대상으로 전자기기 검사를 실시하거나, 학생 기숙사에서 소지하면 안 되는 물품을 검사하는 일도 있었다. 군대식이었던 고등학교와 거기서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내가 떠오르는 일들이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총괄 선생님께 항의했다. 드라마틱하게 변한 것은 없었지만 우리 반 애들에게는 나름의 유도리를 발휘할 수 있었다.


 소지하면 안 되는 물품을 검사하는 일은 꾸역꾸역 하고 애들이 뭘 갖고 있든 대강 넘겨주려고 했는데, 눈에 거의 불을 켜고 찾으며 뭔가 나올 때마다 미친 듯이 좋아하는 알바생들도 있었다. 그때는 이 사람 싸패가 아닌가 생각했는데(그리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생각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얼마나 애들한테 시달렸으면 그럴까 싶기도 하다. (그분은 학생들 기숙사를 관리하는 일을 자주 하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내가 그만큼 운이 좋았던 거겠지.


 그런 나에게 결정타를 날린 일이 있었는데, 그건 후기를 쓰는 일이었다. 캠프 막바지에 총괄 선생님께서는 캠프에 참가한 학생들에게 캠프에 대한 후기를 쓰게 했다. 공부 시간 중에 한 명씩 불러서, 노트북이 있는 방에 보내고 몇십 분 동안 후기를 쓰게 한 것이다. 반이 열 개가 넘게 있었는데 대강당에서 학생들이 각 반마다 한 명씩 불려 가는 꼴이었기에, 당연히 분위기도 어수선해졌고, 이건 학생들 공부 시간을 빼앗는 셈이었다. 나는 이게 진짜 이해가 안 되었고, 지금 생각해도 이해는 안 된다. 이 캠프가 학생들을 몇 시간 공부시킨다고 홍보하며, 지금껏 학생들 공부 시간을 확보하겠다는 명분으로 애들을 잡아 왔는데, 이제 와서 본인들 마케팅에 써먹으려고 학생들 시간을 뺏는 꼴이 너무 어이가 없었다.


 차라리 알바생들이 쓰게 하면 몰라, 학생들은 비싼 돈 내고 공부하러 왔는데 그 시간보다 내년 학생 인원수를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한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캠프 유지를 위해 필요한 일이었겠지만, 내게는 그 필요성보다는 불합리성이 더 크게 보였다.


 아무튼, 그런 이유로 꽤 강하게 항의했지만 딱히 나아지는 건 없었고, 총괄 선생님과 나 사이에 낀 대표 알바생만 고생할 뿐이었다. 이쯤 되자 나도 이건 바뀌지 않겠다는 걸 알고, 후기는 시키는 대로 쓰게 했다. 이 일 이후로 ‘아 여기는 오면 안 되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때, 내 신념은 뭔가 ‘고고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현실적인 것들을 고려하며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야 하는 광고나 마케팅 관련 직렬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겠다는 생각도 굳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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