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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찻잎향기 Jan 21. 2019

[영화 추천] 링컨 Lincoln, 2012

영화를 제대로 보기 위해 미국의 1865년 13조헌법개정안을 알고 보자

[영화 추천] 링컨 Lincoln, 2012


개봉: 2013.03.14.

감독: 스티븐 스필버그

출연: 다니엘 데이 루이스(링컨), 샐리 필드(링컨 아내)

개요: 미국, 드라마, 150분


미국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랑과 존경을 받았던 제16대 대통령 링컨의 생애 중에서 가장 강렬했던 마지막 4개월(1865년 1월부터 4월까지, 그가 죽음을 맞이한 4.15일 포함)과 13조 헌법 개정안을 통과시키는 미국의회의 역사적 장면을 감동적으로 담아낸 영화 <링컨>을 보았다.


이 영화를 보게 된 계기는 영화 <팬텀 스레드>를 보고 난 후,  남자 주인공을 연기한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에 대한 경외심이 발동하였기 때문이다. (찻잎미경의 팬텀 스레드 리뷰 참조) 그의 매력적인 용모 뿐만 아니라 극중 배역에 몰입하는 그의 연기, 대사, 표정, 눈빛 등이 너무나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의 연기를 위의 영화에서 처음 보고 반해 버린 이후, 특히 아카데미 등에서 남우주연상을 휩쓸었다고 하는 다른 영화 <링컨>을 찾아 보고 싶은 욕구가 강렬하게 발동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유명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미 의회 양당 대표들의 입을 모아 강력하게 추천하게 하고,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을 벌떡 일으켜 세운 강력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전세계 지도자들 사이에서 링컨의 리더십이 열병처럼 번졌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재임에 성공한 버락 오바마는 분열 된 연방을 하나로 통일하고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예제도 폐지’의 위업을 달성한 링컨에게 깊은 존경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실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민주당 내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을 국무장관으로 임명하였는데 이는 정치 인생 최대의 라이벌이었던 슈어드를 국무장관으로 임명한 링컨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은 백악관 시사로 본 영화에서, 노예제도라는 어두운 그늘과 남과 북으로 쪼개진 국가의 화합을 위해 고군분투했던 <링컨>의 모습에 “<링컨>은 대통령으로서 나에게 주어진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가르쳐 주었다!”라며 극찬했다. 백악관 시사 이후 2천개가 넘는 극장으로 확대 개봉되며 미국 전역으로 퍼져나간 영화 <링컨>의 뜨거운 열기는 곧 의회 시사로 이어졌다.


의회 시사에는 민주당과 공화당의 대표의원들이 참석했다. 의원들은 노예제도 폐지를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헌법 13조 개정안의 통과가 노예제도 폐지라는 문제 자체 보다는 각 당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의해 극렬한 찬반논쟁으로 번져 쉽게 해결되지 못하는 영화 <링컨> 속 의회의 모습을 본 후, “정치인들이 단기적인 정치적 이해관계들을 줄여나갈 때 나라가 더욱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훌륭하게 묘사했다”_美 공화당 원내대표 미치 맥코넬, “정치가 가야 할 올바른 길에 대해 정확히 묘사한다”_ 美 민주당 원내대표 해리 레이드라며 깊은 반성과 깨달음을 전했다. 그 밖에도 하버드 대학교 경영대학원 교수들은 물론 하워드 슐츠 스타벅스 회장 등 미국 내 최고경영자들 사이에서뿐만이 아니라 스페인, 이탈리아 등 전세계 정상들로부터 기업과 국가를 이끌어갈 해법을 제시하는 필견무비로 인식되고 있는 영화로, 관객들에게 대한민국이 원하는 진정한 지도자상을 선보일 것으로 기대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의 개봉 후 관객 수는 거의 폭망 수준이다.(누적 관객수 137,505명). 그 이유는 미국의 정치적인 특성과 링컨의 노예제 폐지 과정, 남북전쟁에 대한 충분한 역사적 이해가 부족한 과정에서 영화를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에 대한 전문가들의 높은 평가와 링컨에 대한 얕은 정보만 가지고 영화를 관람했다. 그랬더니 링컨과 의원들이 하는 말을 무슨 말인지 거의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링컨을 연기하는 배우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대사 전달력과 내적으로 고뇌하는 모습에서, 싱크로율 백프로에 가까운 외모적인 특성 때문에 정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러닝타임  150분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 알 수가 없다. 그리고 링컨의 아내와 싸우는 장면들은 정말 현실적인 부부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링컨의 아내 역할을 해낸 배우 샐리 필드의 연기도 높은 평가를 받을 만하다. 특히 큰 아들을 군대에 보내게 되었다는 말을 전달하는 링컨과 극렬하게 싸우는 장면, 죽은 아들에 대한 슬픔과 두통을 토로하며 분노하는 장면 등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는 속옷의 디테일과 감정을 표현하는 장면 등은 정말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아픔이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슬픔을 견디는 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책임있게 견뎌야 하는 것이다”

(링컨의 대사 중에서. 대사가 좀 변형되었겠지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되는 문장이다.)


링컨이 아들의 죽음을 생각하면 자신도 정말 힘들다, 슬프다, 각자 그 슬픔을 견뎌야 하는 것은 각자의 책임이다. 라는 말을 할 때. 정말 눈물이 났다. 그리고 링컨의 짙은 슬픔과 고독과 죽음의 그림자가 느껴졌다. 이런 분위기는 남북전쟁이 종결된 후. 북부의 총사령관을 찾아가서 나눈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그에게 휴식이 필요하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전달되었다.


그는 대통령으로서 치열하게 살아낸 만큼이나 휴식이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졌다. 혼자 걸어가는 뒷모습은 그야말로 외로움이 뚝뚝 떨어졌다. 구부정한 어깨, 힘업는 걸음걸이. 역사적으로는 위대한 발자취를 남겼는지는 모르겠지만. 개인적인 시간 속에서는 평안한 휴식의 시간이 없는 힘겨운 삶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즈음에서 아내와 마차를 타고 가는 장면에서도 그것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결국은 그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데. 이 죽음만이 그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줄 수밖에 없지 않는가, 라는 메시지가 담겨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정말 드라마틱한 죽음을 맞이한 위대한 인물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내 아들에게만은 아버지로서의 따뜻하고 눈높이에 맞는 사랑을 표현하는 자상한 모습. 깊이를 알 수 없는 정치적인 고뇌. 철학적인 사색을 담고 있는 듯한 깊은 눈빛. 꼭 어떤 사례로 구체적인 비유를 들어서 이야기하는 스토리텔링 기법. 이런 모습을 다 갖추고 있으면서도 정작 자신의 아내와 아들에게는 자주 고통스런 대화를 할 수 밖에 없는 너무나 인간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는 보통 사람의 모습이었다. 보통 사람의 인간적인 고뇌와 갈등을 엿보면서 연민의 감정이 생긴다. 한 생애에 깊게 드리워진 어둠의 그림자가 어쩐지 우리 못난 사람들의 생애와 닮아 보였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다루고 있는 노예제도 폐지 과정과 남북전쟁의 상관성. 1865년 미국 의회 정치와 그 역사적인 사건이 너무나 구체적이고 디테일이다. 그리고 그 역사와 관련되어 등장하는 인물도 너무 많다. 그러다 보니 우리에게는 대중적으로 이해되기가 쉽지 않고 몰입하기가 어려웠다. 마치 우리나라 조선의 한 사건을 다룬 영화를 외국인이 보는 그런 심정일 것이다. 그렇지만 링컨이라는 인물의 됨됨이와 그의 정치적인 고뇌가 무엇이었는지에 초점을 맞추고 본다면, 영화는 그 자체로 훌륭하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 <링컨>을 더 집중하며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링컨의 철학과 정치관, 그리고 문제가 되었던 노예제도, 남북전쟁, 그리고 영화에서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13조 헌법 개정안>에 대한 (아래와 같은) 기본적인 자료와 정보를 공부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의 바람이 있다면. 향후 30년 이내에(내가 죽기 전에) 우리 나라에서도 이런 <링컨> 같은 영화가 나오길 소망한다. 우리 근현대사에서 비극적인 대통령 중에 한 명인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한 시절을 이런 식으로 심도 있게 제대로 다루면 좋겠다. 물론 다큐로 만든 영화는 여러 편 있지만.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자료를 모아서 편집한 성향이 강하다. 영화인들이 제대로 만든, 영화적인 작품성과 완성도가 높은 120분이 넘는 영화를 한 편 만나고 싶다.



[ 아브라함 링컨 (Abraham Lincoln) ]


1809.2.12 ~ 1865.4.15

미국의 16대 대통령(1861~1865년)으로 남북 전쟁에서 노예 해방을 주장한 북군을 승리로 이끈 대통령이다. 남북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으며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주장한 게티즈버그 연설은 민주주의의 정신을 잘 나타낸 것으로 유명하다.

     

견고한 이상을 현실에 조화시킨 통합의 지도력을 갖춘 사람

 그는 재임 중에 여러 집단의 공격을 받았다. 고향인 일리노이 주조차도 "미국의 공직을 불명예스럽게 만든, 가장 간계하고 가장 정직하지 못한 정치가"라고 했다. 서로 자신의 주장만을 관철하려 하는 혼란스런 정치 상황에서 그는 나라의 분열과 다툼을 염려했고, 연방과 연방의 헌법을 지키는 데 자신의 소임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상을 추구하되 현실에 굳게 발을 딛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았지만 성급히 내닫지 않으며' 어떠한 순간에도 자신의 신념을 확고하게 지켰다.


정당성을 내세워 힘으로 장악하려 하지 않았으며, 정확한 판단력과 통찰력으로 자신의 나아갈 바를 찾아냈다. 그는 "만일 나라가 스스로 분쟁하면 그 나라가 설 수 없고, 만일 집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 집이 설 수 없다"라는 성경 구절(마가복음 3:24-25 [개역한글판])을 즐겨 인용했다. '막강한 권력'에 의지하지 않은 채 자신의 소신을 지키려 했던 것이다.


노예해방선언서를 발표할 때도 링컨은 신중을 기했다. 노예해방을 둘러싼 견해 차이로 남과 북이 둘로 나뉘고, 마침내 남북전쟁이 발발한 그 상황에서도 북부는 치열한 노예해방 논쟁에 휩싸여 있었다. 여당 내에서도 내분이 일어났고 국무장관은 사임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링컨은 '눈앞의 이해득실보다는 최선을 기대하며' 슬기롭고 신중하게 자신의 견해를 밝힌 뒤, 1863년 1월 1일 새해 아침, 선언서를 공포했다.


확고한 정치적 소신, 대중을 끌어안는 논리적인 연설가

 링컨에게 정치적 입지를 다져준 계기가 된 것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과정에서 있었던 거물 정치가 스티븐 더글러스와의 논쟁이다. 노예제와 미국의 미래를 논한 이 논쟁은 당시 미국이 안고 있던 사회 정치적 문제를 가장 첨예하게 드러냈다. 민주당 후보였던 더글러스는 1854년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안(루이지애나 매입지 전체에 노예제를 허용하고, '주민주권' 원칙에 따라 준주(準州)인 캔자스와 네브래스카의 노예제 도입 여부를 그 지역 주민에게 맡기자는 법안)을 제안했다.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이 제정됨으로써 노예제의 확대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공화당을 창설하게 된다. 이에 링컨은 더글러스에 반대하여, 논리적이고 확신에 찬 어조로 심금을 울리는 인상적인 연설을 했다.


"우리는 정치적으로 위선자라는 사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이고 있습니다. 인간을 노예로 만드는 제도를 옹호하면서 동시에 인간의 자유를 사랑한다고 자찬함으로써 말입니다." 더글러스와의 논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링컨은 공화당 상원의원 후보로 추대되었다. 비록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더글러스와의 대논쟁을 통해 노예제에 대한 자신의 소신을 명확히 다지고 많은 사람들에게 강한 인상을 심어줌으로써 이후 대통령의 길에 이르는 발판을 마련한다.


탁월한 인화력과 지도력으로 내각을 이끈 대통령

 링컨은 자신을 배격하는 인물일지라도 그 사람의 능력을 존중했다. 당내에 확고한 세력기반이 없는 소수파 대통령인 링컨에게는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필수적이었다. 당내 실력자들의 상호 경쟁과 견제를 유도하는, 세력균형 전략과 탁월한 지도력으로 장관들을 휘어잡았다.


국무장관인 수어드(William H. Seward)는 링컨과 함께 공화당 대통령 후보 물망에 올랐던 사람이다. 그는 공화당의 최대 실력자라 할 만한 사람이었지만 초기에는 링컨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았다. 내각의 각료를 선임할 때, 남부에 대한 견해가 자신과 달랐던 체이스(Salmon P. Chase)를 재무장관으로 임명하지 못하도록 압력을 넣기도 했고, 남북전쟁 직전에 대통령이 전권을 자신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대통령을 '촌뜨기 애송이'로 보았던 그도 곧 링컨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기에 이른다. 노련한 정치인 수어드를 자신의 사람으로 만든 것은 다름 아닌 링컨의 리더십이었다.



[링 컨 의 생 애]


1809 - 2월 12일, 미국 켄터키 주 하단에서 태어남

1819.10세 - 아버지 재혼

1826.17세 - 오하이오 주의 앤더슨 강에서 나룻배 사공이 됨

1831.22세 - 뉴세일럼으로 가서 가게의 점원이 됨

1832.23세 - 주 의회 의원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낙선

1833.24세 - 뉴세일럼의 우체국장이 됨. 측량기사 시험에도 합격

1834.25세 - 일리노이 주 선거에 의원으로 당선

1836.27세 - 주의원으로 다시 당선. 변호사 시험에 합격

1838.29세 - 세 번째로 주의원에 당선

1842.33세 - 메리 토드와 결혼

1846.37세 - 휘그당 추천으로 하원 의원이 됨

1848.40세 - 국회의원 임기를 끝내고 스프링스로 돌아와 변호사 일에 전념

1854.45세 - 일리노이 주에서 노예제도 반대 연설을 함

1858.49세 - 상원의원에 출마했으나, 떨어짐

1860.51세 - 공화당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 받고 11월, 미국 제 16대 대통령으로 당선

1861.52세 - 대통령 취임식을 가짐 : 노예제도 문제로 남북전쟁이 일어남

1862.53세 - 9월, 노예해방 예비 선언을 함

1863.54세 - 노예해방선언. 11월,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치”라는 유명한 연설을 함

1864.55세 - 그란트 장군을 북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 11월 대통령에 재선

1865.56세 - 3월4일, 대통령에 취임. 4월9일, 남북전쟁 종결. 4월14일, 워싱턴에 있는 한 극장에서 남부를 지지하는 청년에게 저격 당함. 15일에 세상을 떠남


     

[남북 전쟁 (1861~1865)]


 1861~1865년, 미국에서 노예 제도의 둘러싸고 연방 분리를 주장했던 남부 11개 주와 연방 정부 사이에 일어난 전쟁이다. 영국과 독립전쟁을 치르고 18세기말 독립을 쟁취한 미국은 자유와 평등을 양 축으로 하는 민주주의를 국시(國是)로 표방한 나라였다. 국시에 위배되는 노예제는 건국 초부터 비판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남부는 대농장이 발달하여 노예 노동이 필요했고, 북부는 소농과 상공업이 발달하여 자유로운 노동력이 필요했다. 또한 남부는 영국이나 프랑스에 면화를 수출하였으므로 북부의 입장에서는 영국 자본의 영향력이 커질 우려가 있었다. 따라서 이 영향력을 차단하려면 남부의 노동력인 노예 제도가 폐지되어야 했다. 1850년대 몇몇 북부인들이 노예제의 완전한 폐지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1860년, 노예제에 반대하는 공화당 출신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되자 남부의 사우스캐롤라이나 주가 미 연방 탈퇴를 선언했다. 이어서 미시시피, 플로리다, 루이지애나, 앨라배마, 조지아의 6개 주가 잇달아 연방에서 탈퇴하여 남부 7개 주가 ‘남부연합’ 정부를 결성했다. 남부연합은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항구의 섬터 요새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면서 이곳을 수비하던 북부군의 퇴각을 요구해왔다. 1861년 4월 12일, 섬터 요새에 대한 남부연합군의 첫 발포로 ‘남북전쟁’은 시작되었다. 남북전쟁이 끝나가던 1863년 1월 1일, 링컨은 ‘노예해방령’을 공표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노예 해방을 이룬다. 나라가 갈라져서 싸운다는 것은 확실히 민족적 비극이었으나, 미합중국은 이 엄청난 시련을 이겨내고 자유와 평등을 위해 국가적 단결을 한층 굳혔다.



[노예제도]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신분제의 최하층에 해당하는 노예는 세계 곳곳에 보편적으로 존재했다. 역사 속에서 노예는 인류가 수렵, 채집 생활을 거쳐 한곳에 정착해서 농경생활을 시작할 무렵 등장한다. 노예는 노동력의 필요에 따라 포획하여 오는 경우도 있었으나, 전쟁 포로, 채무 등으로 인한 매매, 범죄자에 대한 징벌에서 주로 생겨났다. 노예 남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도 당연히 노예가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는 신대륙을 무대로 과거보다 더욱 잔혹한 노예제가 실시되었다. 유럽인들은 신대륙에 정착하여 대규모 플랜테이션을 경영하면서 아프리카 출신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며 노동력을 착취했다.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농사에 서툰 데다가 때때로 저항하거나 도주하기도 했고 학대에 못 이겨 숫자가 급속히 감소했기 때문에 백인 정복자들로서는 원주민보다 강인한 데다 도망갈 염려가 없는 흑인이 다루기 더 쉬웠다.


아프리카 서해안은 ‘노예해안’이라는 이름을 얻으며 수 만 명의 아프리카인들은 노예선에 올랐다. 사슬에 매여 짐짝처럼 배 밑에 빽빽이 채워진 이들은 실제로 짐승만도 못한 ‘짐짝’ 취급을 받았다. 가혹한 처우로 인해 노예들은 항해 중에 약 1/6이 사망하고, 항해가 끝난 뒤 ‘길들이는’ 동안 다시 1/3 가량이 사망했다. 계몽주의와 인도주의 사상이 팽배해지면서 노예제는 강력히 비판된다. 19세기 초부터 라틴아메리카 각국에서 노예가 해방되고 19세기 후반, 미국과 브라질의 노예해방을 통해 근대 사회의 노예제는 막을 내린다. 노예무역으로 인해 흑인 3,000만 명이 희생되고 1,200만 명 이상이 신대륙으로 팔려간 것으로 추정된다.



[13조 헌법 개정안]


 미국 연방정부가 연방을 탈퇴한 남부 주들의 노예를 해방시키기 위해 남북전쟁 기간 중에 통과시킨 일련의 법률(1861~64)이다. 1861년 8월 6일에 통과된 최초의 몰수법은 연방이 반도들의 재산을 압류하는 것을 정당화하고, 남부연합군을 도왔거나 남부연합군의 편에서 싸운 모든 노예는 그들의 주인에 대해 더이상 의무를 지지 않는다고 규정했다.


링컨은 그 법률로 인해 경계주(境界州 : 남부와 북부 사이에 있는 주로 노예제를 채택하고 있으나 탈퇴보다는 타협으로 기운 주들), 특히 켄터키 주와 미주리 주가 경내의 노예제를 지키기 위해 연방에서 탈퇴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에서 법안에 반대했다. 후에 그는 의회를 설득하여 점진적인 노예해방을 채택한 주들에게 보상금을 지불한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으나 경계주들은 이 계획을 지지할 수 없었다. 한편 링컨은 최초의 몰수법이 노예해방 포고에 필적할 만한 것이라고 지지했던 존 C. 프레몽과 데이비드 헌터 장군의 견해를 반박했다.


1862년 7월 17일에 통과된 2번째 몰수법은 사실상 노예해방의 선언이었다. 즉 이 법은 민간인이나 남부연합군 장교들의 노예는 영원한 자유민이 될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북부연방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부에서만 효력을 가졌다. 링컨은 다시 경계주에서의 노예제 폐지 조치의 효과에 관심을 기울이는 한편 이들 주로 하여금 보상을 받고 단계적으로 노예를 해방시킬 것을 촉구했다.


1863년 3월 12일과 1864년 7월 2일에 연방정부는 남부를 지지하던 부재자들 소유의 재산을 압류하도록 규정한 부가조치들(포획 및 유기 재산에 관한 법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남부연합 의회는 북부연방 지지자들에게도 적용되는 재산몰수 법안들을 통과시켰다. 그러나 실제로 양편 모두 전쟁 중 또는 전쟁 후에 몰수당한 땅은 많지 않았다. 당시 몰수된 남부의 재산은 노예를 제외하고는 거의 면화였다. 그러나 노예해방령이 공포되고 수정헌법 제13조가 통과되면서 남부의 노예 소유주들은 20억 달러로 추산되는 자산을 잃었다.



[위의 링컨 관련 자료 출처: 다음 영화 제공 링컨 영화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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