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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찻잎향기 Jun 02. 2019

영화 리뷰 [기생충] 탄탄한 시나리오, 예리한 풍자

(스포 없습니다)

영화 리뷰 [기생충] 탄탄한 시나리오, 예리한 풍자 


(스포 없습니다.)  


* 영화 정보   


감독: 봉준호 (2019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출연: 송강호, 이선균, 조여정, 이정은, 최우식, 박소담, 장혜진 

개요: 한국 드라마 / 15세 관람가 

개봉: 2019.05.30

관람: 2019.06.02 


* 영화를 보고 난 후 


아직도 먹먹하고. 너무나 슬프다. 영화 속에서 이분법적으로 말하는, 극단적인 생계 구조가, 우리 사회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극사실주의 자화상 같아서 말이다.  


까놓고 말해서 영화의 소재 또는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새롭지는 않다. 그러나 제목 '기생충'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미지가 매우 날카롭고 예리한 풍자로 다가온다. 유머가 많다. 그러나 단순한 유머가 아니라 신랄한 풍자다. 단어가 안겨주는 찝찝함과 공포, 불안, 두려움은 너무나도 크다. 영화 <빈집>(2003, 김기덕), <숨바꼭질>(2013. 허정) 등에서 보여 주었던 간담을 싸늘하게 했던 공포 그 이상을 표현한다. 탄탄하다. 빈틈없이 직조된 시나리오를 접한 기분이다.  


시나리오가 탄탄하면 그 다음은 연기자의 몫이다. 배우들의 연기야 흠잡을 데가 없다. 어느 역할 하나 낯설지가 않다. 다들 자기 옷을 입은 듯, 작두를 타는 무당들처럼 연기에 물이 올랐다. 특히 배우 조여정. (이제 청룡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을 때도 되지 않았나 싶다. 영화<인간중독>(2014,김대우)에서도 그런 얘기를 언급한 적이 있는데. 이 영화에서는 더 인상적이었다.) 


기생충의 사전적인 의미를 새삼스럽게 찾아 본다.  

1.  다른 동물체에 붙어서 양분을 빨아 먹고 사는 벌레.  
2.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남에게 덧붙어서 살아가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분명 어느 집단에서는 자신들과 다른 냄새가 나는 이질적인 집단을 이렇게 명명하고 이렇게 지칭할 수도 있겠다. 그런데 그게 참 모순적인 발상이다. 그런 기생충 집단이 살아 있어야만 국가라는 게 유지되고 그런 국민들이 존재하기에 그들 상위 몇 프로(20프로는 될까?)가 누리는 부와 권력과 경제 시스템이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을, 결국 그들만 모르는 것 같아서 말이다.  


그런 맥락에서 국회의원, 정치가, 재벌가, 국가 경제 시스템을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집단들이 적어도 국가 경제를 한번쯤 생각한다면 '의무적으로' 이런 류의 영화들을 집단 관람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글(책)이라는 매체가 전하는 메시지의 영향력과 다른, 분명 영화라는 매체가 전할 수 있는 강렬한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이십 여 년 전 친구네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다. 좀 개구진 대여섯 살 난 아들 녀석을 데리고 말이다. 

서울 반지하에 산다고 했다. 아이가 다른 친구네 집(아파트)만 놀러 갔다 오면. "우리집과 다른 냄새"가 난다고 한단다. "거기서는 좋은 냄새가 나고 우리집에서는 나쁜 냄새가 난다"고 한단다. 그 친구는 국문과를 졸업했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를 해서 몇 차례 집을 옮기다가 그곳에 가게 되었다고 한다.  


냄새. 이질적인 집단을 구분지을 수 있게 하는 독특한 냄새. 

영화 기생충에서도 이 '냄새'가 어마어마한 장치로 쓰인다.  

결국 지하 하수도 냄새, 시궁창 냄새, 사람 많은 데서 나는 냄새, 지하철 냄새, 행주 삶을 때 나는 냄새 등이 연상이 되고 만다.   


인상깊게 읽었던 소설 <향수>가 떠오른다. 주인공은 생선이 썩는 곳에서 태어난 아이. 그에게는 냄새가 없다. 그래서 좋은 냄새를 착취하는 욕망을 가진다. 그리고 파멸한다. 내것이 아닌 냄새를 갖고자 하면 그렇게 파멸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망하는 집단을 (겉으로) 흉내내고 따라해도, 몸이나 옷에 배여 있는 (오래된 자신의) 냄새는 씻어낼 수 없으니 말이다.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철이 없고 오만불손했던 시절의 내가, 아버지 가슴에 못을 박은 적이 있다.

"이럴 거면 자식은 왜 낳았어요? 키워 내지도 못할 자식을. 물려 줄 게 가난 밖에 없으면 자식을 낳지 말았어야 했지요" 아주 또박또박 한 마디 한 마디를 비수처럼 내뱉고는 집을 나간 적이 있다. 아프다, 지금도 그날을 생각하면 아프다. 내 아버지는 그날 속으로 얼마나 피울음을 쏟아 냈을고.  


가난이 죄가 아니라고? 대물림된 가난이 죄가 아니라고?

밥을 굶어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대학교 1학년 때 입주 가정교사(과외 교사)를 한 적이 있다. 석 달 월급을 미리 받았다. 꽤 큰 돈이었다. 몇 달치 자취방값을 모두 내고도 남은 그런 돈이었다. 그 석 달. 정말 싫었다. 말도 더럽게 안 듣는 국민학교 3학년인가 하는 여자 애의 뒤치닥거리를 하는 게 내 일이었다. 그 뒤로는 죽어도 잘 사는 집의 가정교사는 하지 않겠다 마음 먹었다. 그 뒤의 알바들은 그야말로 순수 노동으로만 하는 것을 선택했다.  


나에게 가난은 극복의 방법이 있었다. 머리 좋은 애가 공부 잘하고 "하면 된다", "개천에서 용이 되면 된다" 였다. 그리고 통했다. 용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기생충"의 삶은 아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런 게 통할까? 


오늘 영화를 보면서. 몇 차례 울컥했다. 속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왔다. 

이정은(잘 사는 집 가정부)이 남편과 함께 주인집에 거실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고, 햇볕이 잘 드는 잔디 정원을 바라보며 찻잔을 우아하게 들고 마시는 장면(상상일 수도??)에서 정말 엉엉 울 뻔했다.  


내가 그 과외 가정교사를 하던 시절에 얼마나 수없이 상상하던 장면이었던가.  

나는 이제 그런 장면 따위는 꿈꾸지 않는다. 물론 그런 상황을 누리고 있어서도 아니다. 어쩌면 '환상'인지도 모른다. 가난한 사람이 부자의 삶을 꿈꾸는 것은 환상일지도 모른다. 


태어난 순간부터 가난이 대물림된 사람과 태어난 순간부터 부자인 사람은 삶의 질과 양식은 무조건 다르다. 그 접점은 쉽게 나올 수가 없다. 이게 내가 오십 여년을 살면서 내린 결론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 불행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나는 행복하다. 왜냐면 애초부터 바뀔 수 없는 환상에는 목숨을 걸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운이 좋은 시절에 태어났다. 그래서 '하면 된다'만큼 성과를 얻었고. 그 이상을 원하는 '욕망'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와 시절이 다르다. 사회는 더더더 이분법적인 구도로 가고 있다. 계획이 통하는 사회가 아닌 것 같다. 영화 초반에 나오는 '금강 수석'이 가난한 삶에는 어울리지 않는 돌덩어리인 것처럼. 계획과 희망이라는 것은 어쩌면 삶을  짓누르는 또다른 지위적(계층적, 환경적)상승 '욕망'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작금의 청춘들에게 뭐라 위로의 말을 건네야할지 잘 모르겠다.  


공무원 준비를 하라는 말도 무책임해 보이고(마치 세상에 공무원만 직업인가, 하는 생각이 들고). 

뭐든 열심히 하면 될거야, 라는 막연한 위로도 잔인한 것 같다. 

계획적인 사람이 되라는 말도 안 한다, 그 계획이 무너져 내리면 더 아프니까. 

하고 싶은 것을 찾아봐, 라는 말도 조심스러워서 못하고 있다. 

그저 모른 척 침묵만 하고 있는 비열한 부모가 되어가고 있다.  


참으로 냉혹하고도 잔인한 현실이다.   



* 영화 줄거리 및 제작 노트 (영화사 제공) 


극과 극의 삶을 사는 두 가족의 만남이 빚어낸 신선한 스토리.  “같이 잘 살면 안 될까요?”  
그러나 공생이 어려워진 각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봉준호 감독은 <기생충>에서 전작을 통틀어 최초로 가족 구성원을 부모와 자녀가 다 함께 있는 형태로 설정했다. 또한 봉준호 감독의 작품 중 지금, 여기라는 시공간적 특성이 가장 중요하게 고려된 영화다. 주인공들은 지금 여기, 마치 우리 옆집이나 옆 동네에 살고 있을 것만 같은 두 가족이다. 이 두 가족은 부모와 자녀로 이뤄진 4인 구성이라는 닮은 점도 있지만 그 삶의 형편은 그야말로 극과 극이라 일상에서 만날 일도 엮일 일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과외 면접’이라는 상황이 주어지면서 두 가족 사이에 연결점이 생기고, 예측 불가능한 만남이 시작된다.  
  
돌이켜보면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언제나 현시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설국열차>에서는 부와 권력에 따라 서열화된 우리 시대 계급 문제가 보였고, <옥자>에서는 공장식 축산 시대 속에 고통받는 동물들의 문제가 있었다. 
   
그런 그가 <기생충>에 등장시킨 주인공은 도저히 만날 일 없어 보이는 극과 극의 삶의 조건을 가진 ‘두 가족’이다. ‘어설픈 의도’와 ‘몇 번의 우연들’이 겹치며 예측불허의 상황으로 빠져드는 두 가족의 운명은 공생(共生)을 꿈꾸는 것 자체가 점차 공상(空想)이 되어가는 현대 사회의 자화상을 보여준다.  
  
영화 <기생충>에는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두 가족의 충돌이 매번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을 터트리며 관객들에게 웃음과 슬픔을 선사하지만 <기생충> 인물 그 누구도 악한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우리는 항상 상생 또는 공생을 바란다. 하지만 그것이 쉽지 않다는 것 또한 느낀다. 그것은 개인의 의지나 잘잘못과 무관한 것이 되었다. 봉준호 감독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에게 ‘함께 잘 산다’는 것에 대해 그만의 방식으로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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