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윤경 장편소설
도서 리뷰 [설이] 성장 소설 읽기
이 소설은 심윤경 작가의 두 번째 성장소설입니다. 첫 번째 성장소설 <나의 아름다원 정원>의 주인공 동구와 세상 아이들에게 진 마음의 빚을 갚고자 쓴 소설이라 합니다.
도대체 어떤 빚을 졌을까요?
동구에게 폭력을 가했을까요? 마음의 문을 닫고 살았을까요? 그저 참고 살기를 원했을까요?
이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이 작가의 작가적 책임과 책무가 무엇일지 궁금하였습니다.
소설의 시작에서부터 ‘은밀한 긴장’이 흐릅니다. 아이들이 하는 ‘짝짓기 놀이’가 이렇게 잔인한 놀이였을까요?
어지럽게 춤을 추다가, 서로서로를 흘끔흘끔 쳐다보다가, 선생님이 호명한 숫자대로 뭉쳐야 하는데. 나만 짝이 없다! 서로서로 끌어안고 또 밀쳐내기도 하고. 그렇게 숫자대로 뭉치기 위해서 맹렬한 시선들이 엇갈린다. ‘얘랑 뭉칠까, 말까?’ 그러나 나는 그대로 얼어붙는다.
짝짓기 놀이라는 무리에서 아무에게도 속하지 못한다는 공포. 그 공포의 위력은 대단하다. 짝짓기 놀이를 하다가 방 한가운데서 오줌을 싸고 만다.
아, 여기까지 읽다가, 이 소설 심상치 않구나, 그렇게 보이는, 또는 대놓고 직접적으로 행하는 폭력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그리고 서술자 ‘나’의 상황과 태도에 몰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서술자이자 주인공인 나(설이)는 정말 대.단.한. 아이입니다.
버려진 아이! 그것도 설날 아침에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아이.
그리고 파양 세 번!!
그런데, 아주 똑 부러집니다. 상황과 매락 파악 능력이 뛰어나서. 본인이 어떤 사건(사태)에 놓여 있는지, 또 그 이후의 할 일을 잘 압니다. 독특하고 당당하고 다부진 아이입니다. 그런데 진짜 이 소녀 ‘설이’의 매력은 무엇일까요?
“내 피부엔 보이지 않는 촉수가 촘촘히 자라 있었고 내 배 속은 온통 휘발유였다.” (55쪽)
어쩌면 초등학생이 감당할 수 없는. 그야말로 어른들도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들. 그에 더하여 부모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움까지 설이가 이 모든 것들을 어떻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나는 예쁘고 아무 생각 없는 별이 되는 대신 피곤하고 부끄러운 유기아동이 되어서 세상의 몫이 되어야 마땅할 창피함을 대신 짊어졌다. 과연 이 바보 같은 세상은 그런 생각을 해보기나 했을까? 자기들이 나에게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지 알기나 하려는지.” (27쪽)
세상이 설이에게 얼마나 많은 빚을 지었을까. 감히 상상도 못할 영역입니다. 우리는 설이가 되어 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 정말 세상은 설이에게 빚을 아주 아주 많이 졌습니다. 소설의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그 빚은 쌓이고 쌓여서. 그래서 이모의 편지글이 등장하는 순간에 터지고 맙니다. “내 아가 설아. 그동안 이모가 너에게 했던 모든 거짓말을 용서해다오.” 라는 시작 문장을 읽으면서. ‘아, 그랬구나. 그랬어. 설이에게 세상은 어마어마한 빚을 졌구나. 그 빚을 대신하여 설이가 그 엄청난 수모와 창피함을 짊어져야 했구나.’ 확인하기 시작했고. 그리고는 결국 “미안하다, 설이야.”라는 말이 쏟아지고 말았습니다. 아, 이게 결국 심윤경 작가의 작가적 책임에 대한 고백 같은 것인가, 그런 느낌도 들었구요.
그리고 ‘이모’라는 인물. 아, 이 순박하고 속 깊은 담담한 인물, 대가를 모르고 줄 줄만 아는 진짜 사랑을 실천하는 이모님. 소설을 읽는 동안 문득문득, 드라마 ‘동백꽃 필 무렵’의 동백이 엄마 이정은 배우도 떠오르고. ‘나의 아저씨’의 고두심 배우도 떠오르고. 나의 친 이모도 떠오르고. 그러더니 가슴이 뭉클뭉클... 눈물이 흐르고 말더라구요.
설이에게 이모가 없었다면. 설이의 성장은 풀잎 보육원에서 멈춰 버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작가님이 설이에게 이모라는 인물을 곁에 있게 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무슨 일이 있어도 다시 설이를 받아들이는 이모의 소박하지만 넉넉한 품이 정말 좋았습니다.
보육원! 아무니 좋은 시설이라 하더라도. 가시적인 결과만을 중요시 여겼던 풀잎보육원 같은 곳이라면. 그곳에서 설이는 제대로 성장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설이와 이모. 바늘과 실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두 사람. 그들의 진짜 사랑이 너무 좋았어요.
상처받은 아이와 가족이 없던 사람이 가족이 되는 과정. 상처 많은 가족들이 보듬고 어떻게든 위로하며 살아내려는 모습.
성장 소설. 아이와 어른과 가족들과 모두가 성장하는 소설. 진짜 가족이 된다는 것, 진짜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 보여주는 소설.
이야기 전개 자체가 인물 관계와 사건(갈등)이 복잡하게 엮여 있진 않지만. 문장과 문장 사이에 (나쁜)인간들과 세상의 보이지 않는 이기심과 가차 없는 차별이 숨겨져 있어서 엄청난 날카로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청소년들이 쉬이 읽을 수 있는 문장들이지만, 세상을 향한 설이의 여리지만 강한 기백과 투쟁이 담겨 있어서. 큰 힘을 얻을 수 있는 소설입니다.
그야말로 상처가 있지만,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는 소설 같아서, 청소년들에게 적극 추천하고 싶은 소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