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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찻잎향기 May 31. 2020

구병모 장편소설 [파과]

60대 킬러 여성의 삶, 그 궤적


도서 리뷰 [파과 eBook]   = 구병모 장편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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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책으로 읽었다면. 엄청나게 많은 문장에 밑줄을 그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을 남기면서 매우 몰입하면서 읽은 소설이다. 종이책을 살까, 미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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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재밌다, 소재가 신선하다. 


이 책 며칠 전부터 조금씩 야금야금 읽기 시작했는데. 너무 재밌다. 내가 최근에 이렇게 소설 읽기에 몰입한 적이 있었나, 싶게 재밌다. 

인물에 대한 묘사, 문장에서 감각적으로 살아나는 우리말 어휘들의 쓰임. 좋다. 간만에 생동감이 넘치는 문장들을 만나는 것 같다. 

스릴러류를 별로(일부러) 찾이 읽는 성향이 아니기에 이런 류의 장편 소설을 간만에 만나서 설렘과 긴장감이 생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재밌다.  



"그 손을 발로 차고 그녀가 이미 몸통이 반쯤 짓이겨져 꿈틀대는 지렁이를 확인 사살하듯 칼 손잡이를 세차게 밟자 신발 밑창을 타고 심장의 두꺼운 근육과 혈관이 끊어지는 울림이 전해졌다. 브로커의 손발이 두어 번 떨리다 축 늘어지는 것을 무심히 내려다보며 그녀는 발끝으로 칼 손잡이를 앞뒤로 한 번씩 지그시 밀었다." (169쪽)  

"그러는 동안 머리꼭지를 데웠던 피는 어느 새 제자리를 찾아가더니 바닷속을 유영하는 멸치 떼처럼 몸속을 떠나녔다." (443쪽) 



eBook으로 926쪽 분량이니. 종이책으로는 320쪽쯤 되지 않을까. 적은 분량이 아닌데도 종반부까지 몰입감이 최고다!!  

주인공 '조각'은 예순이 훌쩍 넘은 여인으로 방역업자이다. 일명 살인 청부업자(킬러!!). 살인 청부업을 하는 (꽤 냉소적이고 자조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나이 든 킬러 여인의 일상, 자기 관리, 심리 묘사를 제대로 읽는다.  


"지켜야 할 건 만들지 말자" 라는 다짐을 새기며 살아야 하는, '평범한 일상'은 감히 흉내도 못 내고 살아야 하는 노년의 여인이, 마음을 두는 게 생겼다. 그리고 그것들이 빚어낼 비극과 그 긴장감이. 이 작품을 읽는 초반부터 감돈다. 나이가 꽤 든 늙은 개 '무용'이 등장하고, 그 무용을 대하는 조각의 마음을 읽는 순간부터 말이다.  



2. 작명이 적확하고 우리말이 새롭다.  


조각, 투우, 해우, 해니(어린 딸), 그리고 (나이든 개) 무용까지. 이름들이 너무 상징적이다. 

가장 독특한 말은 물론 제목 '파과'이다. 파과의 사전적 풀이는 '파과지년'의 줄임말이다. (여자의 16세 또는 남자의 64세《‘瓜’ 자를 파자(破字)하면 八八이 되는 데에 연유함》) 


제목을 풀어 보자. 아직도 제대로 다 이해는 못한 것 같지만. 아마 주인공 조각의 나이를 의미하는 것 같다. 단지 남자의 64세가 아니라 "한 생애의 조각처럼 부서지고 흩어졌던 64세의 삶을 반추해 보는 시간"을 보여주려는 의도 아닐까. 조각의 삶은 나이 16세쯤에 어린 여자 아이로서 킬러의 길을 걷기 시작하고 그 시절로부터 40여년 한결같이 무감정으로 사람을 죽이고 일상을 버텨내었다. 그리고 결국은 전환점을 맞이하고 마는 60대 중반. 그 전환의 과정을 보여주고자 하는 의도가 아닐까. 


파과! 거센소리가 강렬한 발음처럼, 매우 강한 인상을 남기는 제목이다.  



그리고 우리말들의 향연!  


어딘지 낯설고 새롭게 보이는 우리말들, 사전을 여러 차례 찾아 보면서 문장을 읽어 낸다. 우리말의 쓰임과 그 문장이 만들어 내는 조합이 예사롭지 않아서 몇 번을 곱씹게 만든다.

(소설을 읽어내려 가다 보면.. 이런 말이 이 문장에 쓰일 수 있나? 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다.)


몇 개만 예를 들어 보자. (메모를 해 두지 않아서.. 떠오르는 단어 몇 개만 적어 본다) 


=: 문뱃내 : 술 취한 사람의 입에서 나는 술 냄새《문배의 냄새와 비슷함》.

=: 해니 : 호수 밑바닥에 쌓인 진흙  

=: 몽클거리다 : 먹은 음식이 소화되지 아니하고 가슴에 몽쳐 있는 듯한 느낌이 자꾸 들다.

=: 오로 : [한의] 산후(출산 후)에 음문(陰門)에서 흐르는 불그레한 액체. 


이 소설의 작가 구병모의 이력을 찾아 보니. <위저드 베이커리> 청소년 성장소설의 작가이다. 아, 이 책, 이야기 전개가 깔끔하고 주제 전달이 아주 뛰어났었지,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1976년생. 그런데 문장의 감각이 참 좋다. 인물 묘사가 장황하지 않다. 그런데도 몇 문장을 읽으면 그가 어떤 사람일지, 어떻게 살아 왔을지 가늠이 어렵지 않다.  


이 작가의 책을 종종 찾아 읽어낼 것 같다. 간만에 아주 흥미로운 소설을 만나서 좋다. 

이미, 소설 <아가미>, <한 스푼의 시간> 등을 북클럽 서재에 담아 두었다.  

  


3. 방역업자(?)의 삶이란게 ... 



(eBook 473-474쪽) 


신생아의 사진은 그 얼굴 형태를 전혀 알아볼 수 없게 변색되고 훼손됐을 즈음 난로에 넣었는데, 까맣게 오그라지는 사진을 바라보며 그녀는 이 장면에 자신이 어떤 회한도 느끼고 있지 않을뿐더러 아기 사진을 종종 들여다보고 만지작거렸던 행위가 그저 하나의 생물학적 어미라면 마땅히 죄의식이나 슬픔 또는 그리움을 느껴야 한다는 당위의 발로에 불과했는도 모른다는 걸 알았다. 


그랬는데 이제 와서 타인의 눈 속에 둥지를 튼 공허를 발견하고 생겨나는 연민이라니, 살과 뼈에 대한 새삼스러운 이해라니. 노화와 쇠잔의 표지가 아니고서야 이런 일관성 없음이라니.  



주인공 '조각'은 살인 청부업자로서 가족을 제대로 이뤄보지도 못하고, 일반적인 가족으로서의 집착도 없는 상태에서. 배 속에서 아홉 달 반을 키운 아이를 탯줄이 떨어지기도 전에 해외 입양 브로커의 손에 빼앗기고. 젖몸살을 앓으며 오로가 그치기도 전에 다른 누군가의 목을 조르러 간다. 그런데 아이를 먼저 보낸 여인에 대한 연민이라니... 

이런 인물의 심리 묘사, 맥락에 대한 설명, 어떤 슬픔이라는 단어 한 마디 없어도, 절절한 아픔과 슬픔이 전해온다.  


(eBook 500-590) 주인공 '조각'과 그녀가 맞서야 하는 '투우'와의 갈등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대목들~ 


내 짐작이 틀리지 않다면 그 사람들이겠지. 당신을 이렇게 뻔뻔하게 만든 작자들이. 아니, '들'은 뺄까. 정확히 말하자면 한 명밖에 없지, 당신이 바라보고 있는 곳에는."

- 보여줘야 할 사람이 있잖아? 


알고 있다. 투우는 알고 있다. 내가 무엇을 보고 있으며 무얼 듣고 싶어 하는지, 오히려 나 자신보다고 더 잘 알고 있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조각은 폐기종에 걸린 것처럼 숨이 막혀온다.  



지금 조각은 스스로 말이 안 되는 일(상황)에 놓여 있다. 

사람 죽이기를 하루 세 번 밥 먹는 이상으로, 눈 하나 마음 한 가닥 미동하지 않고 하던 사람이, 그런 자신이 사람에게 마음이 가고 넋을 빠뜨리고 있다. 본질적인 두려움이 일어나는데도, 본능과 본성이 가는대로, 일반 보통 사람처럼 살고 싶어하는 욕망과 감정이 생기고 말았다.  

그리고 아마도 그것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죽음에, 어쩌면 가장 아름답고 처절한 죽음에 직면하게 되겠지...  



 4. 결말이 궁금하여.. 


아- 오지게!! 재밌다. 중반부까지 숨가쁘게 읽어내려 가다가. 결말이 너무너무 궁금하여. 

조각(60대 중반 여인)과 투우(30대 초반 청년)의 격렬한 전쟁같은 싸움이 시작되기 전 ...

결국 마지막 십여 쪽을 미리 읽고 말았다... 


(eBook 결말부)  


무엇보다 그것은 진짜가 아니며 짧은 시간 빛나다 사라질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라진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농익은 과일이나 밤하늘에 쏘아올린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기 때문에 유달리 빛나는 순간을 한번쯤은 갖게 되는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그래서 아직은 류, 당신에게 갈 시간이 오지 않은 모양이야.  



그런데... 

"지금이야말로 주어진 모든 상실을 살아야 할 때." 참으로 난해한 문장이다. 

"상실을 산다" 무슨 뜻인가.

불꽃처럼 부서져 사라지는 상실 - 그때서야 가장 빛나는 순간을 맞이해야 하는. '상실의 아름다움' 이란 이런 것인가. 어려운 문장을 몇 차례 되새김질하듯 읽는다.  


소설이 끝났다. 그런데,


조각의 삶에... 그녀의 삶에 격렬하게 응원의 박수를 보내고도 여운이 남아서인지, 계속 몇 몇 문장과 맥락을 되짚어 본다. 그리고, 

그녀가 남은 생애를 "손톱 끝에 아로새겨진 형형 색색의 네일 아트 꽃잎처럼 자유롭고 화려하게" 펼쳐내기를 소망한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체력이 떨어질 뿐이다" 라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면서 말이다. 




[유튜브에 소개된 장편 소설 파과] 짧은 영상 


https://youtu.be/K25RijjZS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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