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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찻잎향기 Dec 02. 2018

[영화&소설] 버닝, 태워 버리다

소설 <헛간을 태우다>, <반딧불이>와 함께 읽기

[영화&소설버닝태워 버리다    


_소설 <헛간을 태우다>, <반딧불이>와 함께 읽기

                     


개요: 미스터리 / 한국 / 148분 / 2018.05.17. 개봉

감독: 이창동

출연: 유아인(종수), 스티븐 연(벤), 전종서(해미)

등급: [국내] 청소년 관람불가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영화 속 주요 등장인물은 세 사람 - 젊은 청춘 종수, 해미, 벤이다.

이 영화는 세 청춘의 사랑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고. 여자와의 관계에 대한 아주 다른 방식의 상징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도 할 있겠고. 자본주의 사회의 빈부 격차와 피폐화된 삶에 대한 신랄한 풍자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한 원작 소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속 ‘동시 존재’에 대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나는 판단 같은 것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태워지기를 기다리고 있죠. 나는 그것을 받아들일 뿐이예요.” - 벤의 대사 중에서.     

과연, 

태워지기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누구)일까?

누가, 누구를(무엇을) 태워 버렸는가?     

결국 나는 영화를 감상하고 난 후 두 개의 질문지를 만들고 두 개의 답지를 작성했다.           

(아직 영화를 안 보신 분들에게는 이후 내용이 스포가 되거나 영화 감상의 제약이 될 수 있습니다.)   


       

영화 속으로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는 배달을 갔다가 어릴 적 같은 동네에서 살았던 해미를 만나고 그녀에게서 아프리카 여행을 간 동안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여행에서 돌아온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만난 벤이라는 남자를 종수에게 소개한다. 

어느 날 벤은 해미와 함께 종수의 집으로 찾아와 자신의 비밀스러운 취미에 대해 고백한다. 그때부터 종수는 무서운 예감에 사로잡힌다.      


종수와 벤의 관계 속에서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거침없는 언행을 보이며 성적인 욕망 표현에 있어서도 솔직해 보이는 해미. 해미는 영화 초반에 판토마임을 통해 자신의 마음, 고민, 욕망, 희망 등을 드러낸다. 귤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판토마임을 하면 없는 귤도 있게 되고 그것을 맛있게 먹을 수 있을 만큼. 소주집에서의 귤을 까먹는 판토마임은 꽤나 인상적인 장면이다.      

“없다고 생각하지 말고 있다고 생각하면 있는 거야.”     

상당히 철학적인 발언이지만. 해미의 이 말 속에는 볕이 들어오지 않는 좁은 방에서, 카드빚에 시달리고 있는 자신의 생활고를 벗어나기 위한 역설적인 욕망처럼 보여지기도 한다.      


해미는 종수의 집에 벤과 느닷없이 출현하고. 함께 술을 마시고 아편을 돌려 피면서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춤을 춘다. 상의를 모두 벗어버리고 아프리카 원주민처럼 자유롭게 원초적인 본능으로 춤을 춘다. 그게 종수의 눈에는 ‘남자들 앞에서 옷을 함부로 벗는 창녀들처럼’보이고.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하고 비난한다.      


해미는 종수에게 빛과 같은 존재이다. 북향의 좁은 방에 한줄기 반사되어 들어오는 빛. 찰나처럼 사라지는 빛. 종수는 해미와 정사를 나누는 첫날 그 빛을 보았고. 그 빛은 종수에게 자위행위의 절정과 같은 순간이 된다. 그래서 해미가 없는 방에서도 그 빛을 보면, 그 빛을 상상하면 자위행위를 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해미가 사라졌다. 파주의 종수집에 벤과 함께 온 이후. 종수가 창녀 같다고 비난한 이우. 해미가 사라졌다. 종수는 불안하다. 예감이 좋지 않다. 해미가 맡긴 고양이 보일이도 없다. 종수는 보일이를 본 적은 없지만 보일이의 존재를 믿는다. 보일이가 존재한다는 흔적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보일이를 벤의 집에서 보게 된다.      


벤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해미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몇 개의 메타포(비유, 은유)로 표현된다. 근사한 집과 차를 가진 젊은 남자. 젊은 나이에도 일하지 않고 돈이 많은 남자. 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남자. 비밀스런 말투와 표정과 행동들.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하는 남자.     

“마치 재물을 바치듯이. 나는 나를 위한 요리를 하지. 그리고 그 요리를 내가 먹지”     


벤이라는 남자는 자신이 한 요리를 자신을 위한 재물로 먹는다. 술자리에서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지루한 하품을 한다. 여자의 얼굴에 화장을 직접 해 준다. 두 달 정도에 한 번씩 비닐하우스에 불을 태운다. 뼛속 깊이 베이스를 느끼기 위해서. 


비밀스럽다. 이 남자의 모든 언행이. 그리고 이것들이 의미하는 지점은 하나다. 죽음 또는 살인.     

그러나. 그것은 하나의 가설과 해석일 뿐. 어느 하나 분명한 것이 없다. 

마치 ‘아침 안개’와 ‘대남 방송의 소란’에 휩싸여 있는 ‘파주’라는 공간처럼.      


파주. 종수네 집 마당에서 저녁 노을을 바라보며 해미가 말한다. “오늘이 제일 편안하다. 행복하다.” 지는 노을을 보면서. 붉었다가 보라색이었다가 검은색으로 변하는 노을 속에서. 그녀는 행복했다.      


날렵한 포르쉐를 타고 고층 빌딩의 잘 정돈된 고급빌라에서 사는 남자. 벤으로 상징되는 도시-서울. 세련되고 화려하고 높고 넓고 많다. 그런데 어쩐지 허무해 보인다. 태워버릴 재물이 필요할 정도로 욕구가 불만이다.     


반면에 낡고 덜거덕거리는 봉고차를 끌고 다니는 종수는 초라하다. 가진 게 없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하고 습작을 하고 있다. 무엇을 소설로 쓰겠다는 목표도 없이. 그의 글재주는 분노조절장애를 견디지 못하고 공무원에게 폭행했다고 구속된 아버지를 위한 탄원서에서 한 번 빛을 낸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무기력하다. 그의 빛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의 절정이라고 믿었던 어떤 상황, 대상이 사라졌기 때문일까.      


그래서 태웠을까? 죽이고 태우고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그렇게 맨몸으로 탈출해야 했을까?     

자본주의의 극심한 빈부격차. 무기력한 청년의 모습. 가난한 서울(도시)살이의 실태. 피폐화된 농촌 현실. 버려진 비닐 하우스.


화면으로 보여 주는 것이 많다. 그래서 생각할 것도 많아진다. 그만큼 감독의 메시지가 많다는 것이겠지. 그래서 그런지 영화 러닝타임이 꽤나 길다.      


그러나 영화 음악이 아주 좋았다. 몽환적이면서도 두웅 심장 맥박 소리를 자극하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소리. 정말 음악이 좋았다.          



영화 관람 후 뒷담화  

    

이번 제71회 칸 영화제에서 유력한 황금종려상 후보로 기대를 많이 했는데. 낭보를 듣지 못해서 매우 아쉽다. 그래도 비평가상을 받아서 다행이다.


배우 유아인, 스티븐 연, 전종서의 연기가 아주 자연스러웠다. 전종서의 연기는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성숙한 연기를 보여 주었다. (신인상을 받아도 좋을 만큼)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다시 읽어봐야겠다. 오래 전에 읽었는데. 기억이 어렵다. 소설 작가가 전달하는 메시지와 영화의 메시지가 어떻게 같은지. 어느 지점이 다른지. 꼭 비교하며 읽어보고 싶다. 


영화 관람하는 모습이 딱 두 종류인 듯. 완전 몰입하든가, 연신 하품을 하든가.




소설과 함께 읽기



[소설집] 반딧불이, 무라카미 하루키 


출판: 문학동네

발행: 2014년 8월 


내가 읽은 책은 『반딧불이』2010년의 개정판이다. 이 책은 1990년 고단샤에서 간행된 단편집(1979~1989)을 번역의 저본으로 삼았다 한다. 그러니 여기 실린 소설들의 시대적 배경은 1980년대라 할 수 있겠다. 


작품의 구성은 반딧불이, 헛간을 태우다, 장님 버드나무와 잠자는 여자, 춤추는 난쟁이, 세 가지의 독일 환상, 비오는 날의 여자 #241· #242 - 이렇게 6편이다. 특이한 점은 '작가의 말_ 내 작품을 말한다' 챕터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 까닭인지 '옮긴이의 말' 등은 없다.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쓰게 된 배경, 개정한 과정 등을 얘기하니 말이다. 

나는 여섯 편 중에 <반딧불이>, <헛간을 태우다> 이 두 편에 집중했다. 


[반딧불이] 


이 작품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 숲』의 일부분 또는 개요판처럼 읽혔다. 낯익은 구성, 인물, 스토리 전개. 노르웨이 숲을 아주 재밌게 인상적으로 읽은 독자라면, 주인공의 기숙사 얘기를 듣다 보면 아, 노르웨이 숲 아닌가 바로 짐작하게 된다. 열일곱 살 죽은 친구의 여자 친구를 만나는 대목에서는 어, 이거 노르웨이 숲이네, 한다. 


결국 이 글은 사 년 뒤 『노르웨이 숲』이라는 형태로 다시 태어났다. 그러나 반딧불이를 쓸 때만 해도 설마 이 이야기가 나중에 점점 뻗어나가 대장편이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214쪽) 


노르웨이 숲을 읽을 때는 이런 장편을 쓰고 싶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반딧불이를 읽는 동안 '나도 이런 글(소설) 쓰고 싶다'라는 강렬한 욕구가 일었다.

십대 후반부터 이십 대 중반까지의 그 불안정한 방황, 고민,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을 나도 말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이다. 


[헛간을 태우다] 


영화 '버닝'을 아주 재밌게 보았다. 이창동 감독이 전하는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등장인물이 지닌 독특한 캐릭터들이 맘에 들었다. 특히 불안한 눈빛의, 그러나 너무나 해맑은 그녀- 영화 속에서는 해미-가 인상적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아프리카, 굶주림, 판토마임, 귤까기 등을 묘사하는 장면들이 아주 좋았다. 


소설보다 영화를 먼저 본 입장이다. 그런데 영화가 한국적인 토양에서 아주 새롭게 잘 탄생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이창동 감독의 해석이 나는 아주 맘에 든다.


소설에서는 '그녀는 사라져버렸다' - '이따금 나는 불에 타 허물어지는 헛간을 생각한다' 라며 모호한 방식으로 이야기 끝을 맺는다. 나, 그, 그녀 - 등장 인물에 대한 이름도 없다. 영화에서는 인물들이 구체화되고, 이야기에 현실이 입혀졌다. 소설에서는 '그'의 욕망이 조용한 음산함으로 비유되고, '나'에게는 마음 한구석에서 가만히 타오르다가 무너져버리는 헛간이라면. 영화 속에서는 그 음산함과 모호함이 실제 헛간에 불을 지르고 질투와 분노와 욕망이 폭발하면서, '나(종수)'에게 장려한 배덕감(背德感은 부도덕한 일을 저질렀을 때 느끼는 죄책감 같은 감정을 말한다)마저 입혀준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보다 이창동 감독의 '버닝' 영화가 더 좋았다는 말을 조금 장황하게 설명했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도대체 소설의 내용이 뭐지? 아주 많이 궁금하고 선망(?)의 감정마저 있었다 할 수 있는데. 읽고 난 후에는, 음... 하는 정도로 '기대감'에 못미쳤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니면 내가 영화를 먼저 보았기에, 좀더 유려하고 화려한 어떤 '불길'을 기대했기에 실망했는지도 모르겠다.  


소설 '헛간을 태우다' 라는 말은 '태우고 싶다, 태울까' 정도로 해석이 된다면.

영화 '버닝'은 '타다, 태운다' 정도로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는 '태움'의 대상이 조금 더 구체적이며 섬뜩해진다. 나(종수)가 처한 현실(시대적 배경)이 될 수도 있겠고, 일도 하지 않는데 가진 것이 많은 '그(벤)이 될 수도 있겠고. 자신의 쓰고자 하는 소설 속의 어떤 욕망(주제)이 될 수도 있겠다. 


소설 읽고 난 후, 오히려 더욱 명료한 심정으로 이창동 감독에 대한 존경심이 깊어졌다. 



 영화 <버닝> 포스터 


책 <반딧불이>의 겉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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