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브랭 Feb 24. 2021

직장 내 따돌림으로 상처 입은 마음을 돌아보다

직장

회사에서 나만 빼고 화기애애하게 밥 먹으러 가는 게 한 달쯤 계속되면 멘털이 나가기 시작한다. 정말 겪어본 사람만 알 수 있는 고통이다.




사춘기 시절 학생들끼리 은근히 있던 거리감조차 잘 모르 무딘 학창 시절을 보냈었다. 항상 적당한 또래 무리 속에 속해 있었고, 딱히 따돌림을 당하는 급우도 없는 무색무취한 환경에서 적당한 사람으로 성장했다. 왕따를 당하는 사람도 뭔가 문제가 있다는 선입견이 있었음도 고백한다. 남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겪어보지 않은 고통은 원래 그렇다.


무난한 직장생활이었다. 임신 전까지는 그랬다. 직장에서 유일한 임산부가 된다는 것은 모든 종류의 차별에 맞서 싸우는 일이었다. 8시간의 근무가 하나하나 모니터링되었다. 모성보호시간 2시간을 쓰겠다는 말을 하고 나서는 가시방석이 따로 없었다. 회사에 똥칠을 해도 정도껏 하라는 모욕적인 말을 숨 쉬듯이 들었다. 업무에 전혀 접점이 없던 건물 경비까지도 뒤뚱거리며 걷는 나를 보며 임신해서 몸이 둔해졌다고 모진 말을 덧붙여 주곤 했다. 매 순간 공격을 받고 있었다. 매서운 눈초리로 쏘아대는 회사 공간에서 벗어나고만 싶었다.


숨통이 옥죄는 공간에서 어찌어찌 존재했다. 1년 짜리 계약직으로 입사해서 친한 동료도 딱히 없는 환경이라 더 힘이 들었다. 눈감고 귀 막은 채로 조용히 시간을 견뎠다.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당장 경단녀가 되어버릴 내 상황이 그렇게 스스로를 합리화시켰다. 내가 그만두면 당장 외벌이가 되어버릴 가정형편이 두려웠다. 영영 내가 스스로 돈을 벌지 못할 것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서웠다. 아이가 태어나면 돈이 더 필요할 텐데 내 집 마련도 못한 채 전전긍긍할 미래가 공포였다. 최대한 직장생활을 견뎌서 돈을 모아야 한다는 결심만 했다. 그저 견딜 뿐이었다.


지고 싶지 않았다. 회사의 퇴사 압박에 굴복하고 싶지 않았다. 법에 정해진 모든 종류의 모성보호를 사용하겠다는 나 홀로 준법투쟁을 했다. 외롭고 괴로웠다. 지지해 주는 사람은 없었다. 저출산이 문제라며 꽤나 사회의식 있듯이 말하던 부장은 당장 임산부 직원이 생기자 보란 듯이 요즘 것들은 애사심이 부족하다며 비난했다. 회사라는 공간에서 매일 상처 입었다. 우여곡절 끝에 회사생활이 끝났다. 똑같이 1년 계약직으로 입사했던 다른 이들은 무난한 재계약을 했다. 딱 임산부만 홀로 계약 만료를 통보받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아주 당연한 결과였다. 모두가 퇴사를 기다렸다. 내 퇴사를 기뻐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아서 슬펐다.


예정일보다 거의 한 달을 빨리 출산했다. 만삭과 조산의 딱 경계에서 겨우 인큐베이터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작은 아기를 낳았다. 겨우 건강한 아기를 출산했다. 후회가 밀려왔다. 천만다행으로 운이 좋아 무사히 출산을 했지만, 어쩌면 나의 임신 중 근로는 아기에게 대단한 충격이었음에 틀림없었다. 출산휴가는 출산예정일 45일 전부터 쓸 수 있는데, 출산휴가를 어떻게든 못쓰게 하려던 사측의 방해와 냉담한 분위기 속에 큰 잡음을 내고 싶지 않았던 얼띠기 임산부는 어쩔 수 없는 시간을 견뎌낼 뿐이었다. 아직 엄마가 되어본 적이 없던 어리석은 임산부가 저지른 최악의 선택이었다. 대표가 개지랄을 떨어도 출산휴가를 악착같이 받아냈어야 했었다. 인수인계로 끝까지 말썽 부리던 회사에서 퇴사하자마자 급작스러운 출산으로 너덜거렸다. 그래도 아이를 낳고 기르면서 회사에서 겪었던 고통은 서서히 잊혔다.


사실 잊고 있었다고 착각했다. 그때의 충격과 슬픔을 덮어두고 있었을 뿐이었다. 직장 내 따돌림을 겪고 있는 H를 만나기 전까지는 내 상처를 외면하고 있었다. 과거의 아픔이 생각나지 않을 만큼 마음을 단단히 동여매고 있었다. H는 나보다 20살이 많은 사람이었다. 에서 H7년을 근무했다. 어느 순간 본인을 제외한 직원들끼리만 친하다는 것을 눈치챘다. 자기들끼리 화기애애하다가도 H가 들어오면 싸해졌다. 우연인가 싶다가 어느 순간 점심시간까지 은근히 따돌림이 느껴졌다. 불편해하는 사람들 속에서 밥 먹는 것이 힘들어져서 따로 빠져나왔다. 어느 순간부터는 본인만 겉도는 게 당연해져 버렸다고 했다. 관리자에게 상황을 알렸지만 바뀌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 제기하는 당신이 문제라는 태도만 가시 돋쳤다. 팀원들이 합심해서 따돌렸다. H는 그저 본인 스타일대로 지냈는데 직장이 너무 힘들어졌다고 했다. 그 말을 듣자 내 안의 상처가 아직도 아물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상처조차 낫지 않은 상태로 H의 괴로움을 마주하니  괴로움이 가시지를 않는다. 그때의 나는 그걸 견디느라 마음을 다치고 말았다. 지금도 극복하지 못했다. 만일 아이에게 문제가 있더라면 평생을 자책했을 터였다. 직장 내 따돌림으로 인한 정신적 스트레스가 산업재해로 인정받은 것도 겨우 최근의 일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조산, 스트레스로 인한 태아의 발육부진 따위가 입증될 리가 없다. H의 말을 듣고 그렇게 눈물이 났다. 그날 밤, 나는 혼자 몸서리치게 울었다. 그 고통은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 나는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


H에게 직장에서의 나와, 개인 삶의 나를 구분하라는 쓸데없는 위로만 해줬다. 20살이나 어린 사람에게 듣는 위로가 H의 마음에 들어올 리가 없음을 알면서도 도리가 없었다. 그때 나는 책을 정말 많이 읽었다. 매일 책에 파묻혀 시간을 견뎠다. 스스로 혼자 있는 시간을 견딜 수없어 현실도피의 수단으로 선택한 독서였다. 독서모임까지 가입해서 열심히 읽었다. 책으로 태교 한다는 럴싸한 명분이 추가되어 겉보기로는 그럴듯하게 시간을 버텨냈다.


다음으로는 내 집 마련이 너무 조급하게 느껴졌다. 삶의 불안함을 견딜 수 없었다. 부동산에 관심 없던 남편을 닦달해가며 주말마다 집을 보러 다녔다. 당장 사지도 못할 집을 뭐하러 보러 다니냐는 남편과 매번 의견 충돌하며 아파트를 보러 다닌 덕에 결국에 집을 구입했다. 전세가 껴있는 매물을 겨우 잡아 당시 신고가를 기록하며 집을 구입했다. 은행 빚을 잔뜩 내서 겨우 등기를 했다. 가진 돈이 부족하여 입주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내가 가진 돈으로는 고작 현관 타일 정도 구입할 수 있을 것이었다. 정말 모든 것을 쥐어짜 겨우 언젠가는 이사 갈 수 있는 집을 마련했다. 말 운이 좋아 매매 이후에 부동산 가격이 폭등했다. 돈이 없어 이사도 못 가고 있음에도 1가구 1 주택을 이루어서 집주인이 되었다. 입자보다 돈 없는 집주인이지만, 코딱지만 한 안정감이 생겼다.


운이 좋았을 뿐이다. H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힘든 직장을 퇴사하고 운 좋게 재취업에 성공했다. 취업을 앞두고, 그 전 회사에서 악담이라도 퍼부을까 봐 그렇게도 마음을 졸였다. 세상은 넓고도 좁은데, 혹시라도 새 직장에서 전 직장에 전화해서 평판조회라도 할까 봐 겁이 났었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 생각보다 세상은 힘들지 않았다. 직장에서의 과도한 스트레스로 지나친 방호벽을 스스로 둘러싸고, 상대의 선의도 의심하는 못된 습관만이 남았다.


직장 내 스트레스는 학교폭력과 동급이다. 당하는 사람에게는 끝없는 공포와 절망이 남는다. 부모님과 선생님께 이르기라도 했던 학생 때와는 달리, 사회의 무게를 버티고 생계를 지켜내는 성인이 되고 나니 보호막이 없음이 두렵다. 그 회사를 버티고 견디느라 영혼이 다쳐버렸다. 내 상처가 영영 낫지 못하고 생채기 난 상태로 남겨질 까 봐 여전히 두렵다. 그저 말을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 H가 상처입지 않기를 바란다. 내가 과연 그 상처의 깊이를 헤아릴 수 있을지 아득하다. 어쭙잖은 어린애의 하찮은 위로가 어떻게 들렸을지 자신이 없다.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영영 헤아릴 수 없음이다. 나는 여전히 아프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본캐 나의 부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