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약직의 치사함과 더러움
직딩에서 경단녀, 그리고 워킹맘이 되기까지
사회생활을 계약직으로 시작했다. 시대가 그랬는지, 실력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되었다. 도시에 내 책상이 생겼다는 것으로 만족하며 안주했다. 계약직은 잠시 스쳐가는 과정이라 생각했다. 머지않아 정규직이 될 것이고, 계약직 때의 성과가 그대로 인정받을 것이란 착각도 했다. 첫 직장이었다.
계약직으로 입사하여 정규직 전환이 되었다는 선배들도 간혹 있었다. 관리자급의 선임들은 대학만 졸업하면 고급인력으로 모셔가던 시절이라 지금과는 상황이 달랐다. 열심히 하면 된다는데 대체 뭐가 열심히 인지는 명확한 게 없었다. 그래서 정신없이 스스로를 갈았다. 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정규직이 될 줄 알고 죽어라 달렸다. 이번만 한 번만, 곧 정규직 채용이 나겠지. 아무도 확답은 안 주면서 눈치는 줬다.
계약직 주제에 결혼도 했다. 계약직 결혼에는 그 흔한 화환도 없었다. 회사가 가장 한가하여 다들 휴가를 떠나는 때에 결혼식을 잡았다. 계약직 결혼식에는 대표조차 참석하지 않았다. 직원이 100명도 안 되는 작은 회사라 정규직원 애경사에는 빠짐없이 참석하던 대표부터 시작해서 간부급 직원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얼굴이 번질거리던 회사 상조회장도 불참했다. 고작 부장이 대표로 봉투만 들고 왔다. 뭐 그건 아무래도 괜찮았다. 봉투에 든 축의금이 전부다 하나같이 3만 원인 것도 괜찮았다. 원래 그런가 보다 했다.
비정규직의 끝 2년이 도래하였는데 또 재계약이 주어졌다. 계약직 티오는 있는데 정규직 티오는 없다고 했다. 결혼 때문일까? 평판의 문제일까? 이따위의 비생산적 고민을 하다 보니 너무 지쳐버려서 그만두었다. 자리만 옮겨 옆 부서에서 또 사원으로 불리기 싫었다. 이 회사가 치사해서 그런가 싶어 비슷한 일을 하는 곳으로 이직했다. 그냥 정규직에 대한 미련 따위 두기도 싫어 딱 1년짜리 계약직으로 옮겼다. 직장평판 조회도 없이, 인원채용의 사유가 뭔지도 알아보지 않았다. 딱 1년만큼의 책임감만 가지고 갔다.
오히려 나쁘지 않았다. 1년만 채용할 자리였고, 나로서는 퇴직금이 보장되어 있으니 복잡한 사내정치에 휘말릴 것 없이 신나게 지냈다. 아이가 생긴 것은 그 무렵이었다. 생각도 못했던 임신이라 아기가 찾아온 것도 몰랐다. 이직 후 가장 바쁠 시기라 피곤한 줄로만 알았다. 잠이 미칠 듯이 쏟아지고 이유 없이 허기가 지는 신호를 몰랐다. 생리주기가 지나도 별 생각이 없다가 갑작스러운 하혈이 온몸을 강타했다. 설마 하는 마음에 해 본 임신테스트기는 임신을 알려주었다. 덜덜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겨우 찾아간 회사 근처 응급실에서는 절박유산이라 했다. 현 상황에서는 임신이 유지될지도 끝날지도 알 수 없다고 했다. 피검사에서 분명 임신수치가 나오고 있으니 임신은 임신인데 결과는 알 수가 없었다.
회사에 병가를 내고 집에 처박혀 있었다. 그리고 생명이 떠나가고 있음을 알았다. 엉엉 울었다. 유산이었다. 나에게 찾아왔던 생명은 이 세상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절박유산이 유산으로 바뀌었고, 회사는 5일간의 유산휴가를 유급으로 주었다. 좋은 회사였다. 결혼 적령기의 나를 보고도 면접에서 결혼이나 남자친구 따위를 묻지 않은 유일한 곳이기도 했다. 단, 절대 정규직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알고 들어간 곳이기에 아쉽지도 않았다. 회사와 담백하게 거리유지할 수 있어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장동료들은 그게 아니었다. 유산휴가 후 출근한 나를 보고 별 말이 없었다. 건강을 묻기도 어색하고, 그만큼의 친분도 없어서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그렇게 다시 무색무취한 직장인이 되었다. 문제는 나였다. 유산 후 다시 생리가 돌아올 때까지 두려움의 시간을 견뎌야 했다. 이제는 생명이 주는 신호를 놓치지 않겠다는 예민함과 회복되지 않은 몸과 마음의 상처 사이에서 병들어갔다. 우울과 건강염려증 그 사이에서 임신에 대한 불안이 온몸을 휘감았다. 다시 임신이 되기는 할까, 무사히 애를 낳을 수는 있을까. 초고령 사회에서 고령임산부의 기형아 출산율 따위의 뉴스기사는 심란함만 더해줄 뿐이었다.
그렇게 미친 사람처럼 지내던 중 임신을 했다. 3개월 만의 일이었다. 운이 좋게도 업계의 비수기에 전 직원이 2주간 장기휴가를 받는 시기가 있었다. 그 덕분에 임신 안정기까지 무사히 집에서 견뎌낼 수 있었다. 휴가복귀 후 회사에 임신을 알렸다. 지난번 유산의 충격으로 노동법에서 보장된 모든 임산부 보호조항을 사용하여 나에게 온 생명을 지키고자 했다.
바로 그것이 동료들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2시간 단축근무 요청, 야간근로 불가, 휴게시간에 지장이 생기는 (위험한) 루틴업무 배제 등의 요청은 이기적인 임산부라는 손가락질을 받기에 이르렀다. 직장 내 모든 구성원이 나를 불편해했다. 이전의 유산휴가까지 덧붙여져서 예민하고 허약하며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찍혔다. 아무도 나에게 말 걸어 주지 않고, 밥도 혼자 먹었다. 계약종료까지 반년 정도 더 남아있는 것이 문제였다.
회사는 깔끔하게 일을 처리해 주었다. 노동법의 규정대로 임산부의 모성보호를 받아주었다. 심지어 약간의 부담이 있는 업무까지 배제하기 위해 비정기 부서이동까지 해주었다. 무사히 출산하라는 덕담과 함께 새 부장은 전입인사를 해주었다. 그게 끝이었다. 여전히 대화상대는 없고, 같이 밥 먹는 사람도 없었다. 회사는 친구 만나는 곳이 아니라 일하는 곳이니 아무래도 상관없다 여겼다. 나의 기존업무를 대체하게 된 또 다른 계약직원은 나를 벌레 보듯 경멸했지만 다시 만날 사람이 아니라 상관없었다.
1년을 계약하고 입사를 했다. 임신 막달까지 일을 하게 되었다. 9개월 차 임산부가 되니 정말 힘에 부쳤다. 이번 계약이 끝나면 한동안은 출산 및 육아로 재취업을 엄두도 못 낼 것을 알았다. 대표는 이 점을 파고들었다. 퇴사 전에 산전 출산휴가는 불가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계약만료로 퇴직하면 입을 닫겠지만, 산전 출산휴가 따위를 입에 올리는 순간 각오해야 할 것이라는 말을 대표 부인을 통해 들었다. 아쉬울 것도 없었지만 서운했다. 비슷한 시기 정규직원의 유산으로 임신했음을 티 내지 말라는 분위기까지 불편했다.
퇴사 3일 후 출산을 했다. 37주가 되자마자 아이를 낳아버렸으니 요즘 기준으로는 조산이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한몫을 했으리라 짐작만 할 뿐이다. 어쨌든 아이를 낳고 나니 완전한 실업자가 되어버렸다. 행복한 산후조리는커녕 실업급여를 신청하고 구직을 알아보았다. 오로가 나오고 젖몸살로 생고생을 하면서도 불안했다. 이렇게 경력이 단절되어 버릴까 봐 조바심이 났다. 내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채로 경단녀가 될까 봐 두려웠다.
아이 백일을 기점으로 적극적으로 재취업을 시도했다. 남편과 죽어라 싸우면서 면접을 보러 다니고, 그러다 면접에서 애엄마인 것이 들키면 탈락을 했다. 미친 시간의 연속이었다. 어찌어찌 또 재취업을 했다. 그렇게 새로 취직한 회사는 정말 최악의 블랙기업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딜 수밖에 없었다. 이 취업난 속에서는 5개월의 공백조차 허용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일하는 엄마가 되었다.
블랙기업을 그만두고 취업했고, 또 2년 후에 그만두게 되었다. 이후 몇 번의 이직과 퇴사를 거쳤다. 계약직은 왜 이렇게 치사한 대접을 받을까. 유급휴직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정규직원처럼 3일간의 유급가족 돌봄 휴가만이라도 눈치 안 보고 쓰고 싶다. 아이 어린이집, 유치원 행사를 위해 반차를 내고 싶다. 2시간의 육아시간을 쓰는 정규직원이 가끔 부럽고, 2년 육아휴직 신청하고 대학원에 진학하는 사람에게 질투 날 뿐이다. 그는 육아를 통해 자신의 스펙업의 기회가 되는데, 나는 육아가 스펙디스카운트가 되니 초라하다. 육아하며 공부하겠다는 욕심에 경의를 표하면서도, 육아하며 취업면접을 통과한 나는 독한 년이라고 하는 분위기도 서운하다.
있는 육아시간도 못쓰는 계약직 주제에 뭐 이리 말이 많냐 하면 또 할 말이 사라진다. 계약직도 육아기 단축근무 할 수 있으니 사용하라는 격려를 받으면 숨이 갑갑하다. 끝도 없는 회의를 육아시간 따위로 변경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계약직 스스로 눈치 보지 말라는데, 그게 바로 내가 초라하게 된 이유다. 참 더럽고 치사하다. 그냥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