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능한 척하는 바보(feat.경력직)

워킹맘

by 나브랭

경력을 살려 취업을 했으니 회사에서는 당연히 업무를 바로 지시했다. 문제는 나였다. 5개월을 꼬박 아무 생각도 없이 아기만 보고 세상 편하게 있다가 사회에 바로 나오니 기억이 날 리가 만무했다.


출근 첫째 날 아침에 보고서를 읽었다. 분명히 내가 아는 글로 쓰여있는데 이해가 되지 않아 세 번을 다시 읽었다. 분명 반년 전까지 숨 쉬듯이 자연스럽게 읽어냈었는데 이제는 모르겠다. 기껏 경력직으로 뽑아놨더니 알맹이가 하나도 없다는 평가를 받을까 봐 괜히 진지한 표정을 꾸며내었다.


출근 둘째 날에는 엑셀 문서 하나를 작성했다. 분명 간단한 엑셀 함수였는데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 키보드에 올려놓은 손이 방황했다. 혹시 누가 볼세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지어냈다. 이전 직장에서 선배들이 어떻게 하는 거냐고 물어보면 저 사람은 뭐 이런 것도 못하는가 싶어 내심 한심하게 생각했었다. 이제는 내가 바로 그 한심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멍하니 있다가는 내 실력이 들통이 날 게 뻔하니 엄숙한 표정으로 꾸며내고 괜히 유능한 척 키보드만 경쾌하게 두드렸다. 아직 업무 파악이 덜 된 탓이라 생각하며 스스로를 위로했다.


퇴근 시간 한 시간 전에 갑자기 옆 부서 협조 건이 들어왔다. 내가 빨리 진행해 주지 않으면 줄줄이 딜레이 되는 일이라 급하게 처리하려는데 내용 파악이 어려웠다. 대체 뭔 말인지 이해가 안 되어서 읽고 또 고쳐 읽는데 자꾸 시간만 지난다. 빨리 퇴근해서 내 새끼 보러 가야 하는데 일이 손에 잡힐 리 만무하다.


애기엄마라더니 회사에서 제 할 일도 못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퇴근시간을 넘겨서까지 일을 끝내고 갔다. 나는 시어머니가 아이를 봐주니 이런 급작스러운 일에도 대처가 가능했다. 내 퇴근과 베이비시터의 퇴근이 맞물리는 워킹맘이라면 회사에서도 집에서도 죄인이 될 게 뻔했다. 일하는 엄마는 일도 잘해야 하고 엄마도 잘해야 하는데 둘 다 잘하는 건 너무나 어려워서 다 포기하고만 싶어 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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