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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Jul 18. 2023

습습한 날에 015B의 단발머리를 들으며

그 소녀 데려간 세월이 미워라 워우워

이번 마감이 끝나고 1-2주 짬이 생겨서 아이 방학 전에 해야 할 일을 하고 있다. 미용실에 간다던가 친구를 만난다거나. 시시콜콜하지만 이번에 못하면 한없이 밀리는 그런 일들이다.


대학생 이후 어깨가 넘어가는 긴 머리 기장을 고수해 왔다. 회사에 다닐 때부터는 긴 기장으로 웨이브 펌을 했었다. 그러다가 작년에 어쩐 일로 인스타그램에서 미용실 광고를 보고 혹해서 멀리까지 찾아가 펌시술을 받았다.


큰 마음을 먹은 것 치고 끝은 비극이었다. 머릿결이 아주 그냥 몽창 상했다. 미용실보다 나이 든 탓에 내 머리카락이 옛날같이 튼튼하지 않은 탓일 거라고 생각하겠다.


날로 상하는 머리칼을 견디고 견디어보았다. 올해 아이 입학식을 앞두고 개털 같은 머리로 참석할 수 없었다. 과감히 20센티 정도를 잘라냈다. 그리고 여전히 상한 머리가 남아있어 이번에 미용실에 갔더니 또 한 뼘이나 잘라야 한단다.


머리를 자르고 거울을 보니 펌기 하나 없는 애매한 기장이 많이 어색했다. 미용실을 나오며 습한 공기가 목 주변을 갑갑하게 스치니 기억났다. 지금으로부터 딱 20년 전 19살 그 해 여름의 그 머리였다. 쇄골에 스칠까 말까 한 묶기도 어중간한 똑 단발.. 그제야 이 머리 모양이 금방 익숙해졌다.


내가 여태 죽어라 똑단발을 피하는 이유는 똑단발에 대한 좋지 않은 기억 때문이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는 귀밑 3센티 두발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2학년 올라가며 학교를 한 번 옮겼는데 거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고슴도치 우리 엄마는 그 시절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고 다니던 그때의 내가 제일 귀여웠단다.


전학 가고 불과 한 달 후에 결정된 번갯불에 콩을 볶는 듯한 운명으로 갑자기 나는 미국으로 학교를 옮기게 되었다. 혼란스러웠지만 그곳은 자유의 나라가 아닌가. 신나게 염색을 하고 머리를 기르고 다녔다.


자유의 방종은 착각을 낳는다. 밀레니엄 세기말의 트렌디한 헤어스타일이라고 여겼던 그 머리는 그냥 북청사자놀음의 사자머리였다.  


가까이서 보면 알록달록한데 멀리서 보면 무슨 색인지 알 수 없다. 출처 국립무형문화원.


엄마가 그 머리가 꼴 보기 싫어도 요즘 표현으로 중2병 환자려니 하고 참으셨던 건지. 아니면 내가 귓등으로 흘려 들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몇 년이 지나지 않은 스물몇 살의 어느 날 나는 그 시절 사진을 보고 화들짝 놀라 사진을 딱 한 장만 남겨놓았다.


그리고 귀국하며 바로 미용실로 갔고 사자머리를 검게 염색했다. 새로 전학 가는 학교는 머리는 기르게 해 준다고 하여 안도했다.


그 시절 전지현 언니의 생머리를 선망했던 우리는 그때 너도 나도 매직 스트레이트 펌을 했다. 아침 일찍 머리도 못 말리고 등교하는 우리들의 모습은 찰랑찰랑이라기보다는 떡진 물미역을 휘감은 듯했다.


우리는 긴 생머리를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나 역시 필사적으로 유일하게 보장된 자유를 수호했다.


오 언더 더 씨…


그리고 나는 19살이 되던 1월 나의 그 치렁치렁하고 정신 사나운 모양새를 마땅치 않게 생각하던 우리 엄마의 꼬심에 넘어갔다.


고3인데 머리 감고 말리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니 신경 안 쓰이게 잘라라. 그리고 넌 단발머리 중학교 때가 제일 귀여웠다며 엄지를 척하는 제스처를 잊지 않으셨다.


그렇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엄마를 따라 미용실에 와있었고 머리카락이 바리깡으로 휭 잘려있었다. 짧아진 머리가 어색했지만 그래도 뭐 누가 신경이나 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바로 학원에 갔더니 정말로 교실에 있던 다들 흠칫 놀라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아니 머리 좀 잘랐기소러니. 그리고 그렇게 친하지 않았던 어느 짓궂은 남자애가 다가오더니 그랬다.


머리 왜 잘랐어? 다스베이더 같네.


오 파덜…



재미있는 것은 함께 하려고 한다. 누군가는 크큭 웃음을 참았고 누군가는 깔깔깔 박장대소했다. 마주치는 아이들마다 야야야 너 왜 그랬어? 혹시 실연당했니? 라는 나로서는 영문도 모를 질문을 물어보았다.


그제야 엄마의 꼬드김에 넘어간 것을 깨달았다. 후회해도 이미 늦은 것이었다. 머리는 이미 잘랐으니. 모든 게 예민하던 그 시절이었기에 다스베이더 머리는 마르지 않는 물미역머리보다 더 신경이 쓰였다. 습한 여름이 되니 시원하게 묶이지 않는 머리 기장 때문에 도리어 신경이 쓰인다며 꽤나 툴툴거렸다.




오랜만에 고등학생 시절 그 머리를 하고 그 시절 친구를 만났다. 친구가 연신 20년 전과 똑같네 똑같다며 웃어서 나도 그냥 풉 웃었다. 오랜 친구 사이니까 나이를 반이나 깎아먹어도 민망하지 않은 거다.


친구를 만나고 오는 길에 스포티파이에서 015B의 <단발머리>를 찾아서 들었다. AOA의 <단발머리> 노래보다 이 노래가 떠오른다는 건 나도 이제는 점점 멀어져 가는 세기말을 기억하는 옛날 사람이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어릴 때부터 이 노래를 좋아하는 이유는 도입부에 뿅뿅뿅 신시사이저 소리 때문인 것 같다. 조용필의 원곡보다 이 커버가 더 좋은 이유이기도 하다. 이 뿅뿅뿅 세 번으로 단발머리의 발랄함을 바로 떠올리게 하는 센스가 좋다. 비록 나의 단발머리는 칙칙한 다스 베이더였지만. 아무튼 이걸 들으니 습습한 공기가 좀 청량해지는 느낌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헬스장에서 두 시간 동안 실컷 운동하고 땀을 흘리고 샤워하며 머리를 감고 선풍기바람에 머리를 말려보았다. 비가 며칠 째 좀처럼 그치지 않아 공기가 아주 무겁다.


 그 언젠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전해주던 그 소녀.
오늘따라 그 소녀가
왜 이렇게 보고 싶을까.



가사를 흥얼거리며 머리를 말려보니 역시 머리 말리기는 짧은 머리가 더 낫다.


너는 똑 단발 때가 제일 예뻤다던 우리 엄마 말이 진심이라는 것은 잘 안다. 심지어 내가 첫째 육아휴직이 끝나고 복직하던 몇 년 전, 엄마는 내가 고3 때 머리를 잘랐을 때 했던 그 말을 애엄마가 된 내게 토씨 하나 안 틀린 듯 똑같이 하셨으니. 아직도 친정에는 나의 귀밑 3센티 똑 단발시절 중학교 2학년 미국 가기 직전의 여권사진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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