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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아옹 Jul 25. 2023

서이초 사건에 대한 단상

올해 처음 학부모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1학년 교실에서 일어난 서이초 사건에 더욱 몰입이 되고 슬픔을 형언할 수 없다.


학부모 생활 겨우 한 학기를 끝낸 나는 어쩌면 갑이었을까? 나는 지난 수년간 창구에서 일했던 을이었다. 민원의 고충을 잘 알기에 선생님께 업무로 부담드리지 않으려고 아이가 결석할 때 빼고는 연락드린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계속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내가 챙긴다고 챙겼지만 우리 아이가 미숙한 점이 많아 선생님의 손을 타는 아이가 아니었는지 걱정되었다.


딱 한번 학교에서 전화를 받은 적이 있었다. 핸드폰에 00초등학교라고 떠서 식은 땀이 날 듯 했다. 알고 보니 아이가 신발을 잃어버렸다며 실내화를 신고 하교를 한 것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와 집에 와서야 그 사실을 알고 당황했는데 선생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아이의 덜렁거림에 선생님을 번거롭게 해 드린 게 아닌가 싶어 어찌나 죄송하던지.


그래도 경험 많으신 아이 담임선생님께서는 우리 아이가 교실에서 잘하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나를 도리어 격려해 주셨다. 내가 햇병아리 학부모임을 알아주시는 담임선생님 배려에 마음이 괜스레 먹먹했었다.


언론과 인터넷에는 학부모 갑질에 대한 자극적인 사례들만 나오지만 아직까지 우리 사회에는 나와 내 주변의 소소한 사례가 더 보편적일 것이라고 믿고 싶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있다. 목소리가 크면 이긴다는 말이다. 명분도 논리도 교양도 없는 갑질이 일상화된 사회다.


특히 황금만능주의가 만연한 요즘은 돈이면 다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져있다. 그런 세상이라 그 갑질의 이유의 명분은 대개 돈에서 비롯된다. 건넨 돈이 적건 많건 중요하지 않다. 카페에서 커피 한잔 시키고 배민에서 음식 하나 배달하면 바로 갑이 된다. 내가 너에게 ‘돈’을 줬는데 ‘돈값(때로는 당연히 그 이상)’을 못한다는 분노조절장애로 표출한다.


게다가 돈에 대한 분노는 강렬하다. 액수가 커지면 살기까지 느껴지며 칼부림이 일어난다. 요즘 사회면에서 일어나는 강력범죄를 보면 치정살인이나 다른 이유보다 돈에 대한 원한에서 비롯된 살인이 더 익숙하지 않은가.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건 돈에서 비롯된 원한은 ‘돈’이라는 보상으로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학교 민원은 돈으로 한방에 해결될 성질이 아니다. 학교의 선생님들과의 관계에는 돈이 개입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학교의 갑질은 깔끔하게 해결하기 힘들 것이다. 이런 성질 때문에 교사들의 스트레스가 말도 못 할 것이라 생각한다.


선생님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된다는 시절이 있었다. 요즘은 사교육이 보편적이더라도 사제관계는 기본적으로 이해관계보다도 신뢰와 감사와 존경에서 비롯되는 것이 전통적인 정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제관계조차도 갑질이 퍼져있다는 건 갑질은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문화가 되었고 망국병 수준임을 드러낸 것이다.


이 사건은 교사를 향한 갑질에 대한 보호장치가 취약한 구조적인 문제가 핵심이다. 꼭 학교가 아니더라도 우리 사회의 모든 조직이라면 자유로울 수 없는 문제다. 갑질이 날로 강도가 세지는데 당한 사람만 홀로 책임을 부담해야하는 구조다. 이럴 경우 대개 불똥이 튈까봐 철저히 외면하며 ‘너의 능력 부족’ ‘너의 업무 미숙‘으로 평가로 낙인까지 찍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우려스러운 것은 이 분노를 엄마에 대한, 맘충이라는 혐오로 귀결 지으려 한다는 점이다. 혐오는 분노를 돌릴 수 있는 참으로 쉬운 수단이지만 당면한 문제의 근본을 가려버리고 방치한다. 다시 말해 문제 해결에 도움이 하나도 안 된다. 자성의 목소리가 커져도 구조적인 해결책이 없다면 과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좋아하는 표현은 아니지만, 소위 말하는 그 진상은 본인이 진상인 줄 모른다. 그래서 진상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최근 같이 이슈가 되고 있는 소아청소년과 폐원 문제도 그렇다. 의료 수가 현실화 문제에서 비롯된 이슈가 구조적인 개선이 아닌 그들의 존재 조건인 엄마들을 증오하는 파국, 난센스로 결론 내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엄마는 혐오하면서도 저출산 문제는 산업 구조를 무너뜨리니까 심각하며 엄마가 되기를 권유한다.


밑도 끝도 없이 더 할 말이 많지만 줄여본다. 이 사건으로 지난주에 보낸 내 책의 원고 교정 안을 대폭 수정할 생각에 머리가 아파온다. 내 생각 좀 정리하자고 시작한 일이었는데 아무래도 나는 거대한 주제의 이야기를 시작했나보다. 과연 나는 이 벌집 쑤신 이야기들을 연착륙시킬 수 있을까? 어깨가 무겁고 비장해지려고 한다. 이걸 시작한 내 손등을 아주 그냥 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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